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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삼겹줄 신앙(시편16)

 

들어가는 말

 

마리안느 머스그로브는 한국에도 소개된 유명한 어린이 동화작가입니다. 그녀의 동화가 유명한 이유는 어린아이들의 인성과 감성을 잘 발달시켜주는 내용과 그림들 덕분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그녀의 신간 “걱정을 걸어두는 나무”는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가 근심과 걱정이 있을 때는 누구에게든지 말해야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매일 잠자기 전 걱정 나무의 가지에 앉아 있는 동물들에게 하루 동안 있었던 고민들을 털어 놓고 잘 돌봐 달라고 자신의 걱정들을 가지에 걸어놓습니다. 그러면 걱정 나무의 동물들은 소녀의 고민을 묵묵히 들어주고, 신기하게도 이 과정에서 소녀는 그 자체만으로도 용기와 자신감을 얻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우리의 고민과 걱정거리를 내려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고민을 털어 놓으십니까? 그리고 무엇을 통해 용기와 자신감을 얻고 계십니까? 오늘 다윗의 신앙을 통해 우리가 누구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얻어 가며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는 귀한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1. 다윗의 보호청원

오늘 읽은 다윗의 시는 특별히 믹담이란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믹담이란 뜻 자체는 후대에 와서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떤 감정으로 이와 같은 시를 노래했을까 라는 것을 상상해보면 우리는 이 믹담의 의미도 알게 될 것 입니다.

다윗은 1절에서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합니다. 그는 평생을 싸움터에서 살아왔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진실함이 드러나는 때가 언제일까요? 도움을 구할 때입니다. 살 방향을 구할 때입니다. 살고자 고개를 숙여본 적이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고 자신의 꾀로 어려움을 이겨낸 사람보다 오히려 진실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시련을 주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뻣뻣하게 굳은 목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생각으로 인생을 풀어나가려는 완고함 때문에 곧잘 하나님을 실망시킵니다. 그야말로 자신이 아니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란 어쩌면 연약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란 오히려 강한 사람들입니다. 끝내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손을 벌려도 그 손을 뿌리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강한 것은 나중에 더 큰 고난으로 아픔을 당할 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 부드러움은 나중에 오히려 더 큰 어려움도 이겨낼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믹담의 비밀은 다름 아닌 주린 심정이오. 부드러워지다 못해 허물어진 심정으로 드리는 노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신앙의 비밀이 담겨 있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누리지 못할 기도입니다. 마음자세입니다. 인간으로서 드릴 수 있는 가장 진실한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 반드시 이와 같은 심정으로 기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가 하나님께 흐느끼며 기도하듯이.. 자식을 얻지 못해 슬피 울던 야곱의 아내 라헬의 기도와 같이..

믿음은 내 심정은 주리도록 만들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대는 더욱 커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다윗은 자신은 비우고, 하나님으로 삶을 채울 줄 아는 기도자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리 기도해야 합니다)

 

2.

본문 2~5절은 다윗이 하나님께 자신의 믿음을 선언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며, 어른이 되어 갑니다. 사람도 믿을 수 없고, 사랑도 믿을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정을 위해 사랑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 전부를 던져본 사람만이 ‘믿을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믿을 것이 없음을 깨달아감을 말합니다. 다윗은 믿었던 신하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다윗은 이용당했습니다. 왕이면서도 이와 같은 불의를 참아야 하는 때가 많았고, 더구나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왕국을 빼앗기기까지 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다윗과 같이 사랑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과 백성들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정당하게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압살롬을 피해 다윗이 성을 버리고 도망쳤을 때 그를 따라나섰던 충성을 맹세한 백성들은 어려움을 당하자 다시 다윗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다윗은 다시 ‘무엇도 믿을 수 없는 상태’에 놓입니다. 그때 다윗은 기도합니다. 주님..주님밖에 나의 복이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오히려 하늘 아래 자신이 택한 성도들이 자신의 기쁨임을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깨닫습니다.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모든 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믿음과 사랑을 경험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통해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지난 상처로 “믿을 수 없는” 상태가 된 내가 이제는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나음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사람으로 상처를 받았거든 오히려 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인간을 만드신 후 주님처럼 후회를 하신 분이 없으며, 반대로 인간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도록 허락하신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신 분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을 것을 선언함으로 도리어 하나님께 믿음을 얻은 것입니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의 한 겹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 겹줄만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어서 6~7절에서 지금 현재의 상황에 대해 ‘믿음 안에서’ 만족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탈무드는 이 구절에 대해 다윗이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했겠는가에 대해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다윗은 “사울의 병사들에게 목숨을 위협을 피해 밤새도록 도망치다 작은 동굴에 몸을 숨기고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깬 상황에서 이와 같은 노래를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목숨의 위협을 느껴 밤새 도망다니다가 아주 작은 동굴에 숨어 그나마 잠이 들었다 깼을 때.. 놀랍게도 그는 원수들에게 발각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작은 동굴의 입구가 ‘거미줄’로 온통 쳐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수들도 거미줄을 보고는 그를 찾지 못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6절의 아름다운 구역, 아름다운 기업이란 그에게 허락된 매우 작은 피난처에 불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도무지 감사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가운데..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 있던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그곳이 바로 아름다운 기업이요 그곳이 바로 아름다운 구역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환경을 통해 다윗에게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현재를 초월할 수 있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함’이란 믿음의 두 번째 한 겹줄을 손에 쥐게 된 것입니다.

