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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보라의 순복신앙(4:24~26.87/11:8~10.365)

 

 

십보라의 순복신앙(4:24~26.87/11:8~10.365)

들어가는 말

 감자, 배따라기 등을 썼던 김동인이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훗날 친일 행각이 드러나 그의 책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주었던 인물이기도 했지만, 구한말 당시 이광수 선생 등으로 대표되는 계몽주의 소설 일색이었던 조선 땅에 낭만적이고 조선 특유의 정서를 잘 드러낸 글들을 써내어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작가로 평가 받게 되셨죠.

 그 중에서 중등과정에 있는 학생이라면 한 번 정도는 읽어봤을 발가락이 닮았네라는 소설이 있는데.. 어릴 때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저 죄를 짓고 살지말자..정도로 이해했던 것이 이제는 조금 다르게 읽혀져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영어 이니셜인 M으로 등장합니다. 불특정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 쓴 것으로 보입니다. M은 좋은 직장을 다니는 샐러리맨인데, 청년 시절부터 돈이 생기면 곧잘 홍등가와 주점을 자주 다니던 과거를 가진 남자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때 얻은 성병 때문에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는데, 결혼 하고 다음 해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바로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 남자는 아내를 추궁해내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의 과거도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고, 아내에게 이와 같은 일을 추궁하는 것이 역시 지금의 가정이 깨질 것이 분명하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것이죠. 그리고 날이 차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주변 친구들에게는 외증조부를 닮았다고 애둘렀지만, 그의 마음은 가벼울 수가 없었죠. 그러다 문득 그 아이의 발가락을 보게 됩니다. 유난히 가운데 발가락이 긴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발가락과 닮아 있음을 매우 기뻐하게 됩니다. 누가봐도 하나도 닮은 구석은 없지만..  소설은 남자가 자신을 닮은 아이를 끌어 안고 즐거워하는 모습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1.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일들

 사실 사람들의 마음의 원리도 이와 비슷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들이 특히 그렇죠. 3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불륜이 될 수도 있고, 도둑놈이 될 수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들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먼저 말씀 드린 M이란 남자는 어떻습니까? 분명히 자신의 아이가 아닌데도 그는 이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M이 불임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의사 친구도 M의 고민과 결정을 존중해주게 됩니다.

 그야말로 살다 보면 오해를 사서면서까지 그 자리에 서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보다 지금 내게 닥친 숙제를 감당해야 할 각 자의 애증과 한계, 삶의 무게가 인생을 이렇게 내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 우리는 이런 문제를 감당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신앙인이라는데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은혜이고, 그야말로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된 것이죠. 그리고 동시에 그 은혜에 걸맞도록 계명을 지키며 살도록 초대되었습니다.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제 자신을 돌아보건대 계명은 은혜에 감동하고, 감사해서 지켜지는 성질의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내가 최선을 다해 지키도록 노력해야 비슷하게 흉내낼 수 있거나 좀 더 정확히는 하나님에 의해 강요 받는 것 같은 일이 생길 때 하나씩 하나씩 그 중요함을 깨달으며 지켜지게 되는 것인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신앙 여정의 바퀴를 몇 번 돌아야 은혜로만 지켜질 수 있는 것이 계명이란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2.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그가 결단을 내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기 부모와 친척집을 떠나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훗날 신약의 히브리서를 썼던 사람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의한 순종이라고 정리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11:8 내용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여기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는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순서대로, 또는 매우 유용한 매뉴얼대로, 또 어떤 정답이 있는 것처럼 떠난 것이 아니라..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 채 마치 어떤 압박이나 상황에 의해 떠나게 되었다고 풀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결단을 내리도록 하였겠는가? 그야말로 그 동안의 아브라함과는 전혀 다른 삶을 결단하도록 만든 것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가질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믿음의 사람에게는 이 믿음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던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4:24~26절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성서는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모세를 죽이려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아니 선택하신 자를 죽이려 하시다니! 방금 계약을 맺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먼저 죽이려 하시다니! 그런데 모세를 따라왔던 아내 십보라의 행동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녀는 돌칼을 가져다가 아들의 표피를 베어 그 남편에게 내 던집니다. 결국 모세뿐 아니라 모든 가족이 할례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할례가 중요한 것일까요?

 모세는 하나님과의 계약 증표로 할례를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영원한 증표로서 내가 하나님께 속한, 계약을 맺은 사람임을 의미하는 거룩한 징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아내 십보라에게 이와 같은 행동은 매우 이질적이고, 불필요한 행동처럼 보여졌을 것입니다. 더구나 아들의 표피를 제거한다는 것은 잘못하면 아들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이죠.

십보라에게 할례는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는 사는 것. 이 완고한 믿음의 행위를 그녀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했던 것이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때 비로소 십보라는 남편과 더불어 하나님께 순복하는 신앙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잔인한 분이구나. 그래서 잔인하게도 이런 요구를 하셨구나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은 우리가 잔인하지 않습니까? 잔인한 것은 오히려 우리가 만들어낸 삶이요. 바로 나요! 내가 여전히 끊어내지 못한 나의 성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강요는 오히려 이런 죄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부드럽게)

 순복한다라는 것은 지금은 내가 긍정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지금 내게 닥친 상황과 필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긍정하는 일의 결과를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복하는 신앙을 얻기 까지 믿음의 여정, 그 여정의 쳇바퀴를 끊임없이 돌리신다는 사실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늘 안되던 일에서 넘어지거나 늘 같은 마음씀씀이 때문에 다른 사람과 갈등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자신을 부정해야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악한 심보와 갈등과 상처 때문에 이웃과 하나님과 반목하고 있다면 이 시간 십보라와 같이 그 표피를 잘라 하나님께 내려 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비로소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은혜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이 악한 죄의 악순환이 멈춰지기 때문입니다.

 

2.    순복하는 신앙과 구암의 미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앞서 소설을 말씀 드리면서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주인공의 숙명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실은 대부분의 인생이 그야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처럼 살다가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애증과 상처, 한계에 갇혀 지낼 수 밖에 없음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신앙인은 십보라의 결단과 같이 삶의 필요와 잔인함들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요구에 순복하는 신앙으로 살아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이 순복의 신앙은 큰 바람 앞에 잠시 몸에 낮추는 삶의 처세와 다릅니다. 십보라는 아들의 목숨을 걸고 불신앙을 짚어 던지도록 하신 강권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구원과 자유를 위해 우리 안에 해결되지 못한 문제 앞에 끊임없이 여러분을 세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 공동체가 변하지 않으면 결코 더 나은 믿음과 미래를 얻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똑같은 방법으로 여러분에게 또 다른 기회를 얻도록 초대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은 남편인 모세를 흔들어 아내인 십보라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계명을 지켜내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 때까지 십보라에게 요구하신 것이며 동시에 나의 나 된 것을 부정하지 않는 한 성도에게 해당될 믿음의 시험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만일 십보라와 같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신앙을 갖추기로 결단한다면 우리 교회의 사정은 지금까지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 누구라도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에 마음을 닫아버린다면 잔인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의 의무는 하나입니다. 주께 순종입니다.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명을 지키고, 삶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오늘 이와 같은 믿음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소원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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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지혜로운 사람(36:1~7) 

들어가는 말 

 한 목사님이 고향 땅을 등지고 다른 곳으로 임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님이 섬기는 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어머니를 마음껏 맡길 수 있는 후임목사를 선택하는 일 때문에 그랬습니다. 

 장로님도 없는 작은 교회이긴 하지만 매일 기도하며, 성도들을 사랑하며, 어머니의 영혼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양육할 수 있는 목사님을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임지로 가게 된 목사님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시더랍니다. “너는 어떤 마음으로 다음 임지에서 목회를 하겠느냐?” 

 그때 목사님은 깨달았다고 합니다. 자기 어머니를 위한 나의 태도나 성도들과 하나님의 요구 역시 다르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입니다. 

목사님은 말합니다. “제 어머님을 대하듯이 성도들을 먹이고, 보살피겠습니다!”  

우리도 성심을 다하는 마음을 가지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성심 

 오늘 이야기는 모세가 성소를 만들기 위해 기술자에게 일을 맡기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이중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지혜와 총명과 지식이 충만한 사람으로서 본문 2절에서는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혜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화) 한 농촌에 선교팀이 봉사를 나왔다가 특별히 기술도 배우지 않은 한 할머님이 능숙하게 안마며 통증을 다루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고 합니다. 할머니 어디서 이런 기술을 배우셨어요. 그러자. “기술은 무슨.. 매일 밤 허리 아픈 영감을 주무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거지.”  

