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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4:1~13(삶의 맛을 내는 세 가지)

 

들어가는 말

우리 삶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소스가 들어가야 맛이 있습니다.

 

1.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 내가 경험한 시험 - 가족 건사..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의 확인을 위해 늘 이를 극복하길 원하신다.

 

첫째는 돌들을 떡으로 바꾸는 행위를 이겨낸 흔적입니다. 생명이 없는 길인 줄 뻔히 알면서 옳은 길 인 것처럼 속이거나, 비생명적인 물질 때문에 자신의 삶을 낭비하는 일을 극복한 흔적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의 양식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2. 하나님께 경배하고 섬기야 합니다.

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예배(경배와 섬김)

 

둘째는 삶이 없는 허상과 세상 기준을 극복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모든 권세를 주리라 예수님을 유혹할 때 주님의 대답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아브라함은 익숙함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을 섬기므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3. 하나님 아닌 다른 허상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가. 무엇으로 만족하는가?(물질, 직위?)

 

마지막은 교만으로부터 자유한 흔적이 있습니까? 거짓은 자신이 높은 곳에 올라가야 안전하다고 속입니다. 심지어 그것들이 나를 아래에서 안전하게 받아낼 거라 착각하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높임 받을 분이십니다. 이 말은 스스로 겸손하신 분이라 우리가 곧잘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늘 하나님을 높이는 훈련이 되어야 이와 같은 시험에서 건짐 받을 수 있습니다.

 

나가는 말

신앙생활은 말 그대로 생활신앙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스토리,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맛이 들어간 삶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과 동행한 이야기가 만들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이 세 맛을 잊지 않고, 만들어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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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41~51 (거짓의 반대말은 삶입니다.)

들어가는 말

날씨가 추워지면 어릴 때 어머님이 아랫목에서 꺼내주시던 밥이 생각납니다. 전기밥통이 있어도, 굳이 한 그릇 아랫목에 묶혀 두신 것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자. 늘 아들을 염두하고 있다는 증거도 되니, 날씨는 추웠지만, 집에 가는 일이 늘 행복했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밥과 같은 사람이 됩시다.” 라는 말에는 이런 사랑과 정성이 들어 있는 말이라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좋아하는 말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밥과 같은 사람이십니까? 아니면 법과 같은 사람입니까? 밥은 허기진 사람의 뱃속을 든든하게 하고, 법은 요즘 세태에 허기진 사람의 겉옷마저 벗기는 경우가 많으니 법보다 밥이 되시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도 법보다 밥이 되기를 원했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1. 하늘에서 내려온 떡

떡은 분명 먹는 것입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생각하시면 좋겠지만, 여기서 번역된 떡은 아마도 유대인들이 주로 먹는 주식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매일 매일 먹어야 하는 것. 새로울 것이 없다고 끊으면 굶어 죽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주식이고, 밥일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예수님의 설명을 잘 못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주후 100년 경에는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인육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매주 지하무덤에 모여, 성만찬를 하는데 그때 사람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피해 매우 비밀스럽게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배 중 나누는 살과 피가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의미함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헤프닝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만찬은 늘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좋은 루머가 되곤 했습니다. 사람의 인육을 먹고 마시는 자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오해를 받았던 성례전이었던 것입니다.

아니라 다를까. 오늘 본문에도 유대인들이 모여 예수님에 관해 수군거립니다. 이유는 그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같이 평범한 사람이며, 아버지가 요셉이며 어머니가 마리아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언행은 예수님을 미친 사람이거나 사이비 교주로 오해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2. 당시의 종교흐름