/쉬고

그러나 두 겹줄도 끊어지기 십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다윗의 삶에 힘과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세 겹줄을 마저 손에 쥐어 주시기 위해 그에게 소망과 기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경험합니다. 처음 자기 직업을 가지고 열의를 가지고 해나가던 사람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심각한 ‘직업적 우울증’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우울증을 경험합니다. 자신의 인생이 전부 무의미한 것처럼..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닌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아예 포기해서는 곤란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삶을 보다 건강하고 생명이 넘치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이런 시험을 통과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경험한 일은 오히려 사울 왕에게서 도망쳐 사는 삶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일을 수도 없이 경험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헤어지도록 하셨는가요? 사랑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는 바로 실연의 아픔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사업에 성공할만한 확신을 주셨는데.. 왜 잘 되지 않도록 내버려 두셨는가요? 성공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는 바로 실패의 아픔을 선물하시기도 하십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살아야 우리가 기쁨과 생명의 길을 걷게 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집착’에 허비하곤 합니다. 내가 사랑인 줄 안 것도 실은 ‘집착’입니다. 내가 신앙인 줄 안 것도 실은 '집착‘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성공이라고 안 것도 실은 하나님께서 하나도 기뻐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게 가장 좋은 방법과 필요로 우리를 인도하신 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약속이 없는 백성은 망하듯이.. 소망이 없는 백성도 곧잘 믿음을 잃고, 삶을 집착하다가 낭비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거야.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실 거야.” 그야말로 하나님 한 분만으로 생명과 기쁨을 노래하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면 더 이상 삶을 집착하지 않고, 삶을 감사와 희락으로 노래하게 됩니다.

다윗은 집착으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그가 왕이 되기 위해 집착하다.. 인생을 낭비했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고, 하나님과 함께 그 뜻을 이뤄드렸습니다. 따라서 도저히 구원을 바랄 수 없는 때에도 그는 도리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지금의 삶에 집착을 초월하여 소망과 감사를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들의 불행에 주목한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주변의 어려움과 불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인내하며 신앙을 지킨 성도들의 감사와 소망에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미래에 대한 구원의 확신으로 오늘을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희락’의 세 번 째 한 겹줄을 손에 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한 겹줄, 두 겹줄, 세 겹줄의 믿음의 동아줄을 단단히 붙잡은 사람인 것입니다.

<호소>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신 분이 있다면 그분은 이제 ‘한 겹줄’의 믿음의 끈을 붙잡으신 겁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감사함과 만족함을 배우게 되었다면 그분은 분명 ‘두 겹줄’의 신앙을 붙잡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소망과 희락의 세 번째 줄을 붙잡으셨다면 이런 분은 다윗과 같은 믿음의 동아줄을 손에 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믹담의 비밀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동아줄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이 동아줄을 붙잡아야 .. 하나님께로부터 삶에 대한 용기와 감사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삶의 호흡이 길어집니다. 여유가 생깁니다. 거짓을 멀리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죽음을 거치더라도 끝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의 삶의 구역과 일터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구역과 기관들은 어떤지요? 아직 한 겹줄도 잡지 못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답답하시지는 않습니까?

내게 주어진 삶의 구역에 여러분은 얼마나 만족하고 감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욕심으로 살지 않고 소망 가운데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인생이 되기로 결단한 분들마다 삼겹줄의 믿음과 은혜가 마르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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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바꾸는 비밀(요2:1~11)

 

