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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만나는 기도(히4:12~16)

들어가는 말

자신을 만나기 위한 노력들이 적지 않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노부부에게서도, 취업을 앞둔 청년들에게서도, 갓 입사한 회사원이든 대부분 자신의 삶에 부딪친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자신을 아는 힘’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은 꽤 괜찮은 노력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부부간의 성격차이라든지 다툼들을 해결하는 대안들은 부끄럽게도 드라마에서 하는 사랑과 전쟁이란 프로그램이 전부였다 싶을 정도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치료하는 데에 매우 무관심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사회가 복잡해지고, 자신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자신의 내면과 인격을 살피는’ 돌봄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잘 살기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인생의 문제를 깨닫기

우리는 생각보다 칭찬에 인색합니다. 제 자신도 그런 편입니다만.. 아이가 뭔가를 하고 싶어할 때 그대로 두기보다,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아이가 타고난 좋은 성품이나 능력도 부모들에 의해서 많이 잘려나가는 경우도 적지가 않습니다. 예전에 제 모습을 봐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권위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거나 삶 전체에 대해 매우 비관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정적인 생각이 끊이지 않은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실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제게는 한 가지 과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내 문제가 뭘까? 왜 난 늘 화가 나 있는 걸까?”

 

어제는 청년들과 함께 애니어그램이라는 심리프로그램을 했습니다. 총 9가지 유형의 성격으로 나눠 사람의 성품을 알아보는 이 프로그램은 2000년 동안 교회의 지도자를 훈련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은밀히 사용되다가 현대에 이르러 전문화되어 교회와 회사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본래 나의 성품과 장점을 알아가도록 돕고, 동시에 꺽인 내 장점들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익함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원만하게 정상 범위 내에서 골고루 성향이 분포되는게 좋습니다만, 어떤 경우는 거의 대부분 능력이 확 꺽여있거나, 한 능력만 월등하게 높고, 나머진 다 평균 아래로 꺽인 경우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든 원인은 어린 시절 ‘부모님들에 의해 억지로 제재를 당한 흔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여자아이들일 경우 어머님의 영향으로 억제를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반대로 정상적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지 못한 경우도 또 현재 좋지 않은 인간관계 때문에 능력이 꺽여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날개가 꺽인 경우이죠.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긍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꺽인 채로 살아갑니다. 심지어 그대로 사는 것에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한 체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단 번에 표시가 나기 시작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방법이 삶을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자신과 삶에 대해 건강하게 마주하지 않은 사람들이 택하는 방법이 그렇습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결과만을 얻어내면 그만이라는 지독한 이기심이 그 삶을 병들게 하기 때문이죠.

같이 가는 법도 모르고 다른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국 똑같은 실패만을 반복할 뿐.. 점차 삶이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얼룩지고, 진짜 삶은 약해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욱 슬픈 것은.. 자신의 삶이 거짓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인격이 무너지는 것에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변의 큰 저항에 부딪치지 않는 한 이런 사람을 막을 사람은 없게 되는 것이죠.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지만, 어쩌면 암보다 더 우리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의 포기에 있음을 늘 살펴야만 할 것입니다.

 

2. 죄의 자복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믿음

오늘 본문 12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모든 것을 관찰하도록 하고, 그 체질을 풀어내는데 힘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 사람은 말씀을 들으므로, 그 체질에 큰 변화를 얻습니다.

「어느 예배당에 남편과 심하게 다투고 예배를 보러 온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필 그날 설교 주제는 “용서하라”였다고 합니다. 설교시간 내내 그 여집사님은 마음이 불편했다고 합니다. 마음에 이상하리만치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그래도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이 오고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축도도 받기 전에 예배당을 박차고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은 도무지 마음이 무거워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같은 설교를 듣고 그 집사님은 찔림을 얻어 반응했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설교 말씀을 가장 잘 들은 사람일까요? (쉬고)

바로 마음에 찔림을 얻은 사람입니다. 내 기질과 성품을 심하게 뒤틀림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성정과 부딪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깊은 숨으로 화를 가라앉히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도전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속사람이 찔리거나 그렇게 살기로 한 번 더 다짐해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산 같은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이 복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아멘으로 응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형통케 되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화나 있는 자신과 화해하게 되고, 화나 있는 하나님과도 화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금은보화의 구슬이 서말이라도 그것을 믿음으로 내가 꿰지 않으면, 그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과 삶을 주장하도록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마음을 여는 훈련을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13절은 말합니다.“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기도할 수 있을 때, 순종할 수 있을 때. 내가 아버지의 말씀 앞에 벗는 것이 나중의 심판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보다 나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지금 내가 행복할 수 없다면, 어떤 구원의 복음도 내게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부끄러워 감히 말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 앞에 쌓아 올린 가면과 옹벽부터 허물어야 빛 되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도 흘러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유명인들의 독방 수감 생활을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대형 TV에 칸막이가 달린 화장실과 샤워시설. 다른 일반 수감자에 비하면 분명 호화시설에 불과하지만, 죄를 짓고 감옥에 가서도 그런 것들을 누리려는 그 위인들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야말로 감옥에 가서도 반성할 기회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에서 나올 수 있는 ‘광야’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아무런 삶의 도전이 되지 않고 있다면, 그가 쌓아 올리는 삶 역시 그 호화스런 감옥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가 만든 안전, 편리함이 하나님의 개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강단에 설 때마다 하나님 앞에 주의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합니다. 아무리 진리를 향한 노력을 준비했다 하더라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두 담아낼 수 없다는 한계와 자책감 때문입니다. ”

말씀을 전하는 중에 나의 욕심과 무지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용서를 비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는 담대함이 아니라, 용서의 사랑을 공급하셨습니다. 죄의 용서는 죄를 짓기 위한 담대함이 아니라, 사랑을 얻기 위한 그래서 내가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한 힘이 되주기 때문입니다.

(/쉬고)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힘입어 날마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야만 하는 줄로 믿습니다. 먼저 큰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 때문에 감히 하나님 앞에 자유한 마음을 지키지 못합니다.

아마도 한 번도 용서나 지지를 받아보지 못한 아이처럼.. 창조주 되시는 아버지 앞에서도 우물쭈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마다 새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 있는 나를 죄 없는 자녀와 같이 여기시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들어오기 전의 나는 그 안에 성령이 없으므로, 말씀이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집착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임에도 한 번도 내가 틀리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니, 다른 사람을 용납할 마음도 적기 마련입니다. 집착은 또 다른 내 신앙이 되어서, 영원한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전환)그러나 신앙은 긍휼을 사모하는 마음인 줄로 믿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일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날 꺼리를 만들어 감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통나무와 같이 뻣뻣한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 부드러워집니다. 말씀과 영이신 하나님을 통해 날마다 변해가는 자신을 세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신을 벌거벗겨 내려 놓은

것만큼 자신이 만들어져 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자신을 만나는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 지금 내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 사람인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사람인지 깨달을 때 비로소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권면의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래만을 사는 사람은 오늘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감사하는 사람을 내일로 감사를 미룬 사람이 결단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다듬어지고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감사가 삶을 변화시키고,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늘도 은혜의 보좌로 나가는 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세상의 죄와 절망과 저주를 이겨낼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잡아 누리는 것이지. 비굴하게 주문을 외듯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시되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받아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 긍휼하심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긍휼을 입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오늘 감사하지 할 수 없다면 어쩌면 오늘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자신을 깨달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과 몸과 혼을 쪼개도록 하나님 앞에 앉아보시길 바랍니다.

 

은혜 베풀 자에게만 결국 은혜를 베푸시는 원리를 가슴 깊이 받아들이시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고, 기도하는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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