그러나 여기서 잠깐.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예배전통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열심을 다해 유대의 왕들은 성전을 세우고, 이를 관리하는데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때가 지나고, 남과 북의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한 후에 다시 고향에 돌아왔을 때 이들은 예루살렘을 지키는 성벽조차 짓기가 버거웠습니다. 왜냐면 주변국의 시기와 견제가 매우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느혜미야와 에스라와 같은 지도자들을 통해 성전과 예루살렘은 다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점차 제사문화는 다른 식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짐승을 잡고, 성전에 모여 드리던 예식에서 점차 두루마기에 적힌 말씀을 듣고, 외우고, 실천하는 생활신앙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도전은 물론 사제그룹이 아닌 평신도 신앙운동가들인 바리새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도 했고, 어쨌든 유대교의 종교문화는 짐승을 드려 예배를 드리던 문화에서 점차 말씀 중심의 문화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약에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제사의 마침으로 설명함으로써 더 이상의 희생제사로서의 종교가 아닌 말씀을 듣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종교로의 변화를 잘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순종이 없는 죽은 제사가 아니라, 바울이 말한 대로 순종이 있는 산제사로서의 생활신앙으로 기독교가 출발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편적인 교회들이 따르고 있는 성만찬례와 세례와 같은 예식들은 그 상징적인 의미들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늘 말씀 안에서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먹고 입는 생활 신앙이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바로 당시 성전에서 회당중심으로 종교문화가 바뀌어 가는 시점에서 성전 안이 아닌 성전 밖에서 죄사함을 선포하시고, 또 말씀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도를 살아갈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셨음을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가 있어야 예수님이 무조건 성전문화를 배척하거나 늘 주류사회에 저항하는 무정부주의자 정도로 이해하는 실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예배와 살아 있는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3. 미움을 받은 예수

물론 이와 같은 태도는 기존의 성전 중심의 질서에 반격을 가하는 태도입니다. 마치 말씀이 없이 제사만 남은 로마교회의 미사에 저항하여, 마틴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벌인 개혁운동과 다름이 없는 것이죠.

물론 이와 같은 행동은 분명히 미움을 받습니다. 단순히 기득권의 반감이 문제가 아니라 누구든지 잠들어 있거나 눈을 감아버린 세대를 향해 깨어나라 눈을 떠라 라고 말하면 반감을 얻게 되는 것이 자연 이치이기 때문이겠죠.

 

예를 들어 어제까지 카톨릭 사제였던 마틴 루터가 갑자기 교회의 미사 곧 제사를 드리지 않고, 그것이 옳지 못하다고 하며, 말씀 안에서 살아 있는 생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삶에 아무런 기쁨이나 구원의 감격을 주지 못하는 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그 기쁨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 참 예배의 특징이라고 보았던 것이죠. 물론 이와 같은 변화를 좋아할 만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어느 시대에든 깨어 있는 다는 것은 항상 오해와 도전에 노출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하물며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유대인의 입자에서 그는 ‘이단’입니다. 말할 가치도 없는 신성모독자이며, 유대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악한이 분명한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을 어떤 선각자나 성인으로 봐서도 곤란할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분명 어떤 진보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이유나 또 자신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 늘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사실과 아버지가 일하시므로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신 분이시고, 그분의 방향성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요셉의 아들 예수(스펙과 스토리)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오직 하늘 아버지께 방향을 두고 계실 때 유대인들이 말합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런데 어찌하여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국내에는 50분이 넘는 자칭 선생이라 불리는 예수님이 계신데(웃음) 이들 이단종파에서도 자신들의 교주를 설명할 때, 이 본문을 인용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요셉의 아들, 곧 사람의 아들이었지만 생명의 양식인 떡이 되셨고, 우리는 이 영의 양식인 말씀을 우리 교주님을 통해 먹게 되었음으로 당연히 그 선생님이 예수님이 아니겠느냐 라는 식이죠. 그러나 이들 이단종파는 성경에서 일부 단락들을 빼내어, 서로 짝을 맞추는 식으로 교리를 만들고, 사람들을 세뇌해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라고 믿게 한 것이지. 절대로 그들이 재림주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늘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2000년에 오신 역사적 예수님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라고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결론을 말씀드리면 그것은 “삶과 허상의 차입니다. 이야기와 거짓교리”의 차이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관해 교리적으로 짜깁기 한 내용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선진국의 대학에서는 입학생들에게 ‘에세이’라는 것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에세이는 그야말로 수필입니다. 자신의 삶의 스토리를 적어오라는 것이죠. 바로 당신의 삶의 스토리가 있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요구를 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부모의 요구나 오직 대학입시만을 위해 조작된 삶”을 살아 왔는지.. 아니면 자신의 삶을 충분히 지배하고, 건강하게 꾸려가고 있을 수 있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은 뭐냐? 너는 네 목소리를 갖고 있느냐? 네 생각이 뭐냐? 너는 성인답게 소신껏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회 지도자로서 얼마나 삶의 다양성과 이야기들을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조작된 삶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스토리를 너는 갖고 있느냐’입니다.

