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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지혜로운 사람(36:1~7) 

들어가는 말 

 한 목사님이 고향 땅을 등지고 다른 곳으로 임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님이 섬기는 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어머니를 마음껏 맡길 수 있는 후임목사를 선택하는 일 때문에 그랬습니다. 

 장로님도 없는 작은 교회이긴 하지만 매일 기도하며, 성도들을 사랑하며, 어머니의 영혼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양육할 수 있는 목사님을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임지로 가게 된 목사님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시더랍니다. “너는 어떤 마음으로 다음 임지에서 목회를 하겠느냐?” 

 그때 목사님은 깨달았다고 합니다. 자기 어머니를 위한 나의 태도나 성도들과 하나님의 요구 역시 다르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입니다. 

목사님은 말합니다. “제 어머님을 대하듯이 성도들을 먹이고, 보살피겠습니다!”  

우리도 성심을 다하는 마음을 가지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성심 

 오늘 이야기는 모세가 성소를 만들기 위해 기술자에게 일을 맡기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이중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지혜와 총명과 지식이 충만한 사람으로서 본문 2절에서는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혜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화) 한 농촌에 선교팀이 봉사를 나왔다가 특별히 기술도 배우지 않은 한 할머님이 능숙하게 안마며 통증을 다루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고 합니다. 할머니 어디서 이런 기술을 배우셨어요. 그러자. “기술은 무슨.. 매일 밤 허리 아픈 영감을 주무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거지.”  

할머니는 매일 밤 고생스럽게 농사일을 하고 신음하고 누운 남편의 등이며 다리를 정성을 다해 주물렀던 것입니다. 어디를 만져야 시원해하고, 어디에 있는 근육이 상했는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알게 된 것이죠 

  

 마음이 있으면 길은 통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지 못하면 좋은 기술자가 될 수 없듯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마음을 다해 일할 때 지혜의 문도 열리게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 이야기 역시 하나님의 회막을 위해 예물을 모으고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심으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자청하여 성심을 다해 하나님의 회막을 짓는데 최선을 다하게 된 것이죠. 놀라운 변화입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니 모든 것이 형통해지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뭔가가.. 억센 이스라엘로 하여금 큰 변화를 이끌어 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저 얻어지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큰 감격과 은혜를 경험하지 않는 한 이들이 이렇게 쉽게 변화될 수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앞선 내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34장 이전의 내용은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숭배로 큰 죄를 짓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첫째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깨트리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하나님께 상처를 냈던 족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듯.. 이스라엘 자손들은 유래 없는 택함을 받았습니다. 애굽 땅에서 광야로 나왔고,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들을 보호받았으며, 물이 없을 때는 반석에서 물을 마시고,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 되돌려 드린 것은 불순종과 불신앙이었음을 돌아볼 때.. 과연 이처럼 지대한 사랑을 받고도 이처럼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할 수 있을까 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보처럼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들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쉬고) 

 그야말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크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죽어 마땅한 자신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다시 언약을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어 아는 일이라고는 죄 짓는 것 밖에 없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 앞에 감동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34:7에 말씀입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언약 때문에. 하나님이 세운 약속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어떤 죄악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용서가 얼마나 크길래 회막 건설의 헌신이 가능할까 

분명 이때의 헌신은 내게서 나온 자선이 아닙니다. 이때의 예물 역시 남은 것을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여호와 하나님께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을 원하는 자만이 이와 같이 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쉬고) 

 그런데 과연 사람이 그 은혜에만 감격해서 이와 같은 일을 행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할까요? 아마도 감격뿐 아니라 뭔가 마음으로 힘써 지킬만한 근거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아까 읽은 출34:7 하반부 말씀입니다.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2.마음을 지키는 사람 

 신앙생활 가운데 깨달아 져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내 욕심과 혈기 대로 살아온 것이 바라봐져야 합니다. 살아보겠다고 가족들에게 함부로 대했던 자신이 보여야 합니다. 자녀가 불행해지고, 이 땅에 불의가 가득한 것이 모두 나의 죄때문에 그런 것임을 보여지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어렵게 느끼기 시작합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잘 지켜야 하는구나! 내게 주신 마음을 애써 지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구나 

마찬가지로 내게 주신 가족과 교회를 힘써 지키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구나. 내게 주신 건강과 믿음을 잘 가꿔가는 것이 너무나 귀한 일이구나 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많은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의 자리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전히 마음으로 승복하지 못한 내 생각. 내 혈기가 가득합니다. 돌아보면 내 탓인 경우도 많지만 다른 사람을 힐난하며, 돌아보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벌을 면제하지는 않고 자신들의 악행을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이제부터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야 이 보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란 질문을 남겼을 것입니다.” 