할머니는 매일 밤 고생스럽게 농사일을 하고 신음하고 누운 남편의 등이며 다리를 정성을 다해 주물렀던 것입니다. 어디를 만져야 시원해하고, 어디에 있는 근육이 상했는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알게 된 것이죠 

  

 마음이 있으면 길은 통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지 못하면 좋은 기술자가 될 수 없듯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마음을 다해 일할 때 지혜의 문도 열리게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 이야기 역시 하나님의 회막을 위해 예물을 모으고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심으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자청하여 성심을 다해 하나님의 회막을 짓는데 최선을 다하게 된 것이죠. 놀라운 변화입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니 모든 것이 형통해지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뭔가가.. 억센 이스라엘로 하여금 큰 변화를 이끌어 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저 얻어지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큰 감격과 은혜를 경험하지 않는 한 이들이 이렇게 쉽게 변화될 수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앞선 내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34장 이전의 내용은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숭배로 큰 죄를 짓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첫째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깨트리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하나님께 상처를 냈던 족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듯.. 이스라엘 자손들은 유래 없는 택함을 받았습니다. 애굽 땅에서 광야로 나왔고,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들을 보호받았으며, 물이 없을 때는 반석에서 물을 마시고,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 되돌려 드린 것은 불순종과 불신앙이었음을 돌아볼 때.. 과연 이처럼 지대한 사랑을 받고도 이처럼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할 수 있을까 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보처럼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들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쉬고) 

 그야말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크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죽어 마땅한 자신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다시 언약을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어 아는 일이라고는 죄 짓는 것 밖에 없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 앞에 감동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34:7에 말씀입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언약 때문에. 하나님이 세운 약속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어떤 죄악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용서가 얼마나 크길래 회막 건설의 헌신이 가능할까 

분명 이때의 헌신은 내게서 나온 자선이 아닙니다. 이때의 예물 역시 남은 것을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여호와 하나님께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을 원하는 자만이 이와 같이 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쉬고) 

 그런데 과연 사람이 그 은혜에만 감격해서 이와 같은 일을 행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할까요? 아마도 감격뿐 아니라 뭔가 마음으로 힘써 지킬만한 근거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아까 읽은 출34:7 하반부 말씀입니다.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2.마음을 지키는 사람 

 신앙생활 가운데 깨달아 져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내 욕심과 혈기 대로 살아온 것이 바라봐져야 합니다. 살아보겠다고 가족들에게 함부로 대했던 자신이 보여야 합니다. 자녀가 불행해지고, 이 땅에 불의가 가득한 것이 모두 나의 죄때문에 그런 것임을 보여지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어렵게 느끼기 시작합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잘 지켜야 하는구나! 내게 주신 마음을 애써 지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구나 

마찬가지로 내게 주신 가족과 교회를 힘써 지키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구나. 내게 주신 건강과 믿음을 잘 가꿔가는 것이 너무나 귀한 일이구나 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많은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의 자리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전히 마음으로 승복하지 못한 내 생각. 내 혈기가 가득합니다. 돌아보면 내 탓인 경우도 많지만 다른 사람을 힐난하며, 돌아보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벌을 면제하지는 않고 자신들의 악행을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이제부터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야 이 보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란 질문을 남겼을 것입니다.” 

 삶의 형통함이 말라 하나님을 애써 부를 때 우리가 하나님, 어떻게 해야 이 쓴 잔을 제게서 치워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처럼 철들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 이제는 그 은혜를 잘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빼앗을 때보다 지킬만한 것을 지킬 때 더 큰 힘이 나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지킬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또 그 동안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해 잃어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그 잃어버린 것을 찾고 싶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다해 자신에 대한 회개와 성찰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원망만 있지 회개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늘 받은 은혜와 마음을 지키는데 실패했었습니다. 조금만 힘이 들어도 그랬고, 때만 있으면 하나님을 배신했으며, 지금 자기 손에 쥔 하나님의 은혜를 헌신짝처럼 여기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내 손에 쥔 것그 은혜가, 그 사랑이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임을 깨닫는데 너무 많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돌아보니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 당연스럽게 생각하고, 제대로 부모님께 감사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내의 사랑에 대해서도 늘 그런 것처럼 생각하며 아내의 사랑을 얻기 위해 더욱 힘써 마음을 키우는 일에 게을렀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도 처음 태어난 날 그 감격에도 불구하고, 때론 화를 참지 못해 매를 댄 적도 있습니다 

 사실은 내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지키지 못하고 죄 가운데로 살아왔던 것인데 언제나 환경들을 원망하는데 바빠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할 때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 얼마나 돌아보십니까? 또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성심을 다해 다가서십니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기도를 해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또는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강요하기 위해 떼를 쓴 적은 없으십니까?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란 주신 은혜를 가슴 깊이 새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란 성심을 다해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정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야말로 마음이 지혜로우면 비로소 자발적인 헌신과 감사와 은혜가 우리 삶을 주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술자인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이 은혜를 기억하며, 똑같이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은 사람과 이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사람을 청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을 세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은혜를 마음에 깊이 새길 줄 아는 사람, 새긴 것을 굳게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 것입니다. 추워지는 계절에 여러분의 가슴을 마음이 지혜로운 따뜻한 심령으로 채워가시는 모두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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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만나는 기도(히4:12~16)

들어가는 말

자신을 만나기 위한 노력들이 적지 않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노부부에게서도, 취업을 앞둔 청년들에게서도, 갓 입사한 회사원이든 대부분 자신의 삶에 부딪친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자신을 아는 힘’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은 꽤 괜찮은 노력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부부간의 성격차이라든지 다툼들을 해결하는 대안들은 부끄럽게도 드라마에서 하는 사랑과 전쟁이란 프로그램이 전부였다 싶을 정도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치료하는 데에 매우 무관심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사회가 복잡해지고, 자신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자신의 내면과 인격을 살피는’ 돌봄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잘 살기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인생의 문제를 깨닫기

우리는 생각보다 칭찬에 인색합니다. 제 자신도 그런 편입니다만.. 아이가 뭔가를 하고 싶어할 때 그대로 두기보다,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아이가 타고난 좋은 성품이나 능력도 부모들에 의해서 많이 잘려나가는 경우도 적지가 않습니다. 예전에 제 모습을 봐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권위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거나 삶 전체에 대해 매우 비관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정적인 생각이 끊이지 않은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실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제게는 한 가지 과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내 문제가 뭘까? 왜 난 늘 화가 나 있는 걸까?”

 

어제는 청년들과 함께 애니어그램이라는 심리프로그램을 했습니다. 총 9가지 유형의 성격으로 나눠 사람의 성품을 알아보는 이 프로그램은 2000년 동안 교회의 지도자를 훈련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은밀히 사용되다가 현대에 이르러 전문화되어 교회와 회사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본래 나의 성품과 장점을 알아가도록 돕고, 동시에 꺽인 내 장점들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익함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원만하게 정상 범위 내에서 골고루 성향이 분포되는게 좋습니다만, 어떤 경우는 거의 대부분 능력이 확 꺽여있거나, 한 능력만 월등하게 높고, 나머진 다 평균 아래로 꺽인 경우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든 원인은 어린 시절 ‘부모님들에 의해 억지로 제재를 당한 흔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여자아이들일 경우 어머님의 영향으로 억제를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반대로 정상적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지 못한 경우도 또 현재 좋지 않은 인간관계 때문에 능력이 꺽여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날개가 꺽인 경우이죠.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긍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꺽인 채로 살아갑니다. 심지어 그대로 사는 것에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한 체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단 번에 표시가 나기 시작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방법이 삶을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자신과 삶에 대해 건강하게 마주하지 않은 사람들이 택하는 방법이 그렇습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결과만을 얻어내면 그만이라는 지독한 이기심이 그 삶을 병들게 하기 때문이죠.

같이 가는 법도 모르고 다른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국 똑같은 실패만을 반복할 뿐.. 점차 삶이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얼룩지고, 진짜 삶은 약해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욱 슬픈 것은.. 자신의 삶이 거짓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인격이 무너지는 것에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변의 큰 저항에 부딪치지 않는 한 이런 사람을 막을 사람은 없게 되는 것이죠.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지만, 어쩌면 암보다 더 우리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의 포기에 있음을 늘 살펴야만 할 것입니다.

 

2. 죄의 자복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믿음

오늘 본문 12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모든 것을 관찰하도록 하고, 그 체질을 풀어내는데 힘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 사람은 말씀을 들으므로, 그 체질에 큰 변화를 얻습니다.