*복음서에는 풍부한 예수님의 스토리가 들어 있습니다. 잉태에서부터 죽고 부활할 때까지 예수님의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아들 예수를 향한 유대인들의 수군거림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본문 43~44절 “너희는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그야말로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 그 “밥된 몸 살이”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야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영의 양식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토리가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스펙이 아니었습니다. 허상을 만들고, 그것이 참 살이라고 포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마귀에서 시험을 당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시고 살아낸 “삶”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삶이란 이야기가 있는 삶인 것입니다.

좋은 학교나 부모를 만나지 않아도 ‘스토리’가 있으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끈 삶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하나님을 만난 흔적이 있습니까? 삶의 이야기가 있으십니까?

오직 이 땅에서 손에 쥔 것만을 보고 사는 사람에게 ‘스토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세상에서 잘 살아낸 ‘스펙’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마치 이단종파들이 성경에서 거짓교리라는 스펙으로 자신들의 무덤을 키워나가듯이.. 거짓된 삶과 양심은 거짓된 스펙으로 자신을 속이고, 또 이것이 옳다 말하며, 다른 사람들도 사망에 빠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므로 알게 된 ‘하나님의 이야기, 하나님의 삶’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 된 사건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의 양식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떡을 드시고, 예수님을 옷 입으시길 바랍니다. 자꾸 실험해보고 도전해보시길 바랍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있으십니까? 그야말로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릴 이야기를 갖고 계십니까? 아니면 예수를 이용해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채우려고 하십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먼저 내주심으로 ‘밥이 되는 삶’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말그대로 생활신앙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스토리,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인내했더니 축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좋습니다. 남에게 밥이 되어 주었더니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더 큰 밥이 되도록 축복하셨다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밥되신 예수님을 먹고, 그 맛이 어떠한지.. 그 향이 어떠한지.. 그 영양이 어떠한지.. 내 몸과 삶에 어떤 변화를 미치는지에 대해 마음껏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야말로 여러분의 삶의 스토리로 전도하시고, 스토리로 하나님을 아는 향기를 내시는 맛있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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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삼겹줄 신앙(시편16)

 

들어가는 말

 

마리안느 머스그로브는 한국에도 소개된 유명한 어린이 동화작가입니다. 그녀의 동화가 유명한 이유는 어린아이들의 인성과 감성을 잘 발달시켜주는 내용과 그림들 덕분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그녀의 신간 “걱정을 걸어두는 나무”는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가 근심과 걱정이 있을 때는 누구에게든지 말해야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매일 잠자기 전 걱정 나무의 가지에 앉아 있는 동물들에게 하루 동안 있었던 고민들을 털어 놓고 잘 돌봐 달라고 자신의 걱정들을 가지에 걸어놓습니다. 그러면 걱정 나무의 동물들은 소녀의 고민을 묵묵히 들어주고, 신기하게도 이 과정에서 소녀는 그 자체만으로도 용기와 자신감을 얻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우리의 고민과 걱정거리를 내려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고민을 털어 놓으십니까? 그리고 무엇을 통해 용기와 자신감을 얻고 계십니까? 오늘 다윗의 신앙을 통해 우리가 누구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얻어 가며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는 귀한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1. 다윗의 보호청원

오늘 읽은 다윗의 시는 특별히 믹담이란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믹담이란 뜻 자체는 후대에 와서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떤 감정으로 이와 같은 시를 노래했을까 라는 것을 상상해보면 우리는 이 믹담의 의미도 알게 될 것 입니다.