들어가는 말

카톨릭교회를 방문해보면, 좌우에 마리아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에게 ‘마리아신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묻는다면, 대부분 그렇다고 말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아니었음에도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으로 기적을 베푸는 내용이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도 어머니 마리아의 전언이 아들 예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지금도 마리아 상 앞에서 중보의 기도를 요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셨습니다. 또 어린 나이에 동정 잉태한 아들을 가진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여느 보통의 자녀들보다 더욱 애절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 사생아나 다름없이 태어난 예수님에 대한 평가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평판은 그렇게 좋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이들 가정은 지켜졌다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 가정이 아버지 요셉 덕분에 지켜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아버지 요셉의 역할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아버지 요셉의 역할은 예수님의 삶의 배경처럼 느껴지도록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할 때 보이지 않지만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통해 우리의 형편이 다스려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 역시 예수님이 태어나고, 기고 서며, 아이로 자라기까지 마치 하나님처럼 훌륭하게 이 가정을 보호하고, 재앙으로부터 건져내는 훌륭한 역할을 감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늑한 집과 같이 자신의 역할을 다 한 요셉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세계란 큰 집으로 인식되었었는데, 하나님이란 바로 그 집의 주인이란 믿음이 있었듯이 아버지 요셉은 이들 가정의 주인으로써 군림하지 않고, 오히려 연약한 아내와 독특한 아들을 보호하고, 사랑해낸 가장으로써 이해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를 가진 아내를 믿어준 요셉의 믿음과 용인은 애굽 땅과 베들레헴의 나그네 여정에서 투철한 가장의 모습으로 승화되어 있었고, 12살에 예수님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에 갔던 모습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훌륭한 남성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내와 아들을 위해 살았을 아버지 요셉의 삶 속에서 오늘 우리나라의 헌신적인 아버지의 모습 역시 읽을 수 있겠습니다. 교회에서의 남신도의 자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 남신도분들만 빼고, 나머지 해당되는 분은 저를 따라해 보시겠습니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여보 힘내세요 예쁜이가 있잖아요” , 민원이 많이 들어와서..마지막으로.. “집사님 힘내세요. 예수님이 있잖아요”

 

1. 맛을 바꾸는 코드 : 예수

오늘 성경 이야기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인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가나 땅에 혼례가 치러집니다. 최소 일주일은 걸리는 이 결혼식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가게 됩니다. 당시 보통의 여인들이 결혼식에 하는 일은 음식 장만 등의 일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의 경사스런 혼인잔치를 위해 여인들은 최선을 다해 게스트(손님)가 되어 주었습니다. 힘을 다해 결혼을 축하해줬고, 춤추고, 음식을 나누는 매우 즐거운 잔치였을 것입니다.

왜냐면 결혼은 인위적인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하신 최대의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도 하나님이 선물하신 최대의 축제인 결혼식에 나가 계셨습니다. 그래서 본문1절은 어머니가 거기 계셨고, 2절에서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 혼례식의 주인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 무리를 초대하지 않았을 것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정황상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아들 예수와 그 제자들에 대해 소식을 들은 주인이 기꺼이 이들을 초대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혼례식에 오자마자 마침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없다.’라고 말하십니다. 이 때 예수님의 대답이 조금 엉뚱합니다. “어머니,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이 둘의 대화는 지금 가나의 혼인잔치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대화입니다. 애시당초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과는 다른 관심을 가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나 아들이나 오직 한 가지에 주목하여 대화를 나누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때, 곧 하나님의 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때, 그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시작이 바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있음을 어머니 마리아는 강하게 확신했습니다.

때문에 어머니 마리아는 곧바로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일을 시키든지 그대로 하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중요한 순간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느냐가 곧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순간입니다. 도대체 성령으로 잉태된 내 아들 예수, 그 예수를 통해 앞으로 전개될 하나님 나라란 무엇일까. 어머니 마리아도 궁금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당시 유대법에 따라 정결례에 사용되는 돌 항아리를 보시고, 그 여섯 항아리에 물을 아귀까지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여섯 항아리는 비워져 있습니다. 모든 정결례식이 마쳐진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능력을 잃어버린 유대의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능력도 기적도 나타나지 않는 죽어버린 공동체나 나라를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비어 있는 그 항아리 6개에 물이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으로 시작했다가 내 노력으로 인생을 채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젠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절망하여, 아예 물을 채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세상에게 실족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어진 분량과 계획을 채우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를 보십시오. 내가 지금 믿지 못했을 뿐이지..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때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마치 모래시계에 모래가 빠지듯..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카운트다운을 세며, 항아리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어라!”

 

물이 채워지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종교적 열정만으로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가 올 수 없습니다. 내 열심만으로는 주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다는 것은 맛이 달라짐을 말합니다. 성경은 수도 없이 예수님을 통해 놀라운 일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여인이 예수님을 통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린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란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린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왜 우린 변화될 수 없지?

안타깝게도 믿음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설명해줘도 얻지 못한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복음서는 오직 다음의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통해 인생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아무런 감동이 없던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통해 맛을 찾았습니다.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한 모임도 “예수님께 주목하였더니” 맛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미 모두 취해있었을 연회장이 새로 마시게 된 더 좋은 포도주의 맛을 보고는 여기 저기 탄식이 나옵니다. “사람마다 좋은 것을 먼저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고 소리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금방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지금까지 우리가 맛보지 못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신기하고, 놀랍고, 대단한 축제가 될 것이란 사실을 오늘 이야기는 말해준 것입니다.