「어느 예배당에 남편과 심하게 다투고 예배를 보러 온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필 그날 설교 주제는 “용서하라”였다고 합니다. 설교시간 내내 그 여집사님은 마음이 불편했다고 합니다. 마음에 이상하리만치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그래도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이 오고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축도도 받기 전에 예배당을 박차고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은 도무지 마음이 무거워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같은 설교를 듣고 그 집사님은 찔림을 얻어 반응했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설교 말씀을 가장 잘 들은 사람일까요? (쉬고)

바로 마음에 찔림을 얻은 사람입니다. 내 기질과 성품을 심하게 뒤틀림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성정과 부딪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깊은 숨으로 화를 가라앉히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도전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속사람이 찔리거나 그렇게 살기로 한 번 더 다짐해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산 같은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이 복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아멘으로 응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형통케 되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화나 있는 자신과 화해하게 되고, 화나 있는 하나님과도 화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금은보화의 구슬이 서말이라도 그것을 믿음으로 내가 꿰지 않으면, 그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과 삶을 주장하도록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마음을 여는 훈련을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13절은 말합니다.“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기도할 수 있을 때, 순종할 수 있을 때. 내가 아버지의 말씀 앞에 벗는 것이 나중의 심판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보다 나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지금 내가 행복할 수 없다면, 어떤 구원의 복음도 내게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부끄러워 감히 말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 앞에 쌓아 올린 가면과 옹벽부터 허물어야 빛 되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도 흘러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유명인들의 독방 수감 생활을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대형 TV에 칸막이가 달린 화장실과 샤워시설. 다른 일반 수감자에 비하면 분명 호화시설에 불과하지만, 죄를 짓고 감옥에 가서도 그런 것들을 누리려는 그 위인들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야말로 감옥에 가서도 반성할 기회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에서 나올 수 있는 ‘광야’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아무런 삶의 도전이 되지 않고 있다면, 그가 쌓아 올리는 삶 역시 그 호화스런 감옥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가 만든 안전, 편리함이 하나님의 개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강단에 설 때마다 하나님 앞에 주의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합니다. 아무리 진리를 향한 노력을 준비했다 하더라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두 담아낼 수 없다는 한계와 자책감 때문입니다. ”

말씀을 전하는 중에 나의 욕심과 무지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용서를 비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는 담대함이 아니라, 용서의 사랑을 공급하셨습니다. 죄의 용서는 죄를 짓기 위한 담대함이 아니라, 사랑을 얻기 위한 그래서 내가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한 힘이 되주기 때문입니다.

(/쉬고)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힘입어 날마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야만 하는 줄로 믿습니다. 먼저 큰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 때문에 감히 하나님 앞에 자유한 마음을 지키지 못합니다.

아마도 한 번도 용서나 지지를 받아보지 못한 아이처럼.. 창조주 되시는 아버지 앞에서도 우물쭈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마다 새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 있는 나를 죄 없는 자녀와 같이 여기시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들어오기 전의 나는 그 안에 성령이 없으므로, 말씀이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집착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임에도 한 번도 내가 틀리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니, 다른 사람을 용납할 마음도 적기 마련입니다. 집착은 또 다른 내 신앙이 되어서, 영원한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전환)그러나 신앙은 긍휼을 사모하는 마음인 줄로 믿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일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날 꺼리를 만들어 감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통나무와 같이 뻣뻣한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 부드러워집니다. 말씀과 영이신 하나님을 통해 날마다 변해가는 자신을 세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신을 벌거벗겨 내려 놓은

것만큼 자신이 만들어져 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자신을 만나는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 지금 내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 사람인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사람인지 깨달을 때 비로소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권면의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래만을 사는 사람은 오늘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감사하는 사람을 내일로 감사를 미룬 사람이 결단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다듬어지고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감사가 삶을 변화시키고,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늘도 은혜의 보좌로 나가는 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세상의 죄와 절망과 저주를 이겨낼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잡아 누리는 것이지. 비굴하게 주문을 외듯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시되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받아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 긍휼하심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긍휼을 입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오늘 감사하지 할 수 없다면 어쩌면 오늘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자신을 깨달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과 몸과 혼을 쪼개도록 하나님 앞에 앉아보시길 바랍니다.

 

은혜 베풀 자에게만 결국 은혜를 베푸시는 원리를 가슴 깊이 받아들이시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고, 기도하는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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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위에 세우는 교회

위트 한 마디.. 노부부의 대화(최근에 아내가 자신의 말을 잘 듣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인 남편이 아내의 청력을 테스트하고자 큰 소리로 저녁식사가 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현관 앞에서 “여보 저녁 뭐야?” 다음에는 주방 앞에서 “저녁 뭐냐니까?” 그래도 아내가 아무런 대꾸가 없자.. 가슴이 아픈 남편은 걱정스럽게 아내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묻습니다. 여보, 저녁식사가 뭐냐니까? 그러자. 아내는 고개를 갑자기 휙 돌리며 쏘아 붙이듯이 말했습니다. “내가 칼국수라고 몇 번을 말했어.”

여러분은 잘 들으시고, 잘 말씀하고 계시는지요? 우리 옆에 분과 인사하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1. 무엇이 자유인인가?

우리 속담에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란 말이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도 사람이 태생적으로 물려받는 것이 30%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노력과 환경에 따라 인격과 인생이 정해진다는 결과가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내 말에 거한다는 의미가 그렇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내가 누구를 믿고 따르냐에 따라 내 삶이 새롭게 변화하게 될 것이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되는데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새로운 삶을 선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에 유대인들은 의아하게 예수님을 향해 대꾸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자유”에 관한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한 번도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유대인에게 종이 된다는 것은 모욕적인 일입니다. 더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 종이라는 단어는 지금껏 자신들이 외세에 한 번도 굴복하지 않았던 점을 미뤄보아 매우 모역적인 말이 될 것입니다. 이들은 항상 외세에 저항하는 거칠고 다루기 힘든 민족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런 자부심으로 살게 된 근거는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유대인들의 조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밤하늘의 별들과 같이 무수한 자손들을 주실 것이란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룩한 언약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떠돌이었던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자손들도 언약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더럼대학교수인 제임스 던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유대인은 마땅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임을 지키고자 했던 유대인들의 노력은 나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경건하고 의로운 대다가 로마를 비롯한 주변 나라들이 보기엔 다루기 힘든 매우 피곤한 나라가 분명했던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유대인들에게 잘했다고칭찬하기보다“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환기)자 우선, 여기 부모님들이 많으십니다. 이 중에 자녀들과 함께 교회에 출석하시는 분만 손들어 보시겠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 분들 중에서 자녀의 믿음이 나보다 낫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만 손을 다시 손들어 주십시오. ^^ (믿음으로 모두 그리 될 줄로 믿고 두 손 번쩍 들고 아멘해볼까요?)

 

성경에는 처음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으로 백성이 된 조상들이 그 은혜를 갚고자 자청하여 ‘하나님의 의’인 계명과 율법을 짐 지고자 했던 것과 달리 그 다음 세대들은 갈수록 본래 그 믿음에서 벗어나 고집불통이 되거나 외식덩어리에 율법주의자가 되거나 심지어 이런 율법 준수를 통해 로마제국과 부패한 유대왕정을 압박하는 정치세력이 되고자 노력한 사람들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남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나중엔 그 쓴 물로 인해 우울증이나 또 다른 죄를 짓게 되는 경우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줄곧 실패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고,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마땅히 세상에서도 승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실패와 좌절의 굴레에서 나오고자 하여도 도저히 나올 수 없을 만큼 앉은뱅이와 중풍환자처럼 되어 버린 유대인들의 상태를 살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느 유대인의 관심과 달리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중심에 있는 문제점을 바라보도록 다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결국 죄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예전에 읽은 어느 이야기입니다. 괴물을 사냥하는 한 사냥꾼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동료들이 끝내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못해 아니 극복하지 못해서 늘 그 괴물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괴물이 되기로 했습니다. 괴물이 되기는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자신의 동료들을 헤친 나쁜 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괴물을 미워했고, 이기기 위해 싸움을 연습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사냥꾼이 괴물을 사냥했을 땐 이미 자신도 괴물이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냥꾼에 의해 그 사냥꾼 역시 죽임을 맞이하게 되죠.