다윗은 1절에서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합니다. 그는 평생을 싸움터에서 살아왔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진실함이 드러나는 때가 언제일까요? 도움을 구할 때입니다. 살 방향을 구할 때입니다. 살고자 고개를 숙여본 적이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고 자신의 꾀로 어려움을 이겨낸 사람보다 오히려 진실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시련을 주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뻣뻣하게 굳은 목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생각으로 인생을 풀어나가려는 완고함 때문에 곧잘 하나님을 실망시킵니다. 그야말로 자신이 아니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란 어쩌면 연약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란 오히려 강한 사람들입니다. 끝내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손을 벌려도 그 손을 뿌리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강한 것은 나중에 더 큰 고난으로 아픔을 당할 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 부드러움은 나중에 오히려 더 큰 어려움도 이겨낼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믹담의 비밀은 다름 아닌 주린 심정이오. 부드러워지다 못해 허물어진 심정으로 드리는 노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신앙의 비밀이 담겨 있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누리지 못할 기도입니다. 마음자세입니다. 인간으로서 드릴 수 있는 가장 진실한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 반드시 이와 같은 심정으로 기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가 하나님께 흐느끼며 기도하듯이.. 자식을 얻지 못해 슬피 울던 야곱의 아내 라헬의 기도와 같이..

믿음은 내 심정은 주리도록 만들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대는 더욱 커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다윗은 자신은 비우고, 하나님으로 삶을 채울 줄 아는 기도자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리 기도해야 합니다)

 

2.

본문 2~5절은 다윗이 하나님께 자신의 믿음을 선언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며, 어른이 되어 갑니다. 사람도 믿을 수 없고, 사랑도 믿을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정을 위해 사랑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 전부를 던져본 사람만이 ‘믿을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믿을 것이 없음을 깨달아감을 말합니다. 다윗은 믿었던 신하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다윗은 이용당했습니다. 왕이면서도 이와 같은 불의를 참아야 하는 때가 많았고, 더구나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왕국을 빼앗기기까지 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다윗과 같이 사랑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과 백성들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정당하게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압살롬을 피해 다윗이 성을 버리고 도망쳤을 때 그를 따라나섰던 충성을 맹세한 백성들은 어려움을 당하자 다시 다윗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다윗은 다시 ‘무엇도 믿을 수 없는 상태’에 놓입니다. 그때 다윗은 기도합니다. 주님..주님밖에 나의 복이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오히려 하늘 아래 자신이 택한 성도들이 자신의 기쁨임을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깨닫습니다.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모든 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믿음과 사랑을 경험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통해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지난 상처로 “믿을 수 없는” 상태가 된 내가 이제는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나음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사람으로 상처를 받았거든 오히려 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인간을 만드신 후 주님처럼 후회를 하신 분이 없으며, 반대로 인간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도록 허락하신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신 분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을 것을 선언함으로 도리어 하나님께 믿음을 얻은 것입니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의 한 겹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 겹줄만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어서 6~7절에서 지금 현재의 상황에 대해 ‘믿음 안에서’ 만족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탈무드는 이 구절에 대해 다윗이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했겠는가에 대해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다윗은 “사울의 병사들에게 목숨을 위협을 피해 밤새도록 도망치다 작은 동굴에 몸을 숨기고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깬 상황에서 이와 같은 노래를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목숨의 위협을 느껴 밤새 도망다니다가 아주 작은 동굴에 숨어 그나마 잠이 들었다 깼을 때.. 놀랍게도 그는 원수들에게 발각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작은 동굴의 입구가 ‘거미줄’로 온통 쳐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수들도 거미줄을 보고는 그를 찾지 못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6절의 아름다운 구역, 아름다운 기업이란 그에게 허락된 매우 작은 피난처에 불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도무지 감사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가운데..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 있던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그곳이 바로 아름다운 기업이요 그곳이 바로 아름다운 구역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환경을 통해 다윗에게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현재를 초월할 수 있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함’이란 믿음의 두 번째 한 겹줄을 손에 쥐게 된 것입니다.