 

2. 남신도회에게 부탁하는 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처음에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요셉의 진면모에 대해 나눈바가 있습니다. 남신도회는 여신도회와 달리 어느 교회나 그 수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우리 교회만 보더라도 여성신자와 비교하여 1/3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수가 적다고 해서 함부로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예수를 믿고, 직분을 맡아,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고,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 억센 사내들이 ‘예수’라는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도 왠지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나 남신도회가 변화되면 교회가 변화되는 경우는 많이 봅니다. 어떻게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먼저는 예수님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올해 총회 표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로워지는 교회입니다. 그만큼 교회와 성도를 답게 만다는 것은 예수 밖에 없다는 성찰에서 나온 표어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 근심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제일 큰 걱정은 교회에서 예수가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를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지만, 그 속에 예수가 없습니다. 맹물 같은 인생처럼 아직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경험할 마음이 없는 빈 항아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빈 항아리로는 성도라 부를 수 없습니다. 예수를 만나야 포도주가 됩니다. 포도주인척 해도 소용없습니다. 진짜 예수님을 알고 있는 사람 앞에 서면 금새 거짓신앙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도회는 인간집단이 아니라 성도의 모임으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공급받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분위기를 축제의 분위기로 만드는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나 청년이 아무리 앞에서 나팔을 불고 북을 쳐도, 남신도분들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 집회는 망쳐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 한 집사님이 남신도 기도회를 만들기 위해 궁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자청해서 목사님께 말씀을 드리고는 아침밥을 지어 기도회에 나온 분들에게 나눠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신도 아침기도회가 끝나고 아침을 먹으니.. 예전에 보지 못한 분들도 나왔다고 합니다. 식사를 거르기 쉬운 가장이나 혼자 사는 분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죠. 대화중에 근엄한 줄 알았던 집사님이 실은 수다쟁이였다든지.. 아무 말도 안해서 신앙이 있을까 했던 분이 실은 3대째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좋은 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끈은 쉽게 끊어지지만, 여러 줄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성도 역시 모였을 때 강해지는 것입니다. 자청하는 신앙으로 힘써 모이고, 교회의 분위기를 바꾸는데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는 섬기는 자세만이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신도회 활동 중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성과욕심입니다. 이것들은 대부분은 명령하고, 통제하는 습관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실상 이런 통제 욕구는 정신질병에 가깝지 건강한 리더십과는 거리가 멉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섬김의 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자기 목숨을 내려놓은 희생과 사랑이었습니다.

원래 인간 정치는 힘을 모으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힘을 나누는 행동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생활의 기본 역시 원래는 힘을 모아 역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소유를 나누고, 힘을 나누는 일에서 시작되었음을 살펴봅니다.

 

나가며..

저는 간혹 잘못된 조직화를 목격합니다. 한 사람에게 모든 힘을 실어주어 질서를 이루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 수 있는 것은.. 힘을 실어주는 대상은 바뀌지만, 힘을 실어주는 분들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끼리 권력화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신도회의 실상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타 교단의 실상은 조금 알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모든 신도회의 기본은 섬김이지 권력화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구나 요즘같이 합리적인 젊은 세대에게 어른들의 잘못된 모습들이 이내 교회에 대한 흥미를 심각하게 떨어트리는 부작용을 선물합니다. 정말 먼저 된 자가 정신을 바짝차리지 않으면 안되는 때입니다.

 

일당 백의 우리 구암교회 남신도회가 다시 부활하여 승승장구하는 그날을 바라며, 모든 성도님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이 변화되는 은혜가 넘치시길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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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가 아닌 초월(요한1서5장1~4)

들어가는 말

토마스는 세상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우며, 그 일을 통해 사람은 참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말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로 달려간 삶이었고, 세상을 벗어 던진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수도사들이 그렇게 세상을 등졌습니다. 아니 세상을 등진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실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헌신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이들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회는 지난 500년 동안 이들에 대해 오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수도사와 신부만이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이고, 세상의 일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로마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이들은 다만 구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생이 다르듯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분명 거룩하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주님이 인정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어느 곳에 있던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도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면 그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맞추려고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거룩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개신교회는 성과 속, 즉 거룩함과 세속 됨의 차이를 구별 없이 받아들인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회들이 본래의 맛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50년전 흑인해방운동가이며, 종교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자신이 성직을 걷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떤 신비한 부르심을 따라 이 길을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고통 받는 나의 동포와 인류를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뜨거운 마음으로 나선 것입니다.