 

디모데전서3장6절 말씀입니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성경은 이미 여러 번.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지는 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거룩한 자부심이 어느덧 자신들을 가두는 올무가 되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끼리도 정죄가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를 성별해 하나님 앞에 정결한 삶을 드리고자 했던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처음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는지 잊었던 것입니다.

은총으로 시작한 것을 잊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그네요. 티끌이었던 히브리 백성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운 것을 잊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늘 이 여기에서 실패합니다. 모든 것이 내가 이룬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이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세상을 대적한다고 하면서 세상보다 더 세상 같은 자신을 만나기도 합니다.

신호등에서 빨간불은 가지 말라는 신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은총’이 아닌 자기구별의 정죄와 율법으로 차도를 건너가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매번 실패합니다. 로마제국에 실패했습니다. 마음으로 수많은 죄를 짓습니다. 도무지 누구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강퍅해지고, 고집스럽게 자기들끼리 더욱 더 견고해지기 원했습니다.

나는 내 아들을 죽인 로마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에 저 이방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끼리 뭉쳐서 반드시 해방을 이뤄야만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우리 민족이 이렇게 될 일이 없을 것이요!”

심각한 강박과 죄의식, 좌절과 정치적 불안감만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실질적인 ‘공중권세 잡은 자’였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예루살렘의 빌라도 총독과 갈릴리지역의 안디바 헤롯왕 역시 그 권세 잡은 자의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쉬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내 것으로 삼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우리도 이 공중권세 잡은 자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이스라엘의 앞길은 막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니 여전히 우리도 자기 의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서 발견하신 것입니다. 그 막힌 담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죄로 막힌 이 땅의 황무함을 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것은 없으니 하나도 없습니다. 언제나 통치하는 자와 백성들은 있었고, 언제든지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은 있었고, 반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이 땅 위에서 벌어지는 현실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가득한 이 땅을 비집고 하늘이 접혀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척에서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을 돌보심으로 오히려 멀리 있는 줄만 알았던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있음을 우리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자라야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종의 영이 아니라 아들의 영으로 살게 됨을 말합니다.

아들은 종과 같이 눌려 살지 않고, 자유와 기쁨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입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선택됨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해야 함’을 말하게 됩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속하시길 바랍니다. 진정한 종교개혁이란 또 우리 삶의 변화는 예수님께 속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예수 위에 세우는 날마나 부흥하고 건강하여 지는 금구교회가 되시길 소원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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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4:1~13(삶의 맛을 내는 세 가지)

 

들어가는 말

우리 삶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소스가 들어가야 맛이 있습니다.

 

1.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 내가 경험한 시험 - 가족 건사..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의 확인을 위해 늘 이를 극복하길 원하신다.

 

첫째는 돌들을 떡으로 바꾸는 행위를 이겨낸 흔적입니다. 생명이 없는 길인 줄 뻔히 알면서 옳은 길 인 것처럼 속이거나, 비생명적인 물질 때문에 자신의 삶을 낭비하는 일을 극복한 흔적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의 양식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2. 하나님께 경배하고 섬기야 합니다.

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예배(경배와 섬김)

 

둘째는 삶이 없는 허상과 세상 기준을 극복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모든 권세를 주리라 예수님을 유혹할 때 주님의 대답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아브라함은 익숙함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을 섬기므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3. 하나님 아닌 다른 허상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가. 무엇으로 만족하는가?(물질, 직위?)

 

마지막은 교만으로부터 자유한 흔적이 있습니까? 거짓은 자신이 높은 곳에 올라가야 안전하다고 속입니다. 심지어 그것들이 나를 아래에서 안전하게 받아낼 거라 착각하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높임 받을 분이십니다. 이 말은 스스로 겸손하신 분이라 우리가 곧잘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늘 하나님을 높이는 훈련이 되어야 이와 같은 시험에서 건짐 받을 수 있습니다.

 

나가는 말

신앙생활은 말 그대로 생활신앙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스토리,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맛이 들어간 삶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과 동행한 이야기가 만들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이 세 맛을 잊지 않고, 만들어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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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41~51 (거짓의 반대말은 삶입니다.)

들어가는 말

날씨가 추워지면 어릴 때 어머님이 아랫목에서 꺼내주시던 밥이 생각납니다. 전기밥통이 있어도, 굳이 한 그릇 아랫목에 묶혀 두신 것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자. 늘 아들을 염두하고 있다는 증거도 되니, 날씨는 추웠지만, 집에 가는 일이 늘 행복했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밥과 같은 사람이 됩시다.” 라는 말에는 이런 사랑과 정성이 들어 있는 말이라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좋아하는 말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밥과 같은 사람이십니까? 아니면 법과 같은 사람입니까? 밥은 허기진 사람의 뱃속을 든든하게 하고, 법은 요즘 세태에 허기진 사람의 겉옷마저 벗기는 경우가 많으니 법보다 밥이 되시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도 법보다 밥이 되기를 원했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1. 하늘에서 내려온 떡

떡은 분명 먹는 것입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생각하시면 좋겠지만, 여기서 번역된 떡은 아마도 유대인들이 주로 먹는 주식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매일 매일 먹어야 하는 것. 새로울 것이 없다고 끊으면 굶어 죽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주식이고, 밥일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예수님의 설명을 잘 못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주후 100년 경에는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인육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매주 지하무덤에 모여, 성만찬를 하는데 그때 사람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피해 매우 비밀스럽게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배 중 나누는 살과 피가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의미함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헤프닝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만찬은 늘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좋은 루머가 되곤 했습니다. 사람의 인육을 먹고 마시는 자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오해를 받았던 성례전이었던 것입니다.

아니라 다를까. 오늘 본문에도 유대인들이 모여 예수님에 관해 수군거립니다. 이유는 그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같이 평범한 사람이며, 아버지가 요셉이며 어머니가 마리아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언행은 예수님을 미친 사람이거나 사이비 교주로 오해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2. 당시의 종교흐름

그러나 여기서 잠깐.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예배전통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열심을 다해 유대의 왕들은 성전을 세우고, 이를 관리하는데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때가 지나고, 남과 북의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한 후에 다시 고향에 돌아왔을 때 이들은 예루살렘을 지키는 성벽조차 짓기가 버거웠습니다. 왜냐면 주변국의 시기와 견제가 매우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느혜미야와 에스라와 같은 지도자들을 통해 성전과 예루살렘은 다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점차 제사문화는 다른 식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짐승을 잡고, 성전에 모여 드리던 예식에서 점차 두루마기에 적힌 말씀을 듣고, 외우고, 실천하는 생활신앙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도전은 물론 사제그룹이 아닌 평신도 신앙운동가들인 바리새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도 했고, 어쨌든 유대교의 종교문화는 짐승을 드려 예배를 드리던 문화에서 점차 말씀 중심의 문화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약에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제사의 마침으로 설명함으로써 더 이상의 희생제사로서의 종교가 아닌 말씀을 듣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종교로의 변화를 잘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순종이 없는 죽은 제사가 아니라, 바울이 말한 대로 순종이 있는 산제사로서의 생활신앙으로 기독교가 출발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편적인 교회들이 따르고 있는 성만찬례와 세례와 같은 예식들은 그 상징적인 의미들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늘 말씀 안에서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먹고 입는 생활 신앙이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바로 당시 성전에서 회당중심으로 종교문화가 바뀌어 가는 시점에서 성전 안이 아닌 성전 밖에서 죄사함을 선포하시고, 또 말씀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도를 살아갈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셨음을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가 있어야 예수님이 무조건 성전문화를 배척하거나 늘 주류사회에 저항하는 무정부주의자 정도로 이해하는 실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예배와 살아 있는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3. 미움을 받은 예수

물론 이와 같은 태도는 기존의 성전 중심의 질서에 반격을 가하는 태도입니다. 마치 말씀이 없이 제사만 남은 로마교회의 미사에 저항하여, 마틴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벌인 개혁운동과 다름이 없는 것이죠.

물론 이와 같은 행동은 분명히 미움을 받습니다. 단순히 기득권의 반감이 문제가 아니라 누구든지 잠들어 있거나 눈을 감아버린 세대를 향해 깨어나라 눈을 떠라 라고 말하면 반감을 얻게 되는 것이 자연 이치이기 때문이겠죠.