 삶의 형통함이 말라 하나님을 애써 부를 때 우리가 하나님, 어떻게 해야 이 쓴 잔을 제게서 치워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처럼 철들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 이제는 그 은혜를 잘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빼앗을 때보다 지킬만한 것을 지킬 때 더 큰 힘이 나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지킬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또 그 동안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해 잃어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그 잃어버린 것을 찾고 싶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다해 자신에 대한 회개와 성찰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원망만 있지 회개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늘 받은 은혜와 마음을 지키는데 실패했었습니다. 조금만 힘이 들어도 그랬고, 때만 있으면 하나님을 배신했으며, 지금 자기 손에 쥔 하나님의 은혜를 헌신짝처럼 여기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내 손에 쥔 것그 은혜가, 그 사랑이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임을 깨닫는데 너무 많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돌아보니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 당연스럽게 생각하고, 제대로 부모님께 감사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내의 사랑에 대해서도 늘 그런 것처럼 생각하며 아내의 사랑을 얻기 위해 더욱 힘써 마음을 키우는 일에 게을렀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도 처음 태어난 날 그 감격에도 불구하고, 때론 화를 참지 못해 매를 댄 적도 있습니다 

 사실은 내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지키지 못하고 죄 가운데로 살아왔던 것인데 언제나 환경들을 원망하는데 바빠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할 때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 얼마나 돌아보십니까? 또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성심을 다해 다가서십니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기도를 해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또는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강요하기 위해 떼를 쓴 적은 없으십니까?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란 주신 은혜를 가슴 깊이 새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란 성심을 다해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정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야말로 마음이 지혜로우면 비로소 자발적인 헌신과 감사와 은혜가 우리 삶을 주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술자인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이 은혜를 기억하며, 똑같이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은 사람과 이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사람을 청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을 세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은혜를 마음에 깊이 새길 줄 아는 사람, 새긴 것을 굳게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 것입니다. 추워지는 계절에 여러분의 가슴을 마음이 지혜로운 따뜻한 심령으로 채워가시는 모두 되시길 바랍니다. ..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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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만나는 기도(히4:12~16)

들어가는 말

자신을 만나기 위한 노력들이 적지 않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노부부에게서도, 취업을 앞둔 청년들에게서도, 갓 입사한 회사원이든 대부분 자신의 삶에 부딪친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자신을 아는 힘’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은 꽤 괜찮은 노력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부부간의 성격차이라든지 다툼들을 해결하는 대안들은 부끄럽게도 드라마에서 하는 사랑과 전쟁이란 프로그램이 전부였다 싶을 정도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치료하는 데에 매우 무관심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사회가 복잡해지고, 자신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자신의 내면과 인격을 살피는’ 돌봄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잘 살기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인생의 문제를 깨닫기

우리는 생각보다 칭찬에 인색합니다. 제 자신도 그런 편입니다만.. 아이가 뭔가를 하고 싶어할 때 그대로 두기보다,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아이가 타고난 좋은 성품이나 능력도 부모들에 의해서 많이 잘려나가는 경우도 적지가 않습니다. 예전에 제 모습을 봐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권위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거나 삶 전체에 대해 매우 비관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정적인 생각이 끊이지 않은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실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제게는 한 가지 과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내 문제가 뭘까? 왜 난 늘 화가 나 있는 걸까?”