이후로도 많은 성직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한 사람들. 예수님이 구원하고자 했던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직으로 각 자의 삶의 자리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들이 신자들이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다가 세상과 닮아버리게 된 것입니다. 적지 않은 교회들이 주님의 일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은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더욱 사랑했습니다. 지도자가 병들자 교인들도 점차 세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교회인지 정당집단인지.. 교회인지 장사터인지 알지 못할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줄이면.. 결국 ‘거리조절’에 실패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닮아 버리면 곧바로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자의 입과 눈에서는 세상의 학문과 비난이 쏟아져 나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대해 심판하시고 비판하셨지만, 이들과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처음 사랑이 있고 없음일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 특히 복음적인 교회라 불리는 곳에서도 기본적인 교리를 제외하고는 매우 놀랍게도 세속적 프로그램과 유행을 따라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진리만 헤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좋다는 융통성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생각들이 오히려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진리와 세상을 두 동강이 내버리는 결과를 만들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진리를 움켜쥔 체 성공과 물질주의로 화려하게 무장한 교회들은 세상으로 하여금 상식과 신학을 벗어던진 대적자 골리앗처럼 비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성직자 스스로 이 모든 불행을 만든 셈입니다. 스스로 천박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신자들 역시 스스로 이와 같은 불행이 행복이라고, 성공이라고 속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생명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임하면, 반드시 세상에 대해서는 한 번 죽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충분히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야 다시 세상을 사랑할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이 세상에서는 지켜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이젠 그가 부활하신 것과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자마다 세상을 이겨낼 만한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대해 한 번 죽으셨고, 다시 사셔서 이젠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한 번 죽은 자라야 그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세상에 대한 미련이 완전히 한 번은 죽어야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말뜻을 여러분 스스로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멀리 나갔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되돌아왔을 때 그 충격과 그 기쁨을 상상해보십시오. 반면에 꾸준히 연락하던 아들이 되돌아왔을 때는 어떨까요. 그 기쁨과 놀람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번은 완전히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미워해야 합니다. 그 동안 세상과 연락하며, 아무런 죄책감과 자각 없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 또 나를 속여 온 세상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라야. 하늘 나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보물이 이곳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는 죽어서나 혹시 갈 수 있는 곳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면서 한 번 죽은 자는 그 순간부터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의 목적점이 달라 집니다.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세상과 다른 차이를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천천히 세상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사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타협할 때도 있습니다. 죄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이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한 번 죽은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므로, 마지막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을 위해 기도하고 고민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시간 두 갈래의 흐름으로 흘러 내려왔습니다. 하나는 사회운동과 민주화, 빈민구제 등의 사업에 최선을 다해온 교회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최초 선배들이 뜨거운 기도와 말씀에 대한 묵상으로 이 세상을 건너고 이겨냈던 것과 달리 이제 이들 교회에서 이런 기본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과 등을 지고 오직 복음이란 이름 아래 모인 교회들입니다. 이들 역시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최초 선배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상을 이겨냈던 것과 달리 그동안의 엄청난 부흥 덕분에 ‘성공과 출세와 부패’가 이들의 다른 이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들은 거룩함에서 도망쳤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인생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를 때도 자신이 계신 곳은 거룩한 곳이라고 구별하셨습니다. 이때의 구별은 차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지켜 줄 안전선인 것입니다. 도로 위의 차들이 안전거리를 유지하지 않고 운행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수도 없이 많은 사고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이 나라에 수많은 사건 사고가 넘쳐납니다. 인간성이 무너지고, 세상도 더 이상 교회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별함이 없어서입니다. 초월함이 없어서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란 뜻입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 뿐 아니라 그의 말씀을 지키고,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판사가 모든 증거가 충분한대도 외압에 못이겨 ‘무죄’라고 선언했다면, 그가 비록 교회에 다닌다 하더라도 그는 성도가 아닙니다. 세상에 대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은 이 세상의 유한함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양심이 늘 하나님께 닿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판사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거짓 증언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는 성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판사의 판결을 보고, 같은 판사로써 그 불의함을 고발하여 시정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분명히 한 번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세례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출애굽 하던 백성들이 건넜던 홍해가 바로 그 의미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는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 가운데 살면서 도피가 아닌 초월의 삶을 살아내는 비결인 것입니다.

 

초월은 지금 여기에서 나의 한계를 너머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 깊은 관심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를 끊임 없이 초대하십니다. 자신의 자녀들을 잃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쏟는 노력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왔는지 모릅니다. 성직자이던 아니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저는 이제는 누구라도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을 초월해 하나님 앞에 용기를 보이는 자에게만 하나님께서 구원을 허락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제 자신부터가 세상적입니다. 평생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서 들어선 길이면서, 스스로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고, 조직을 운영하는 것을 배우고, 인간관계의 비정함을 배우고, 남을 속이고, 속이며, 그런 것이 세상이라고 습득하는 것이 원치 않아도 되는 제 자신을 볼 때가 그렇습니다.

그야말로 천박하지 말아야 할 삶을 결단하고도, 쉽지가 않은 것이죠.

그러나 다시 한 번 십자가 안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도피가 아닌 초월해내는 삶을 연습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기쁨이 유지됩니다. 능력이 유지됩니다. 생명이 유지됩니다.