 

예를 들어 어제까지 카톨릭 사제였던 마틴 루터가 갑자기 교회의 미사 곧 제사를 드리지 않고, 그것이 옳지 못하다고 하며, 말씀 안에서 살아 있는 생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삶에 아무런 기쁨이나 구원의 감격을 주지 못하는 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그 기쁨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 참 예배의 특징이라고 보았던 것이죠. 물론 이와 같은 변화를 좋아할 만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어느 시대에든 깨어 있는 다는 것은 항상 오해와 도전에 노출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하물며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유대인의 입자에서 그는 ‘이단’입니다. 말할 가치도 없는 신성모독자이며, 유대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악한이 분명한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을 어떤 선각자나 성인으로 봐서도 곤란할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분명 어떤 진보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이유나 또 자신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 늘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사실과 아버지가 일하시므로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신 분이시고, 그분의 방향성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요셉의 아들 예수(스펙과 스토리)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오직 하늘 아버지께 방향을 두고 계실 때 유대인들이 말합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런데 어찌하여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국내에는 50분이 넘는 자칭 선생이라 불리는 예수님이 계신데(웃음) 이들 이단종파에서도 자신들의 교주를 설명할 때, 이 본문을 인용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요셉의 아들, 곧 사람의 아들이었지만 생명의 양식인 떡이 되셨고, 우리는 이 영의 양식인 말씀을 우리 교주님을 통해 먹게 되었음으로 당연히 그 선생님이 예수님이 아니겠느냐 라는 식이죠. 그러나 이들 이단종파는 성경에서 일부 단락들을 빼내어, 서로 짝을 맞추는 식으로 교리를 만들고, 사람들을 세뇌해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라고 믿게 한 것이지. 절대로 그들이 재림주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늘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2000년에 오신 역사적 예수님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라고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결론을 말씀드리면 그것은 “삶과 허상의 차입니다. 이야기와 거짓교리”의 차이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관해 교리적으로 짜깁기 한 내용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선진국의 대학에서는 입학생들에게 ‘에세이’라는 것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에세이는 그야말로 수필입니다. 자신의 삶의 스토리를 적어오라는 것이죠. 바로 당신의 삶의 스토리가 있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요구를 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부모의 요구나 오직 대학입시만을 위해 조작된 삶”을 살아 왔는지.. 아니면 자신의 삶을 충분히 지배하고, 건강하게 꾸려가고 있을 수 있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은 뭐냐? 너는 네 목소리를 갖고 있느냐? 네 생각이 뭐냐? 너는 성인답게 소신껏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회 지도자로서 얼마나 삶의 다양성과 이야기들을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조작된 삶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스토리를 너는 갖고 있느냐’입니다.

*복음서에는 풍부한 예수님의 스토리가 들어 있습니다. 잉태에서부터 죽고 부활할 때까지 예수님의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아들 예수를 향한 유대인들의 수군거림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본문 43~44절 “너희는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그야말로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 그 “밥된 몸 살이”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야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영의 양식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토리가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스펙이 아니었습니다. 허상을 만들고, 그것이 참 살이라고 포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마귀에서 시험을 당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시고 살아낸 “삶”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삶이란 이야기가 있는 삶인 것입니다.

좋은 학교나 부모를 만나지 않아도 ‘스토리’가 있으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끈 삶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하나님을 만난 흔적이 있습니까? 삶의 이야기가 있으십니까?

오직 이 땅에서 손에 쥔 것만을 보고 사는 사람에게 ‘스토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세상에서 잘 살아낸 ‘스펙’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마치 이단종파들이 성경에서 거짓교리라는 스펙으로 자신들의 무덤을 키워나가듯이.. 거짓된 삶과 양심은 거짓된 스펙으로 자신을 속이고, 또 이것이 옳다 말하며, 다른 사람들도 사망에 빠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므로 알게 된 ‘하나님의 이야기, 하나님의 삶’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 된 사건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의 양식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떡을 드시고, 예수님을 옷 입으시길 바랍니다. 자꾸 실험해보고 도전해보시길 바랍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있으십니까? 그야말로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릴 이야기를 갖고 계십니까? 아니면 예수를 이용해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채우려고 하십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먼저 내주심으로 ‘밥이 되는 삶’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말그대로 생활신앙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스토리,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인내했더니 축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좋습니다. 남에게 밥이 되어 주었더니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더 큰 밥이 되도록 축복하셨다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밥되신 예수님을 먹고, 그 맛이 어떠한지.. 그 향이 어떠한지.. 그 영양이 어떠한지.. 내 몸과 삶에 어떤 변화를 미치는지에 대해 마음껏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야말로 여러분의 삶의 스토리로 전도하시고, 스토리로 하나님을 아는 향기를 내시는 맛있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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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삼겹줄 신앙(시편16)

 

들어가는 말

 

마리안느 머스그로브는 한국에도 소개된 유명한 어린이 동화작가입니다. 그녀의 동화가 유명한 이유는 어린아이들의 인성과 감성을 잘 발달시켜주는 내용과 그림들 덕분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그녀의 신간 “걱정을 걸어두는 나무”는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가 근심과 걱정이 있을 때는 누구에게든지 말해야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매일 잠자기 전 걱정 나무의 가지에 앉아 있는 동물들에게 하루 동안 있었던 고민들을 털어 놓고 잘 돌봐 달라고 자신의 걱정들을 가지에 걸어놓습니다. 그러면 걱정 나무의 동물들은 소녀의 고민을 묵묵히 들어주고, 신기하게도 이 과정에서 소녀는 그 자체만으로도 용기와 자신감을 얻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우리의 고민과 걱정거리를 내려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고민을 털어 놓으십니까? 그리고 무엇을 통해 용기와 자신감을 얻고 계십니까? 오늘 다윗의 신앙을 통해 우리가 누구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얻어 가며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는 귀한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1. 다윗의 보호청원

오늘 읽은 다윗의 시는 특별히 믹담이란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믹담이란 뜻 자체는 후대에 와서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떤 감정으로 이와 같은 시를 노래했을까 라는 것을 상상해보면 우리는 이 믹담의 의미도 알게 될 것 입니다.

다윗은 1절에서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합니다. 그는 평생을 싸움터에서 살아왔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진실함이 드러나는 때가 언제일까요? 도움을 구할 때입니다. 살 방향을 구할 때입니다. 살고자 고개를 숙여본 적이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고 자신의 꾀로 어려움을 이겨낸 사람보다 오히려 진실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시련을 주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뻣뻣하게 굳은 목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생각으로 인생을 풀어나가려는 완고함 때문에 곧잘 하나님을 실망시킵니다. 그야말로 자신이 아니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란 어쩌면 연약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란 오히려 강한 사람들입니다. 끝내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손을 벌려도 그 손을 뿌리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강한 것은 나중에 더 큰 고난으로 아픔을 당할 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 부드러움은 나중에 오히려 더 큰 어려움도 이겨낼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믹담의 비밀은 다름 아닌 주린 심정이오. 부드러워지다 못해 허물어진 심정으로 드리는 노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신앙의 비밀이 담겨 있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누리지 못할 기도입니다. 마음자세입니다. 인간으로서 드릴 수 있는 가장 진실한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 반드시 이와 같은 심정으로 기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가 하나님께 흐느끼며 기도하듯이.. 자식을 얻지 못해 슬피 울던 야곱의 아내 라헬의 기도와 같이..

믿음은 내 심정은 주리도록 만들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대는 더욱 커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다윗은 자신은 비우고, 하나님으로 삶을 채울 줄 아는 기도자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리 기도해야 합니다)

 

2.

본문 2~5절은 다윗이 하나님께 자신의 믿음을 선언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며, 어른이 되어 갑니다. 사람도 믿을 수 없고, 사랑도 믿을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정을 위해 사랑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 전부를 던져본 사람만이 ‘믿을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믿을 것이 없음을 깨달아감을 말합니다. 다윗은 믿었던 신하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다윗은 이용당했습니다. 왕이면서도 이와 같은 불의를 참아야 하는 때가 많았고, 더구나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왕국을 빼앗기기까지 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다윗과 같이 사랑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과 백성들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정당하게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압살롬을 피해 다윗이 성을 버리고 도망쳤을 때 그를 따라나섰던 충성을 맹세한 백성들은 어려움을 당하자 다시 다윗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다윗은 다시 ‘무엇도 믿을 수 없는 상태’에 놓입니다. 그때 다윗은 기도합니다. 주님..주님밖에 나의 복이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오히려 하늘 아래 자신이 택한 성도들이 자신의 기쁨임을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깨닫습니다.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모든 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믿음과 사랑을 경험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통해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지난 상처로 “믿을 수 없는” 상태가 된 내가 이제는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나음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사람으로 상처를 받았거든 오히려 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인간을 만드신 후 주님처럼 후회를 하신 분이 없으며, 반대로 인간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도록 허락하신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신 분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을 것을 선언함으로 도리어 하나님께 믿음을 얻은 것입니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의 한 겹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 겹줄만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어서 6~7절에서 지금 현재의 상황에 대해 ‘믿음 안에서’ 만족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탈무드는 이 구절에 대해 다윗이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했겠는가에 대해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다윗은 “사울의 병사들에게 목숨을 위협을 피해 밤새도록 도망치다 작은 동굴에 몸을 숨기고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깬 상황에서 이와 같은 노래를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목숨의 위협을 느껴 밤새 도망다니다가 아주 작은 동굴에 숨어 그나마 잠이 들었다 깼을 때.. 놀랍게도 그는 원수들에게 발각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작은 동굴의 입구가 ‘거미줄’로 온통 쳐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수들도 거미줄을 보고는 그를 찾지 못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6절의 아름다운 구역, 아름다운 기업이란 그에게 허락된 매우 작은 피난처에 불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도무지 감사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가운데..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 있던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그곳이 바로 아름다운 기업이요 그곳이 바로 아름다운 구역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환경을 통해 다윗에게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현재를 초월할 수 있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함’이란 믿음의 두 번째 한 겹줄을 손에 쥐게 된 것입니다.

