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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5:4~8/눅6:32~36 -

 

들어가는 말

(사람은 자기가 잘못이었다고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오늘의 자기는 어제의 자기보다 더 현명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 알렉산더 포우프.)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원하든 원치 않던 사람은 시행착오의 동물이 분명한 것이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자신의 시행착오를 수정하기보다 그대로 밀고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미련하다라고도 하고, 어리석다라고도’하는 것이죠. 그리고 대부분의 이러한 미련함과 어리석음은 크게 ‘두려움’과‘분노’와 연관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분노는 삶에 대한 도전과 극복보다는 그 자리에 안주하게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분노와 두려움이란 첫 번째 감정은 믿음 안에서 극복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요셉은 바로 이 첫 번째 감정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반 평생을 절망과 두려움을 마주보고 살았고, 드디어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온 가족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통해 신앙이 한 층 성숙되어지는 귀한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두 번째 감정을 배우기까지-이야기 속으로

먼저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죠.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총애를 받은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에게 화가 나있었고, 분노한 형들은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리게 되죠. 그리고 아버지에게 요셉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그렇게 가족들에게 잊혀 지게 된 것이죠. 요셉은 이집트에 가서 몇 년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됩니다만 이후에 권력을 잡게 되고, 이집트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총리가 됩니다.

수년 후 요셉은 가난하고 굶주린 가족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기회를 얻습니다. 가족들은 요셉이 누군지 알지 못했지만 그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마침내 요셉이 자신을 형들에게 드러냈을 때, 그들은 요셉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알아 보았을 때 형들은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요. 요셉은 해결해야 할 많은 분노와 원한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이제 마음만 먹으면 그들을 추방하거나 죽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사랑과 증오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사적인 사람이었다고만 한다면, 성경은 그의 원한을 푸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을 겁니다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개인의 감정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요셉의 형들은 그를 학대했고, 요셉은 뒤 늦게라도 이 원한 관계를 풀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요셉은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요셉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숨겨진, 이해할 수 없는, 해결되지 않는 목적을 기꺼이 수용하게 된 것이죠.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이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사람. 그래서 인내하고 그래서 도전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도 자신에게 일어난 첫 번째 분노의 감정을 부인했고 하나님의 목적을 존중하고, 그에 반응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내가 요셉이요’ 라고 가족들에게 말한 후에 두 가지를 행했습니다.

 

①하나는 형들에게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시작한 두려움, 증오, 폭력이라는 악순환을 이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큰 자신을 향한 삶을 향한 목적이 있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향하신 큰 계획이 있음을 믿게 된 후에야 이 모든 악순환을 끊게 된 것이죠.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생각보다 더 큰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믿음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기도 하며, 때로는 초인적인 심성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감당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바른 판단을 하도록 도우며, 자신을 부인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하는 형통의 길목임이 분명합니다.

누가 이 길목에 서서 형통을 노래할 것인가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몫인 것입니다. 아무리 큰 불행과 대적들이 덤빌지라도 길목을 지키는 병사는 쉽게 이것들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의 길목에서 불행을 이겨낼 수 있는 파수꾼이 될 것입니다.

 

②두 번째는 요셉은 형들에게 왜 그가 그토록 자비롭고 예상 밖의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세 번씩이나 이 이유를 말해줍니다.

①먼저는 5절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입니다.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②두 번째는 7절에 하나님은 당신들을 위해 남은 자를 보존하기 위해 당신들보다 앞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③세 번째는 9절에 나를 여기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의 첫 번째 감정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두 번째 감정으로 변화됩니다. 분노와 좌절의 쓴 상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할 때 비로소 녹아 집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순간을 위해 내게 지난 과거를 허락하셨고, 보내셨다는 깨우침은 삶의 어떤 동기보다 더 강력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아이들의 상담사가 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가난한 한 청년이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청년들에게 용기를 주는 기업가가 된 경우가 그렇습니다. 목회에 실패했으나 이를 극복한 목회자가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버려지는 과거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과거를 불행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는 사람보다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오늘을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도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하는 사람인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를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도무지 변화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공동체에, 인생들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지금까지 모든 불행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던 사람들이 자신 안에서 원인을 찾기 시작합니다.

쓸모없는 인생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니까 쓸모 있는 인생이 됩니다. 거리의 여인들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가난하고 병든 인생들이 자신의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병 고침을 간구하는 인생이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이의 병을 낫게 합니다.