한 번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거듭남을 통해, 즉 세상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삶을 통해서만 그 신령함이 유지된다고 진리는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도피가 아닌 초월로 자신의 생명을 증명할 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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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이라도 겸비하면(왕상21:17~29)20180910수요기도회

외환 위기 이후로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질서에 한국이 편입되었습니다.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예전에 대학생은 낭만과 시국과 문화라는 것을 향유하고도, 좋은 회사에 취업했었지만, 지난 1998년 이후로 20대는 영어만 잘할 뿐, 자신이 빼앗긴 자유와 문화에 대해 단 한 번도 항거하지 못한 체 밀려밀려 30대와 40대가 되어가고 있음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티브이를 보면 20대 배우들이 모두 40~50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드라마에서 윗 세대를 재연할 뿐, 자신들의 20대 문화와 자유를 연기하는 친구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이유도 모른 체 영혼의 목이 잘린것처럼 이 세상에 대해 자신이 잃은 것들에 대해 질문하는 친구도 적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엘리야처럼 자신들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 분명히 알고, 외치는 소리가 간절한 때입니다.

 그리고 오늘 열왕기상 21장 내용은 잘못된 권력에 의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나봇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나봇의 잃어버린 것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잃어버린 자유와 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대지 요략>

 

가. 나봇의 포도원(21장 이하 내용)

1. 아합이 사마리아 궁 옆에 나봇의 포도원을 마음에 들어 하더라.

-. 아합은 자기 궁 근처의 포도밭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확장되고, 더욱 멋져진 왕궁의 격에 맞는 끊임없는 인간의 지배욕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평소 아합의 관심이 어디 있었는지 알 수 있다.

 

2. 나봇이 하나님께 받은 땅을 팔지 않다.

-.유대인들은 조상때로부터 내려온 땅은 하나님의 기업으로 팔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자손대대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 정신 속에는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이 숨어 있다.

 

3. 이세벨이 간계를 부리다.

-.남편을 위해 간계를 구사해, 나봇이 사는 지역의 귀족과 장로들에게 편지를 보내, 연출된 금식행사를 열게 한다. 이때 두 불량배가 거짓 증언자로 나선다.

-.이에 귀족과 장로들은 나봇을 데려다 죽이게 내버려 둔다. 압박에도 불구하고, 지도층이 깨어 있었다면 나봇은 살 수 있었겠지만, 패색이 짙은 조직일수록 이와 같은 일은 기대할 수 없다.

 

나. 엘리야의 고발

1.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다.

-. 여호와의 말씀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온 몸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공명과 다름이 없다. 더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구체적인 아합의 심판을 선포하셨다.

 

2. 아합과 엘리야의 대화

-. 대결의 절정으로 엘리야를 바라본 아합의 태도가 나타난다.(20절)이에 엘리야는 “나를 찾았느냐”며, 정식으로 자신과 아합이 반대에 서 있음을 드러낸다. 당시 이와 같은 문화가 가능한 것은 엘리야를 비롯한 여호와의 편에 선 무리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언자는 언제든지 왕을 찾아가 독대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신변을 우려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쨌든 엘리야는 두 가지 예를 통해 그 처참함을 상기시켰다. 바로 바아사와 여로보암의 예이다. 이 둘은 반란을 통해 왕이 되었지만, 결국 반란을 통해 죽임을 당한 왕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판의 이유는 역시 ‘불의한 행위’ 때문이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기질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이 보지 않아도 불의함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고침을 받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 엘리야는 이세벨의 심판도 빼놓지 않았다. 이세벨은 아합에게 권모술수의 창고이자, 권력의 근원이었다. 잘못된 권력은 죄가 되어 공동체에 들어오고, 반드시 공동체에 상처를 준다. 기독교 신앙은 조직이나 체계가 아닌 하나님 앞에 선 ‘개인’의 책임이 훨씬 중요하게 존중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귀족과 장로, 아합과 이세벨과 같이 현실과 조직의 뒤에 숨어 자신의 유익을 취하는 무책임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기 위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이는 카톨릭과 달리 기독교가 개인의 성숙을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말하기도 하며, 성서의 내용이기도 하다.

 

3. 아합의 겸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엘리야의 저주가 엄준했기에 아합은 더욱 놀랐다. 이미 닥친 불행도 아합의 겸비로 하나님은 아합의 때가 아닌 자녀의 때로 연기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심판주이시지만, 심판이 목적이 아니시다. 한 영혼이라도 돌아서서 선한 의의 도구로 이 땅을 바르게 펴내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역대 왕 중 가장 간악한 왕이었지만, 아합은 자신이 행한 놀라운 악행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심판받게 될 것인지 듣게 됨으로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는 풀이 죽어 다녔다. 그동안의 기고만장함은 근신의 자세로 변화되게 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종교의 생활 질서 안에서 예언자의 직책이 차지하는 자리를 인정하고, 이로써 그에 대한 처벌은 부분적으로 이뤄지게 되었음을 성경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만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내 손으로 해낼 수 있는 부분보다 하나님의 뜻을 인정할 때 누리게 되는 복락이 더욱 큼도 깨닫게 된다. 어쩌면 신앙생활이란 나와 하나님의 차이를 분명히 아는 것이며, 동시에 각 자에게 맡겨주신 직분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임도 알게 된다.