 

어제는 청년들과 함께 애니어그램이라는 심리프로그램을 했습니다. 총 9가지 유형의 성격으로 나눠 사람의 성품을 알아보는 이 프로그램은 2000년 동안 교회의 지도자를 훈련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은밀히 사용되다가 현대에 이르러 전문화되어 교회와 회사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본래 나의 성품과 장점을 알아가도록 돕고, 동시에 꺽인 내 장점들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익함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원만하게 정상 범위 내에서 골고루 성향이 분포되는게 좋습니다만, 어떤 경우는 거의 대부분 능력이 확 꺽여있거나, 한 능력만 월등하게 높고, 나머진 다 평균 아래로 꺽인 경우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든 원인은 어린 시절 ‘부모님들에 의해 억지로 제재를 당한 흔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여자아이들일 경우 어머님의 영향으로 억제를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반대로 정상적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지 못한 경우도 또 현재 좋지 않은 인간관계 때문에 능력이 꺽여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날개가 꺽인 경우이죠.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긍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꺽인 채로 살아갑니다. 심지어 그대로 사는 것에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한 체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단 번에 표시가 나기 시작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방법이 삶을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자신과 삶에 대해 건강하게 마주하지 않은 사람들이 택하는 방법이 그렇습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결과만을 얻어내면 그만이라는 지독한 이기심이 그 삶을 병들게 하기 때문이죠.

같이 가는 법도 모르고 다른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국 똑같은 실패만을 반복할 뿐.. 점차 삶이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얼룩지고, 진짜 삶은 약해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욱 슬픈 것은.. 자신의 삶이 거짓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인격이 무너지는 것에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변의 큰 저항에 부딪치지 않는 한 이런 사람을 막을 사람은 없게 되는 것이죠.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지만, 어쩌면 암보다 더 우리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의 포기에 있음을 늘 살펴야만 할 것입니다.

 

2. 죄의 자복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믿음

오늘 본문 12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모든 것을 관찰하도록 하고, 그 체질을 풀어내는데 힘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 사람은 말씀을 들으므로, 그 체질에 큰 변화를 얻습니다.

「어느 예배당에 남편과 심하게 다투고 예배를 보러 온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필 그날 설교 주제는 “용서하라”였다고 합니다. 설교시간 내내 그 여집사님은 마음이 불편했다고 합니다. 마음에 이상하리만치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그래도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이 오고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축도도 받기 전에 예배당을 박차고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은 도무지 마음이 무거워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같은 설교를 듣고 그 집사님은 찔림을 얻어 반응했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설교 말씀을 가장 잘 들은 사람일까요? (쉬고)

바로 마음에 찔림을 얻은 사람입니다. 내 기질과 성품을 심하게 뒤틀림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성정과 부딪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깊은 숨으로 화를 가라앉히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도전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속사람이 찔리거나 그렇게 살기로 한 번 더 다짐해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산 같은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이 복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아멘으로 응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형통케 되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화나 있는 자신과 화해하게 되고, 화나 있는 하나님과도 화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금은보화의 구슬이 서말이라도 그것을 믿음으로 내가 꿰지 않으면, 그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과 삶을 주장하도록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마음을 여는 훈련을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13절은 말합니다.“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기도할 수 있을 때, 순종할 수 있을 때. 내가 아버지의 말씀 앞에 벗는 것이 나중의 심판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보다 나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지금 내가 행복할 수 없다면, 어떤 구원의 복음도 내게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부끄러워 감히 말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 앞에 쌓아 올린 가면과 옹벽부터 허물어야 빛 되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도 흘러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유명인들의 독방 수감 생활을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대형 TV에 칸막이가 달린 화장실과 샤워시설. 다른 일반 수감자에 비하면 분명 호화시설에 불과하지만, 죄를 짓고 감옥에 가서도 그런 것들을 누리려는 그 위인들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야말로 감옥에 가서도 반성할 기회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에서 나올 수 있는 ‘광야’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아무런 삶의 도전이 되지 않고 있다면, 그가 쌓아 올리는 삶 역시 그 호화스런 감옥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가 만든 안전, 편리함이 하나님의 개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강단에 설 때마다 하나님 앞에 주의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합니다. 아무리 진리를 향한 노력을 준비했다 하더라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두 담아낼 수 없다는 한계와 자책감 때문입니다. ”

말씀을 전하는 중에 나의 욕심과 무지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용서를 비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는 담대함이 아니라, 용서의 사랑을 공급하셨습니다. 죄의 용서는 죄를 짓기 위한 담대함이 아니라, 사랑을 얻기 위한 그래서 내가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한 힘이 되주기 때문입니다.