/쉬고

그러나 두 겹줄도 끊어지기 십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다윗의 삶에 힘과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세 겹줄을 마저 손에 쥐어 주시기 위해 그에게 소망과 기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경험합니다. 처음 자기 직업을 가지고 열의를 가지고 해나가던 사람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심각한 ‘직업적 우울증’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우울증을 경험합니다. 자신의 인생이 전부 무의미한 것처럼..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닌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아예 포기해서는 곤란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삶을 보다 건강하고 생명이 넘치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이런 시험을 통과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경험한 일은 오히려 사울 왕에게서 도망쳐 사는 삶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일을 수도 없이 경험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헤어지도록 하셨는가요? 사랑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는 바로 실연의 아픔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사업에 성공할만한 확신을 주셨는데.. 왜 잘 되지 않도록 내버려 두셨는가요? 성공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는 바로 실패의 아픔을 선물하시기도 하십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살아야 우리가 기쁨과 생명의 길을 걷게 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집착’에 허비하곤 합니다. 내가 사랑인 줄 안 것도 실은 ‘집착’입니다. 내가 신앙인 줄 안 것도 실은 '집착‘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성공이라고 안 것도 실은 하나님께서 하나도 기뻐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게 가장 좋은 방법과 필요로 우리를 인도하신 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약속이 없는 백성은 망하듯이.. 소망이 없는 백성도 곧잘 믿음을 잃고, 삶을 집착하다가 낭비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거야.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실 거야.” 그야말로 하나님 한 분만으로 생명과 기쁨을 노래하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면 더 이상 삶을 집착하지 않고, 삶을 감사와 희락으로 노래하게 됩니다.

다윗은 집착으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그가 왕이 되기 위해 집착하다.. 인생을 낭비했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고, 하나님과 함께 그 뜻을 이뤄드렸습니다. 따라서 도저히 구원을 바랄 수 없는 때에도 그는 도리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지금의 삶에 집착을 초월하여 소망과 감사를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들의 불행에 주목한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주변의 어려움과 불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인내하며 신앙을 지킨 성도들의 감사와 소망에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미래에 대한 구원의 확신으로 오늘을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희락’의 세 번 째 한 겹줄을 손에 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한 겹줄, 두 겹줄, 세 겹줄의 믿음의 동아줄을 단단히 붙잡은 사람인 것입니다.

<호소>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신 분이 있다면 그분은 이제 ‘한 겹줄’의 믿음의 끈을 붙잡으신 겁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감사함과 만족함을 배우게 되었다면 그분은 분명 ‘두 겹줄’의 신앙을 붙잡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소망과 희락의 세 번째 줄을 붙잡으셨다면 이런 분은 다윗과 같은 믿음의 동아줄을 손에 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믹담의 비밀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동아줄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이 동아줄을 붙잡아야 .. 하나님께로부터 삶에 대한 용기와 감사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삶의 호흡이 길어집니다. 여유가 생깁니다. 거짓을 멀리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죽음을 거치더라도 끝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의 삶의 구역과 일터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구역과 기관들은 어떤지요? 아직 한 겹줄도 잡지 못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답답하시지는 않습니까?

내게 주어진 삶의 구역에 여러분은 얼마나 만족하고 감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욕심으로 살지 않고 소망 가운데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인생이 되기로 결단한 분들마다 삼겹줄의 믿음과 은혜가 마르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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