기독교회는 교회에서 세 가지의 말씀만을 인정하고 있다. 하나는 성경이다. 두 번째는 보이는 말씀인 성만찬이다. 세 번째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예수 중심의 말씀이다.

목회자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타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도는 선포되어진 예수님을 전파하고, 살아내는데 협력하여 노력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겸비이며, 우리가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용서받고 구원받으며,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인 것이다.

 예수님을 입고, 먹고 마시는 성도는 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오늘도 이 예수님을 통해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이 주신 여러분의 참사람됨을 찾아내시고, 그 신앙의 깊이를 더해가시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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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살리는 사람(왕상17:1~16)

들어가는 말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무너뜨린 것을 다시 세운 히엘의 두 아들이 죽음을 당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죽음과 대비해서 하나님의 종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 살아나는 두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살리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나눠보고자 합니다.

 

1. 이스라엘 현실

지금으로부터 약2900년전에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 북이스라엘은 특히 우상숭배가 범람하였고, 북이스라엘의 왕 중에 가장 완악한 왕을 뽑는다면 열왕기서에서는 단연 아합왕을 뽑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 이후에 나오겠지만, 예언자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는 훗날 군대장관 예후와 더불어 군부 쿠테타를 일으켜, 예후를 왕으로 세우고, 예언자집단에 우호적인 정권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예후는 말하기를 실제로는 ‘아합’이 다른 왕들보다 바알신을 섬기는 것을 열심히 한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일반 국민이나 정치인의 눈에 아합은 이스라엘이 그래왔듯이 어쩌면 평범하게 악한 왕일수도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지독히 악한 군주였다고 열왕기서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아합왕을 가장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아합은 지금의 레바논 지역인 당시 유력한 제국 페니키아의 군주였던, 엣바알의 딸과 결혼함으로서 역사가 말하는 대로 상당한 공처가로 주변국의 영향 아래에 이스라엘을 놓이게 한 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실은 아합은 믿음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자였습니다. 다만 제왕 초기부터 머리가 영민하고 계산이 빠른 자임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왕이 되자 당시 이스라엘 왕국의 북쪽에 위치한 시돈 땅의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과 결혼함으로서 국가의 이익과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했습니다. 물론 그가 나중에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것을 생각한다면, 이 모든 일이 철저히 자기 욕심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교활하고, 욕심이 많은 자가 아합인 것이죠.

역사가들도 그가 솔로몬 왕이 이스라엘의 부국을 위해 선택했던 해상중개무역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세벨과 결혼을 했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이미 이스라엘에 들어온 주변국과의 외교의 생리는 외부적으로 결혼정책으로 이해관계를 결속하고, 내부적으로 군사력을 키워 우발적인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 풍토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엘리야를 세우신 하나님

오늘 본문은 그런데 몇 가지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가뭄을 통해 모든 사람을 괴롭게 했는가? 그리고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르밧의 이방 과부에게 은혜를 베풀었는가 입니다. 왜 그녀를 살리셨는가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받은 후 첫 번째 했던 일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왕인 아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엘리야에게 선지자로서 첫번째 임무로 아합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라고 하셨을까? 선지자는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스스로 곤고한 자리에 내모는 것.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자리를 회복하는 것이 비로소 하나님 안에서 예언자적 사명을 갖춘 교회를 회복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충만한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 당시 악하기로 유명한 아합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자는 미가야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850명의 공식선지자가 있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선지자들이 있었겠지만 아합의 악행을 고발하지 못했습니다. 아합에게 악행을 지적하는 것은 곧 바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아무도 하지 않고 하기를 끔찍히 두려워하는 일을 하나님에게 명령받아서 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에게 공증 받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선지자는 그가 왕이든 평민이든 사악한 자든 착한 자든 하나님의 말씀을 단호히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상을 가려서는 안되는 것이죠. 이제 엘리야는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아합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으니 아합과 같은 권력자의 도움을 받기는 그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제 너는 권력자에게 붙어서 무엇 얻어먹을까 하는 생각은 아예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먹고 사는 문제도 하나님께만 맡기라는 뜻으로 즉시 요단 그릿시냇가에 가서 까마귀들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기근을 선포하고 난 후 까마귀가 주는 떡과 고기 그리고 시냇물이 마르기 전까지 마십니다.