(/쉬고)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힘입어 날마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야만 하는 줄로 믿습니다. 먼저 큰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 때문에 감히 하나님 앞에 자유한 마음을 지키지 못합니다.

아마도 한 번도 용서나 지지를 받아보지 못한 아이처럼.. 창조주 되시는 아버지 앞에서도 우물쭈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마다 새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 있는 나를 죄 없는 자녀와 같이 여기시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들어오기 전의 나는 그 안에 성령이 없으므로, 말씀이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집착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임에도 한 번도 내가 틀리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니, 다른 사람을 용납할 마음도 적기 마련입니다. 집착은 또 다른 내 신앙이 되어서, 영원한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전환)그러나 신앙은 긍휼을 사모하는 마음인 줄로 믿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일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날 꺼리를 만들어 감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통나무와 같이 뻣뻣한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 부드러워집니다. 말씀과 영이신 하나님을 통해 날마다 변해가는 자신을 세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신을 벌거벗겨 내려 놓은

것만큼 자신이 만들어져 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자신을 만나는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 지금 내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 사람인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사람인지 깨달을 때 비로소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권면의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래만을 사는 사람은 오늘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감사하는 사람을 내일로 감사를 미룬 사람이 결단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다듬어지고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감사가 삶을 변화시키고,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늘도 은혜의 보좌로 나가는 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세상의 죄와 절망과 저주를 이겨낼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잡아 누리는 것이지. 비굴하게 주문을 외듯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시되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받아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 긍휼하심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긍휼을 입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오늘 감사하지 할 수 없다면 어쩌면 오늘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자신을 깨달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과 몸과 혼을 쪼개도록 하나님 앞에 앉아보시길 바랍니다.

 

은혜 베풀 자에게만 결국 은혜를 베푸시는 원리를 가슴 깊이 받아들이시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고, 기도하는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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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위에 세우는 교회

위트 한 마디.. 노부부의 대화(최근에 아내가 자신의 말을 잘 듣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인 남편이 아내의 청력을 테스트하고자 큰 소리로 저녁식사가 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현관 앞에서 “여보 저녁 뭐야?” 다음에는 주방 앞에서 “저녁 뭐냐니까?” 그래도 아내가 아무런 대꾸가 없자.. 가슴이 아픈 남편은 걱정스럽게 아내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묻습니다. 여보, 저녁식사가 뭐냐니까? 그러자. 아내는 고개를 갑자기 휙 돌리며 쏘아 붙이듯이 말했습니다. “내가 칼국수라고 몇 번을 말했어.”

여러분은 잘 들으시고, 잘 말씀하고 계시는지요? 우리 옆에 분과 인사하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1. 무엇이 자유인인가?

우리 속담에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란 말이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도 사람이 태생적으로 물려받는 것이 30%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노력과 환경에 따라 인격과 인생이 정해진다는 결과가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내 말에 거한다는 의미가 그렇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내가 누구를 믿고 따르냐에 따라 내 삶이 새롭게 변화하게 될 것이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되는데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새로운 삶을 선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에 유대인들은 의아하게 예수님을 향해 대꾸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자유”에 관한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한 번도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유대인에게 종이 된다는 것은 모욕적인 일입니다. 더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 종이라는 단어는 지금껏 자신들이 외세에 한 번도 굴복하지 않았던 점을 미뤄보아 매우 모역적인 말이 될 것입니다. 이들은 항상 외세에 저항하는 거칠고 다루기 힘든 민족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런 자부심으로 살게 된 근거는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유대인들의 조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밤하늘의 별들과 같이 무수한 자손들을 주실 것이란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룩한 언약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떠돌이었던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자손들도 언약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더럼대학교수인 제임스 던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유대인은 마땅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임을 지키고자 했던 유대인들의 노력은 나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경건하고 의로운 대다가 로마를 비롯한 주변 나라들이 보기엔 다루기 힘든 매우 피곤한 나라가 분명했던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유대인들에게 잘했다고칭찬하기보다“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환기)자 우선, 여기 부모님들이 많으십니다. 이 중에 자녀들과 함께 교회에 출석하시는 분만 손들어 보시겠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 분들 중에서 자녀의 믿음이 나보다 낫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만 손을 다시 손들어 주십시오. ^^ (믿음으로 모두 그리 될 줄로 믿고 두 손 번쩍 들고 아멘해볼까요?)