/쉬고

그러나 두 겹줄도 끊어지기 십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다윗의 삶에 힘과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세 겹줄을 마저 손에 쥐어 주시기 위해 그에게 소망과 기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경험합니다. 처음 자기 직업을 가지고 열의를 가지고 해나가던 사람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심각한 ‘직업적 우울증’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우울증을 경험합니다. 자신의 인생이 전부 무의미한 것처럼..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닌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아예 포기해서는 곤란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삶을 보다 건강하고 생명이 넘치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이런 시험을 통과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경험한 일은 오히려 사울 왕에게서 도망쳐 사는 삶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일을 수도 없이 경험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헤어지도록 하셨는가요? 사랑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는 바로 실연의 아픔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사업에 성공할만한 확신을 주셨는데.. 왜 잘 되지 않도록 내버려 두셨는가요? 성공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는 바로 실패의 아픔을 선물하시기도 하십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살아야 우리가 기쁨과 생명의 길을 걷게 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집착’에 허비하곤 합니다. 내가 사랑인 줄 안 것도 실은 ‘집착’입니다. 내가 신앙인 줄 안 것도 실은 '집착‘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성공이라고 안 것도 실은 하나님께서 하나도 기뻐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게 가장 좋은 방법과 필요로 우리를 인도하신 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약속이 없는 백성은 망하듯이.. 소망이 없는 백성도 곧잘 믿음을 잃고, 삶을 집착하다가 낭비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거야.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실 거야.” 그야말로 하나님 한 분만으로 생명과 기쁨을 노래하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면 더 이상 삶을 집착하지 않고, 삶을 감사와 희락으로 노래하게 됩니다.

다윗은 집착으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그가 왕이 되기 위해 집착하다.. 인생을 낭비했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고, 하나님과 함께 그 뜻을 이뤄드렸습니다. 따라서 도저히 구원을 바랄 수 없는 때에도 그는 도리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지금의 삶에 집착을 초월하여 소망과 감사를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들의 불행에 주목한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주변의 어려움과 불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인내하며 신앙을 지킨 성도들의 감사와 소망에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미래에 대한 구원의 확신으로 오늘을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희락’의 세 번 째 한 겹줄을 손에 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한 겹줄, 두 겹줄, 세 겹줄의 믿음의 동아줄을 단단히 붙잡은 사람인 것입니다.

<호소>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신 분이 있다면 그분은 이제 ‘한 겹줄’의 믿음의 끈을 붙잡으신 겁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감사함과 만족함을 배우게 되었다면 그분은 분명 ‘두 겹줄’의 신앙을 붙잡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소망과 희락의 세 번째 줄을 붙잡으셨다면 이런 분은 다윗과 같은 믿음의 동아줄을 손에 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믹담의 비밀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동아줄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이 동아줄을 붙잡아야 .. 하나님께로부터 삶에 대한 용기와 감사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삶의 호흡이 길어집니다. 여유가 생깁니다. 거짓을 멀리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죽음을 거치더라도 끝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의 삶의 구역과 일터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구역과 기관들은 어떤지요? 아직 한 겹줄도 잡지 못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답답하시지는 않습니까?

내게 주어진 삶의 구역에 여러분은 얼마나 만족하고 감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욕심으로 살지 않고 소망 가운데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인생이 되기로 결단한 분들마다 삼겹줄의 믿음과 은혜가 마르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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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바꾸는 비밀(요2:1~11)

 

들어가는 말

카톨릭교회를 방문해보면, 좌우에 마리아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에게 ‘마리아신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묻는다면, 대부분 그렇다고 말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아니었음에도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으로 기적을 베푸는 내용이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도 어머니 마리아의 전언이 아들 예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지금도 마리아 상 앞에서 중보의 기도를 요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셨습니다. 또 어린 나이에 동정 잉태한 아들을 가진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여느 보통의 자녀들보다 더욱 애절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 사생아나 다름없이 태어난 예수님에 대한 평가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평판은 그렇게 좋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이들 가정은 지켜졌다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 가정이 아버지 요셉 덕분에 지켜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아버지 요셉의 역할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아버지 요셉의 역할은 예수님의 삶의 배경처럼 느껴지도록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할 때 보이지 않지만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통해 우리의 형편이 다스려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 역시 예수님이 태어나고, 기고 서며, 아이로 자라기까지 마치 하나님처럼 훌륭하게 이 가정을 보호하고, 재앙으로부터 건져내는 훌륭한 역할을 감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늑한 집과 같이 자신의 역할을 다 한 요셉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세계란 큰 집으로 인식되었었는데, 하나님이란 바로 그 집의 주인이란 믿음이 있었듯이 아버지 요셉은 이들 가정의 주인으로써 군림하지 않고, 오히려 연약한 아내와 독특한 아들을 보호하고, 사랑해낸 가장으로써 이해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를 가진 아내를 믿어준 요셉의 믿음과 용인은 애굽 땅과 베들레헴의 나그네 여정에서 투철한 가장의 모습으로 승화되어 있었고, 12살에 예수님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에 갔던 모습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훌륭한 남성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내와 아들을 위해 살았을 아버지 요셉의 삶 속에서 오늘 우리나라의 헌신적인 아버지의 모습 역시 읽을 수 있겠습니다. 교회에서의 남신도의 자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 남신도분들만 빼고, 나머지 해당되는 분은 저를 따라해 보시겠습니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여보 힘내세요 예쁜이가 있잖아요” , 민원이 많이 들어와서..마지막으로.. “집사님 힘내세요. 예수님이 있잖아요”

 

1. 맛을 바꾸는 코드 : 예수

오늘 성경 이야기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인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가나 땅에 혼례가 치러집니다. 최소 일주일은 걸리는 이 결혼식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가게 됩니다. 당시 보통의 여인들이 결혼식에 하는 일은 음식 장만 등의 일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의 경사스런 혼인잔치를 위해 여인들은 최선을 다해 게스트(손님)가 되어 주었습니다. 힘을 다해 결혼을 축하해줬고, 춤추고, 음식을 나누는 매우 즐거운 잔치였을 것입니다.

왜냐면 결혼은 인위적인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하신 최대의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도 하나님이 선물하신 최대의 축제인 결혼식에 나가 계셨습니다. 그래서 본문1절은 어머니가 거기 계셨고, 2절에서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 혼례식의 주인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 무리를 초대하지 않았을 것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정황상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아들 예수와 그 제자들에 대해 소식을 들은 주인이 기꺼이 이들을 초대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혼례식에 오자마자 마침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없다.’라고 말하십니다. 이 때 예수님의 대답이 조금 엉뚱합니다. “어머니,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이 둘의 대화는 지금 가나의 혼인잔치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대화입니다. 애시당초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과는 다른 관심을 가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나 아들이나 오직 한 가지에 주목하여 대화를 나누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때, 곧 하나님의 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때, 그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시작이 바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있음을 어머니 마리아는 강하게 확신했습니다.