 

3. 작은 자들의 용기

엘리야가 두 번째로 하나님에게 명령을 받은 것은 악한 아합에게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르밧 과부에게 찾아가서 그 가난한 과부의 떡을 빼앗아 먹는 것입니다.

차라리 사악한 왕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은 당당하고 떳떳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가뭄 중이었고 사람들은 양식이 떨어져서 난리가 났는데 그것도 부자집에 가서 떡을 달라고 하면 그나마 나을텐데 가난한 과부의 집에 가서 떡을 달라고 해서 먹으라니 하나님도 참 너무하시다고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 같은 것이죠.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이 시키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합니다. 하나님이 과부의 집에 가서 그것도 한 기근 중에 떡을 달라 해서 먹으라니 엘리야는 그대로 합니다.

 

엘리야는 시돈땅 사르밧에 가서 한 과부집에 들어갔는데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물을 달라하고 과부가 물을 가지러가는 것을 불러 세워놓고 떡 한 조각을 함께 가져오라 했습니다. 과부는 이런 가뭄에 물을 달라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양식이 다 떨어져서 죽을 판국인데 떡까지 가져오라는 엘리야를 보고 어이가 없는지 이렇게 대답합니다.

"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말은 엘리야가 이미 자신은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밝혔다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은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진짜로 말하는데 라는 뜻입니다.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있는데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마지막으로 떡을 만들어 아들과 먹고 죽을 판국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속에는 당신이 하나님 여호와의 선지자라 하는데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서 힘없고 가난한 우리 같은 과부를 굶어죽게 하려하느냐 그런데 그 마지막 떡을 달라고 하는군요.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선지자가 맞소? 하는 원망 섞인 소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원망섞인 과부에게 조용히 다정스럽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말대로 하시오 먼저 나를 위해 작을 떡을 만들어 가져오고 그 다음에 당신과 당신의 아들을 위해 만드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기까지 당신 집의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했고 하나님의 과부의 집에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이 엘리야가 선지자로서 행한 첫 번째 기적입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선망하며 위대하다고 외치는 엘리야가 지질이도 못나고 가난하고 그것도 이방의 시돈의 한 과부 앞에서 행한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요?

 

시돈 땅은 엣바알의 본고장이었다. 엣바알은 시돈의 왕이며 아합의 처 이세벨의 아버지이다. 또한 항구도시이며 아스다롯의 숭배지이기도 하다. 아스다롯은 사랑과 전쟁의 여신이며 검은 옷을 입고 입은 피를 흘리며 오른손에는 독사를 쥐었고 뱀 위에 올라탄 모습을 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타락한 모습과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아스다롯을 숭배하는 시돈의 왕이며 바알의 제사장의 딸이 아합 왕의 처가 되어 이스라엘에 아스다롯을 들여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세벨은 희대의 악녀가 된 것입니다. 희대의 악녀가 있는 그 땅에 바로 그 시돈 땅에 그것도 가뭄과 기근의 한 가운데서 그것도 아무 힘도 없는 가난하디 가난한 한 과부의 집에 왜 엘리야를 하나님이 보내셨을까요? 이스라엘의 믿음이 좋은 과부집이라면 그래도 나을 텐데 말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이며 우상숭배의 열악한 종교환경 속에서 궁핍하고 가난한 한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타락할 대로 타락했고 의인 하나가 없을 정도로 부패했습니다. 그러나 아스다롯의 악녀가 판을 치고 사악한 우상숭배가 팽배한 시돈 땅에 아주 보잘것없는 한 여인의 믿음과 순종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악한 가를 비교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 덕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지만 이 사르밧 과부는 한번 본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말을 들었고 믿었고 순종했고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고백하고 증거하기까지(왕상17:24) 합니다.

 

이 사르밧 과부의 믿음은 예수님 당시 두로 땅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과도 통합니다. 그 여인은 이방여인으로 천대받았지만 굽히지 않는 믿음과 간구로 예수님에게 딸을 고침 받았습니다. 이 믿음은 지금까지도 이방여인의 탁월한 믿음으로 칭찬을 받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믿음과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은 그 당시 스스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백성이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랑하던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조개 속에서 진주를 찾듯이 모래 속에서 금을 찾듯이 쓰레기더미에서 핀 장미꽃을 찾듯이 지금도 이름도 없고 내세울만한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믿음을 찾으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높여주시고 잘되게 하시니까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과부들은 하나님에게 특별히 받은 것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부족한 중에서 어려운 중에서 그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하나님 됨으로 높여 드리고 순종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너는 내가 너에게 특별한 것을 주지 않았는데도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높여주지 않았는데도 나를 믿고 순종하고 나를 높여주는구나! " 그래서 하나님은 이 비천한 이방과부 앞에서 엘리야의 첫 번째 기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 좋아하며 성공지상주의로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이 찾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살리시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사람인 것입니다.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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