 

성경에는 처음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으로 백성이 된 조상들이 그 은혜를 갚고자 자청하여 ‘하나님의 의’인 계명과 율법을 짐 지고자 했던 것과 달리 그 다음 세대들은 갈수록 본래 그 믿음에서 벗어나 고집불통이 되거나 외식덩어리에 율법주의자가 되거나 심지어 이런 율법 준수를 통해 로마제국과 부패한 유대왕정을 압박하는 정치세력이 되고자 노력한 사람들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남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나중엔 그 쓴 물로 인해 우울증이나 또 다른 죄를 짓게 되는 경우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줄곧 실패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고,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마땅히 세상에서도 승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실패와 좌절의 굴레에서 나오고자 하여도 도저히 나올 수 없을 만큼 앉은뱅이와 중풍환자처럼 되어 버린 유대인들의 상태를 살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느 유대인의 관심과 달리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중심에 있는 문제점을 바라보도록 다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결국 죄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예전에 읽은 어느 이야기입니다. 괴물을 사냥하는 한 사냥꾼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동료들이 끝내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못해 아니 극복하지 못해서 늘 그 괴물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괴물이 되기로 했습니다. 괴물이 되기는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자신의 동료들을 헤친 나쁜 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괴물을 미워했고, 이기기 위해 싸움을 연습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사냥꾼이 괴물을 사냥했을 땐 이미 자신도 괴물이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냥꾼에 의해 그 사냥꾼 역시 죽임을 맞이하게 되죠.

 

디모데전서3장6절 말씀입니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성경은 이미 여러 번.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지는 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거룩한 자부심이 어느덧 자신들을 가두는 올무가 되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끼리도 정죄가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를 성별해 하나님 앞에 정결한 삶을 드리고자 했던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처음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는지 잊었던 것입니다.

은총으로 시작한 것을 잊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그네요. 티끌이었던 히브리 백성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운 것을 잊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늘 이 여기에서 실패합니다. 모든 것이 내가 이룬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이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세상을 대적한다고 하면서 세상보다 더 세상 같은 자신을 만나기도 합니다.

신호등에서 빨간불은 가지 말라는 신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은총’이 아닌 자기구별의 정죄와 율법으로 차도를 건너가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매번 실패합니다. 로마제국에 실패했습니다. 마음으로 수많은 죄를 짓습니다. 도무지 누구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강퍅해지고, 고집스럽게 자기들끼리 더욱 더 견고해지기 원했습니다.

나는 내 아들을 죽인 로마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에 저 이방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끼리 뭉쳐서 반드시 해방을 이뤄야만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우리 민족이 이렇게 될 일이 없을 것이요!”

심각한 강박과 죄의식, 좌절과 정치적 불안감만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실질적인 ‘공중권세 잡은 자’였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예루살렘의 빌라도 총독과 갈릴리지역의 안디바 헤롯왕 역시 그 권세 잡은 자의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쉬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내 것으로 삼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우리도 이 공중권세 잡은 자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이스라엘의 앞길은 막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니 여전히 우리도 자기 의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서 발견하신 것입니다. 그 막힌 담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죄로 막힌 이 땅의 황무함을 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것은 없으니 하나도 없습니다. 언제나 통치하는 자와 백성들은 있었고, 언제든지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은 있었고, 반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이 땅 위에서 벌어지는 현실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가득한 이 땅을 비집고 하늘이 접혀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척에서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을 돌보심으로 오히려 멀리 있는 줄만 알았던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있음을 우리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자라야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종의 영이 아니라 아들의 영으로 살게 됨을 말합니다.

아들은 종과 같이 눌려 살지 않고, 자유와 기쁨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입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선택됨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해야 함’을 말하게 됩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속하시길 바랍니다. 진정한 종교개혁이란 또 우리 삶의 변화는 예수님께 속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예수 위에 세우는 날마나 부흥하고 건강하여 지는 금구교회가 되시길 소원합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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