때문에 어머니 마리아는 곧바로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일을 시키든지 그대로 하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중요한 순간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느냐가 곧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순간입니다. 도대체 성령으로 잉태된 내 아들 예수, 그 예수를 통해 앞으로 전개될 하나님 나라란 무엇일까. 어머니 마리아도 궁금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당시 유대법에 따라 정결례에 사용되는 돌 항아리를 보시고, 그 여섯 항아리에 물을 아귀까지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여섯 항아리는 비워져 있습니다. 모든 정결례식이 마쳐진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능력을 잃어버린 유대의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능력도 기적도 나타나지 않는 죽어버린 공동체나 나라를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비어 있는 그 항아리 6개에 물이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으로 시작했다가 내 노력으로 인생을 채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젠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절망하여, 아예 물을 채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세상에게 실족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어진 분량과 계획을 채우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를 보십시오. 내가 지금 믿지 못했을 뿐이지..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때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마치 모래시계에 모래가 빠지듯..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카운트다운을 세며, 항아리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어라!”

 

물이 채워지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종교적 열정만으로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가 올 수 없습니다. 내 열심만으로는 주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다는 것은 맛이 달라짐을 말합니다. 성경은 수도 없이 예수님을 통해 놀라운 일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여인이 예수님을 통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린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란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린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왜 우린 변화될 수 없지?

안타깝게도 믿음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설명해줘도 얻지 못한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복음서는 오직 다음의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통해 인생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아무런 감동이 없던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통해 맛을 찾았습니다.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한 모임도 “예수님께 주목하였더니” 맛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미 모두 취해있었을 연회장이 새로 마시게 된 더 좋은 포도주의 맛을 보고는 여기 저기 탄식이 나옵니다. “사람마다 좋은 것을 먼저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고 소리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금방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지금까지 우리가 맛보지 못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신기하고, 놀랍고, 대단한 축제가 될 것이란 사실을 오늘 이야기는 말해준 것입니다.

 

2. 남신도회에게 부탁하는 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처음에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요셉의 진면모에 대해 나눈바가 있습니다. 남신도회는 여신도회와 달리 어느 교회나 그 수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우리 교회만 보더라도 여성신자와 비교하여 1/3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수가 적다고 해서 함부로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예수를 믿고, 직분을 맡아,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고,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 억센 사내들이 ‘예수’라는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도 왠지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나 남신도회가 변화되면 교회가 변화되는 경우는 많이 봅니다. 어떻게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먼저는 예수님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올해 총회 표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로워지는 교회입니다. 그만큼 교회와 성도를 답게 만다는 것은 예수 밖에 없다는 성찰에서 나온 표어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 근심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제일 큰 걱정은 교회에서 예수가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를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지만, 그 속에 예수가 없습니다. 맹물 같은 인생처럼 아직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경험할 마음이 없는 빈 항아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빈 항아리로는 성도라 부를 수 없습니다. 예수를 만나야 포도주가 됩니다. 포도주인척 해도 소용없습니다. 진짜 예수님을 알고 있는 사람 앞에 서면 금새 거짓신앙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도회는 인간집단이 아니라 성도의 모임으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공급받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분위기를 축제의 분위기로 만드는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나 청년이 아무리 앞에서 나팔을 불고 북을 쳐도, 남신도분들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 집회는 망쳐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 한 집사님이 남신도 기도회를 만들기 위해 궁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자청해서 목사님께 말씀을 드리고는 아침밥을 지어 기도회에 나온 분들에게 나눠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신도 아침기도회가 끝나고 아침을 먹으니.. 예전에 보지 못한 분들도 나왔다고 합니다. 식사를 거르기 쉬운 가장이나 혼자 사는 분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죠. 대화중에 근엄한 줄 알았던 집사님이 실은 수다쟁이였다든지.. 아무 말도 안해서 신앙이 있을까 했던 분이 실은 3대째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좋은 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끈은 쉽게 끊어지지만, 여러 줄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성도 역시 모였을 때 강해지는 것입니다. 자청하는 신앙으로 힘써 모이고, 교회의 분위기를 바꾸는데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는 섬기는 자세만이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신도회 활동 중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성과욕심입니다. 이것들은 대부분은 명령하고, 통제하는 습관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실상 이런 통제 욕구는 정신질병에 가깝지 건강한 리더십과는 거리가 멉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섬김의 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자기 목숨을 내려놓은 희생과 사랑이었습니다.

원래 인간 정치는 힘을 모으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힘을 나누는 행동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생활의 기본 역시 원래는 힘을 모아 역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소유를 나누고, 힘을 나누는 일에서 시작되었음을 살펴봅니다.

 

나가며..

저는 간혹 잘못된 조직화를 목격합니다. 한 사람에게 모든 힘을 실어주어 질서를 이루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 수 있는 것은.. 힘을 실어주는 대상은 바뀌지만, 힘을 실어주는 분들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끼리 권력화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신도회의 실상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타 교단의 실상은 조금 알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모든 신도회의 기본은 섬김이지 권력화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구나 요즘같이 합리적인 젊은 세대에게 어른들의 잘못된 모습들이 이내 교회에 대한 흥미를 심각하게 떨어트리는 부작용을 선물합니다. 정말 먼저 된 자가 정신을 바짝차리지 않으면 안되는 때입니다.

 

일당 백의 우리 구암교회 남신도회가 다시 부활하여 승승장구하는 그날을 바라며, 모든 성도님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이 변화되는 은혜가 넘치시길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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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가 아닌 초월(요한1서5장1~4)

들어가는 말

토마스는 세상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우며, 그 일을 통해 사람은 참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말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로 달려간 삶이었고, 세상을 벗어 던진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수도사들이 그렇게 세상을 등졌습니다. 아니 세상을 등진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실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헌신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이들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회는 지난 500년 동안 이들에 대해 오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수도사와 신부만이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이고, 세상의 일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로마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이들은 다만 구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생이 다르듯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분명 거룩하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주님이 인정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어느 곳에 있던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도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면 그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맞추려고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거룩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개신교회는 성과 속, 즉 거룩함과 세속 됨의 차이를 구별 없이 받아들인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회들이 본래의 맛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50년전 흑인해방운동가이며, 종교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자신이 성직을 걷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떤 신비한 부르심을 따라 이 길을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고통 받는 나의 동포와 인류를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뜨거운 마음으로 나선 것입니다.

이후로도 많은 성직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한 사람들. 예수님이 구원하고자 했던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직으로 각 자의 삶의 자리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들이 신자들이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다가 세상과 닮아버리게 된 것입니다. 적지 않은 교회들이 주님의 일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은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더욱 사랑했습니다. 지도자가 병들자 교인들도 점차 세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교회인지 정당집단인지.. 교회인지 장사터인지 알지 못할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줄이면.. 결국 ‘거리조절’에 실패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닮아 버리면 곧바로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자의 입과 눈에서는 세상의 학문과 비난이 쏟아져 나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대해 심판하시고 비판하셨지만, 이들과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처음 사랑이 있고 없음일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 특히 복음적인 교회라 불리는 곳에서도 기본적인 교리를 제외하고는 매우 놀랍게도 세속적 프로그램과 유행을 따라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진리만 헤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좋다는 융통성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생각들이 오히려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진리와 세상을 두 동강이 내버리는 결과를 만들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진리를 움켜쥔 체 성공과 물질주의로 화려하게 무장한 교회들은 세상으로 하여금 상식과 신학을 벗어던진 대적자 골리앗처럼 비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성직자 스스로 이 모든 불행을 만든 셈입니다. 스스로 천박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신자들 역시 스스로 이와 같은 불행이 행복이라고, 성공이라고 속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생명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임하면, 반드시 세상에 대해서는 한 번 죽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충분히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야 다시 세상을 사랑할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이 세상에서는 지켜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이젠 그가 부활하신 것과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자마다 세상을 이겨낼 만한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대해 한 번 죽으셨고, 다시 사셔서 이젠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한 번 죽은 자라야 그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세상에 대한 미련이 완전히 한 번은 죽어야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말뜻을 여러분 스스로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멀리 나갔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되돌아왔을 때 그 충격과 그 기쁨을 상상해보십시오. 반면에 꾸준히 연락하던 아들이 되돌아왔을 때는 어떨까요. 그 기쁨과 놀람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번은 완전히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미워해야 합니다. 그 동안 세상과 연락하며, 아무런 죄책감과 자각 없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 또 나를 속여 온 세상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라야. 하늘 나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보물이 이곳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는 죽어서나 혹시 갈 수 있는 곳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면서 한 번 죽은 자는 그 순간부터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의 목적점이 달라 집니다.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세상과 다른 차이를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천천히 세상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사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타협할 때도 있습니다. 죄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이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한 번 죽은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므로, 마지막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을 위해 기도하고 고민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시간 두 갈래의 흐름으로 흘러 내려왔습니다. 하나는 사회운동과 민주화, 빈민구제 등의 사업에 최선을 다해온 교회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최초 선배들이 뜨거운 기도와 말씀에 대한 묵상으로 이 세상을 건너고 이겨냈던 것과 달리 이제 이들 교회에서 이런 기본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과 등을 지고 오직 복음이란 이름 아래 모인 교회들입니다. 이들 역시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최초 선배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상을 이겨냈던 것과 달리 그동안의 엄청난 부흥 덕분에 ‘성공과 출세와 부패’가 이들의 다른 이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들은 거룩함에서 도망쳤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인생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를 때도 자신이 계신 곳은 거룩한 곳이라고 구별하셨습니다. 이때의 구별은 차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지켜 줄 안전선인 것입니다. 도로 위의 차들이 안전거리를 유지하지 않고 운행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수도 없이 많은 사고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이 나라에 수많은 사건 사고가 넘쳐납니다. 인간성이 무너지고, 세상도 더 이상 교회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별함이 없어서입니다. 초월함이 없어서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란 뜻입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 뿐 아니라 그의 말씀을 지키고,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판사가 모든 증거가 충분한대도 외압에 못이겨 ‘무죄’라고 선언했다면, 그가 비록 교회에 다닌다 하더라도 그는 성도가 아닙니다. 세상에 대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은 이 세상의 유한함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양심이 늘 하나님께 닿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판사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거짓 증언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는 성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판사의 판결을 보고, 같은 판사로써 그 불의함을 고발하여 시정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분명히 한 번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세례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출애굽 하던 백성들이 건넜던 홍해가 바로 그 의미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는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 가운데 살면서 도피가 아닌 초월의 삶을 살아내는 비결인 것입니다.