인생 역전의 기적이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 안에 일어난 첫 번째의 분노와 좌절의 포기를 꺽어 버린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두 번째의 섭리로 여러분을 세우실 것입니다.

/반 쉬고/

여러분은 지금 자신이 쥔 것이 한 웅큼의 사탕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어려움을 사탕으로 달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한 잔의 술로 달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닥친 불행과 어려움을 나의 문제로 해결해보려고 한 들 어떤 능력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세상의 큼을 저와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내 손으로 뭔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바꿀 수 있고, 내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고칠 수 있는 병이라면 가능합니다. 좋은 의사를 만나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문제이자. 내 안의 영적인 질병이라면 다른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을 팔았습니다. 그들 안의 시기와 원망이 동생마저 팔아넘긴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인정할 수 없는 죄악과 연약함이 숨어 있습니다. 그 연약함은 끊임없이 우리를 죄를 짓게 만들고, 우리를 떠들게 만들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참여한 사람은 달라집니다. 더 이상 떠들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나의 불행 때문에 눈물지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움켜쥐고 삽니다. 증오도 움켜쥐고 살며, 미움과 두려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하고자 가족들보다 먼저 이집트 땅에 나를 보낸 것이고, 남은 자를 보존하기 위해 나를 보낸 것이며, 나를 보낸 것은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과 같이 저와 여러분을 믿음의 자리로 밀어내셨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첫 번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동생을 밀어냈지만, 요셉은 형들의 첫 번째 감정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셨음을 인정했습니다.

인정하니까..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인정하니까.. 내 안에 좌절과 상처가 회복되었습니다. 깊은 절망은 어쩌면 순수한 바램에서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간절히 바랬던 일이 무너질 때 그렇습니다. 당연히 될 줄 알았던 일이 무너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첫 번째의 절망이란 감정은 두 번째의 잔으로 옮겨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섭리라는 잔인 것입니다.

/쉬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섭리에 참여함이란 다음의 증거가 나타납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으로의 회복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깊이 절망한 후 하나님 앞에 다시 앉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를 들어, 세상이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을 안 청년의 기도는 어떨까요? 믿음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전도자의 기도가 어떨까요? 사랑하는 가족의 질병조차 낫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보호자의 기도는 어떨까요?

아마도.. 이럴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당신께 무릎을 꿇는 것이 매우 낯선 행동이긴 하지만, 제발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십시오.”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은 간절한 소원과 겸손의 자세를 만나야 합니다. 간절한 소원과 겸손은 머리가 경험하는 현실과 부딪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지, 정, 의” 세 가지가 함께 하나님께 굴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좌절한 심령은 다음의 기도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당신께서 이룰 수 있는 일이 더 많음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무능하셔서 이 세상에 손을 대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하나님이 힘써 노력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 저의 눈 멈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이제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저를 당신이 필요한 곳으로 보내주옵소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가끔 여러분이 겪는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으로 온전하게 하며,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신앙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신앙은 관대한 것입니다. 분노와 실패의 첫 번째 감정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실패했다는 것이 때로는 하나님 입장에서의 성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지금의 불행과 어려움은 다시 만나게 될 하나님 안에서 큰 상급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뭔가를 장악하고, 움켜쥐려는 마음을 내려놔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총리가 된 요셉에게 가장 먼저 상실을 경험하도록 했습니다. 가족으로부터의 배신, 자유의 박탈, 모함 때문에 그의 명예는 먹칠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이 모든 박탈과 불행이 “남은 자를 구하고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지금 불행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뜻에 귀 기울어야만 할 것입니다.

 

나가는 말/마무리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과 하나님의 섭리와 요셉의 두 번째 감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시기와 원망이라는 첫 번째 감정으로 요셉을 버렸지만, 요셉은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하나님이 주신 두 번째의 감정으로 이를 극복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관대하시고, 우리의 생각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시며,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좌절과 불행은 다음의 기도로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당신께서 이룰 수 있는 일이 더 많음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도구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야 사용됩니다. 좋은 도구는 주인을 헤치지 않으며, 주인의 말에 순종합니다. 좌절과 시련은 내가 하나님의 도구란 사실에서 도망치게 하거나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게 합니다.

우리는 분노와 두려움과 같은 첫 번째 감정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저와 여러분을 속일지라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섭리 안에서 두 번째 감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감정은 믿음이고, 겸허인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불행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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