 

초월은 지금 여기에서 나의 한계를 너머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 깊은 관심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를 끊임 없이 초대하십니다. 자신의 자녀들을 잃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쏟는 노력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왔는지 모릅니다. 성직자이던 아니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저는 이제는 누구라도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을 초월해 하나님 앞에 용기를 보이는 자에게만 하나님께서 구원을 허락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제 자신부터가 세상적입니다. 평생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서 들어선 길이면서, 스스로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고, 조직을 운영하는 것을 배우고, 인간관계의 비정함을 배우고, 남을 속이고, 속이며, 그런 것이 세상이라고 습득하는 것이 원치 않아도 되는 제 자신을 볼 때가 그렇습니다.

그야말로 천박하지 말아야 할 삶을 결단하고도, 쉽지가 않은 것이죠.

그러나 다시 한 번 십자가 안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도피가 아닌 초월해내는 삶을 연습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기쁨이 유지됩니다. 능력이 유지됩니다. 생명이 유지됩니다.

한 번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거듭남을 통해, 즉 세상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삶을 통해서만 그 신령함이 유지된다고 진리는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도피가 아닌 초월로 자신의 생명을 증명할 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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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이라도 겸비하면(왕상21:17~29)20180910수요기도회

외환 위기 이후로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질서에 한국이 편입되었습니다.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예전에 대학생은 낭만과 시국과 문화라는 것을 향유하고도, 좋은 회사에 취업했었지만, 지난 1998년 이후로 20대는 영어만 잘할 뿐, 자신이 빼앗긴 자유와 문화에 대해 단 한 번도 항거하지 못한 체 밀려밀려 30대와 40대가 되어가고 있음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티브이를 보면 20대 배우들이 모두 40~50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드라마에서 윗 세대를 재연할 뿐, 자신들의 20대 문화와 자유를 연기하는 친구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이유도 모른 체 영혼의 목이 잘린것처럼 이 세상에 대해 자신이 잃은 것들에 대해 질문하는 친구도 적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엘리야처럼 자신들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 분명히 알고, 외치는 소리가 간절한 때입니다.

 그리고 오늘 열왕기상 21장 내용은 잘못된 권력에 의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나봇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나봇의 잃어버린 것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잃어버린 자유와 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대지 요략>

 

가. 나봇의 포도원(21장 이하 내용)

1. 아합이 사마리아 궁 옆에 나봇의 포도원을 마음에 들어 하더라.

-. 아합은 자기 궁 근처의 포도밭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확장되고, 더욱 멋져진 왕궁의 격에 맞는 끊임없는 인간의 지배욕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평소 아합의 관심이 어디 있었는지 알 수 있다.

 

2. 나봇이 하나님께 받은 땅을 팔지 않다.

-.유대인들은 조상때로부터 내려온 땅은 하나님의 기업으로 팔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자손대대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 정신 속에는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이 숨어 있다.

 

3. 이세벨이 간계를 부리다.

-.남편을 위해 간계를 구사해, 나봇이 사는 지역의 귀족과 장로들에게 편지를 보내, 연출된 금식행사를 열게 한다. 이때 두 불량배가 거짓 증언자로 나선다.

-.이에 귀족과 장로들은 나봇을 데려다 죽이게 내버려 둔다. 압박에도 불구하고, 지도층이 깨어 있었다면 나봇은 살 수 있었겠지만, 패색이 짙은 조직일수록 이와 같은 일은 기대할 수 없다.

 

나. 엘리야의 고발

1.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다.

-. 여호와의 말씀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온 몸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공명과 다름이 없다. 더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구체적인 아합의 심판을 선포하셨다.

 

2. 아합과 엘리야의 대화

-. 대결의 절정으로 엘리야를 바라본 아합의 태도가 나타난다.(20절)이에 엘리야는 “나를 찾았느냐”며, 정식으로 자신과 아합이 반대에 서 있음을 드러낸다. 당시 이와 같은 문화가 가능한 것은 엘리야를 비롯한 여호와의 편에 선 무리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언자는 언제든지 왕을 찾아가 독대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신변을 우려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쨌든 엘리야는 두 가지 예를 통해 그 처참함을 상기시켰다. 바로 바아사와 여로보암의 예이다. 이 둘은 반란을 통해 왕이 되었지만, 결국 반란을 통해 죽임을 당한 왕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판의 이유는 역시 ‘불의한 행위’ 때문이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기질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이 보지 않아도 불의함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고침을 받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 엘리야는 이세벨의 심판도 빼놓지 않았다. 이세벨은 아합에게 권모술수의 창고이자, 권력의 근원이었다. 잘못된 권력은 죄가 되어 공동체에 들어오고, 반드시 공동체에 상처를 준다. 기독교 신앙은 조직이나 체계가 아닌 하나님 앞에 선 ‘개인’의 책임이 훨씬 중요하게 존중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귀족과 장로, 아합과 이세벨과 같이 현실과 조직의 뒤에 숨어 자신의 유익을 취하는 무책임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기 위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이는 카톨릭과 달리 기독교가 개인의 성숙을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말하기도 하며, 성서의 내용이기도 하다.

 

3. 아합의 겸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엘리야의 저주가 엄준했기에 아합은 더욱 놀랐다. 이미 닥친 불행도 아합의 겸비로 하나님은 아합의 때가 아닌 자녀의 때로 연기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심판주이시지만, 심판이 목적이 아니시다. 한 영혼이라도 돌아서서 선한 의의 도구로 이 땅을 바르게 펴내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역대 왕 중 가장 간악한 왕이었지만, 아합은 자신이 행한 놀라운 악행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심판받게 될 것인지 듣게 됨으로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는 풀이 죽어 다녔다. 그동안의 기고만장함은 근신의 자세로 변화되게 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종교의 생활 질서 안에서 예언자의 직책이 차지하는 자리를 인정하고, 이로써 그에 대한 처벌은 부분적으로 이뤄지게 되었음을 성경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만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내 손으로 해낼 수 있는 부분보다 하나님의 뜻을 인정할 때 누리게 되는 복락이 더욱 큼도 깨닫게 된다. 어쩌면 신앙생활이란 나와 하나님의 차이를 분명히 아는 것이며, 동시에 각 자에게 맡겨주신 직분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임도 알게 된다.

기독교회는 교회에서 세 가지의 말씀만을 인정하고 있다. 하나는 성경이다. 두 번째는 보이는 말씀인 성만찬이다. 세 번째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예수 중심의 말씀이다.

목회자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타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도는 선포되어진 예수님을 전파하고, 살아내는데 협력하여 노력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겸비이며, 우리가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용서받고 구원받으며,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인 것이다.

 예수님을 입고, 먹고 마시는 성도는 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오늘도 이 예수님을 통해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이 주신 여러분의 참사람됨을 찾아내시고, 그 신앙의 깊이를 더해가시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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