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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바꾸는 비밀(요2:1~11)

 

들어가는 말

카톨릭교회를 방문해보면, 좌우에 마리아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에게 ‘마리아신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묻는다면, 대부분 그렇다고 말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아니었음에도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으로 기적을 베푸는 내용이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도 어머니 마리아의 전언이 아들 예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지금도 마리아 상 앞에서 중보의 기도를 요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셨습니다. 또 어린 나이에 동정 잉태한 아들을 가진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여느 보통의 자녀들보다 더욱 애절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 사생아나 다름없이 태어난 예수님에 대한 평가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평판은 그렇게 좋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이들 가정은 지켜졌다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 가정이 아버지 요셉 덕분에 지켜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아버지 요셉의 역할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아버지 요셉의 역할은 예수님의 삶의 배경처럼 느껴지도록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할 때 보이지 않지만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통해 우리의 형편이 다스려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 역시 예수님이 태어나고, 기고 서며, 아이로 자라기까지 마치 하나님처럼 훌륭하게 이 가정을 보호하고, 재앙으로부터 건져내는 훌륭한 역할을 감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늑한 집과 같이 자신의 역할을 다 한 요셉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세계란 큰 집으로 인식되었었는데, 하나님이란 바로 그 집의 주인이란 믿음이 있었듯이 아버지 요셉은 이들 가정의 주인으로써 군림하지 않고, 오히려 연약한 아내와 독특한 아들을 보호하고, 사랑해낸 가장으로써 이해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를 가진 아내를 믿어준 요셉의 믿음과 용인은 애굽 땅과 베들레헴의 나그네 여정에서 투철한 가장의 모습으로 승화되어 있었고, 12살에 예수님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에 갔던 모습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훌륭한 남성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내와 아들을 위해 살았을 아버지 요셉의 삶 속에서 오늘 우리나라의 헌신적인 아버지의 모습 역시 읽을 수 있겠습니다. 교회에서의 남신도의 자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 남신도분들만 빼고, 나머지 해당되는 분은 저를 따라해 보시겠습니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여보 힘내세요 예쁜이가 있잖아요” , 민원이 많이 들어와서..마지막으로.. “집사님 힘내세요. 예수님이 있잖아요”

 

1. 맛을 바꾸는 코드 : 예수

오늘 성경 이야기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인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가나 땅에 혼례가 치러집니다. 최소 일주일은 걸리는 이 결혼식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가게 됩니다. 당시 보통의 여인들이 결혼식에 하는 일은 음식 장만 등의 일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의 경사스런 혼인잔치를 위해 여인들은 최선을 다해 게스트(손님)가 되어 주었습니다. 힘을 다해 결혼을 축하해줬고, 춤추고, 음식을 나누는 매우 즐거운 잔치였을 것입니다.

왜냐면 결혼은 인위적인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하신 최대의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도 하나님이 선물하신 최대의 축제인 결혼식에 나가 계셨습니다. 그래서 본문1절은 어머니가 거기 계셨고, 2절에서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 혼례식의 주인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 무리를 초대하지 않았을 것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정황상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아들 예수와 그 제자들에 대해 소식을 들은 주인이 기꺼이 이들을 초대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혼례식에 오자마자 마침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없다.’라고 말하십니다. 이 때 예수님의 대답이 조금 엉뚱합니다. “어머니,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이 둘의 대화는 지금 가나의 혼인잔치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대화입니다. 애시당초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과는 다른 관심을 가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나 아들이나 오직 한 가지에 주목하여 대화를 나누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때, 곧 하나님의 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때, 그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시작이 바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있음을 어머니 마리아는 강하게 확신했습니다.

때문에 어머니 마리아는 곧바로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일을 시키든지 그대로 하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중요한 순간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느냐가 곧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순간입니다. 도대체 성령으로 잉태된 내 아들 예수, 그 예수를 통해 앞으로 전개될 하나님 나라란 무엇일까. 어머니 마리아도 궁금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당시 유대법에 따라 정결례에 사용되는 돌 항아리를 보시고, 그 여섯 항아리에 물을 아귀까지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여섯 항아리는 비워져 있습니다. 모든 정결례식이 마쳐진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능력을 잃어버린 유대의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능력도 기적도 나타나지 않는 죽어버린 공동체나 나라를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비어 있는 그 항아리 6개에 물이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으로 시작했다가 내 노력으로 인생을 채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젠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절망하여, 아예 물을 채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세상에게 실족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어진 분량과 계획을 채우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를 보십시오. 내가 지금 믿지 못했을 뿐이지..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때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마치 모래시계에 모래가 빠지듯..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카운트다운을 세며, 항아리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어라!”

 

물이 채워지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종교적 열정만으로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가 올 수 없습니다. 내 열심만으로는 주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다는 것은 맛이 달라짐을 말합니다. 성경은 수도 없이 예수님을 통해 놀라운 일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여인이 예수님을 통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린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란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린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왜 우린 변화될 수 없지?

안타깝게도 믿음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설명해줘도 얻지 못한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복음서는 오직 다음의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통해 인생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아무런 감동이 없던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통해 맛을 찾았습니다.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한 모임도 “예수님께 주목하였더니” 맛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미 모두 취해있었을 연회장이 새로 마시게 된 더 좋은 포도주의 맛을 보고는 여기 저기 탄식이 나옵니다. “사람마다 좋은 것을 먼저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고 소리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금방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지금까지 우리가 맛보지 못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신기하고, 놀랍고, 대단한 축제가 될 것이란 사실을 오늘 이야기는 말해준 것입니다.

 

2. 남신도회에게 부탁하는 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처음에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요셉의 진면모에 대해 나눈바가 있습니다. 남신도회는 여신도회와 달리 어느 교회나 그 수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우리 교회만 보더라도 여성신자와 비교하여 1/3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수가 적다고 해서 함부로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예수를 믿고, 직분을 맡아,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고,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 억센 사내들이 ‘예수’라는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도 왠지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나 남신도회가 변화되면 교회가 변화되는 경우는 많이 봅니다. 어떻게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먼저는 예수님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올해 총회 표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로워지는 교회입니다. 그만큼 교회와 성도를 답게 만다는 것은 예수 밖에 없다는 성찰에서 나온 표어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 근심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제일 큰 걱정은 교회에서 예수가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를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지만, 그 속에 예수가 없습니다. 맹물 같은 인생처럼 아직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경험할 마음이 없는 빈 항아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빈 항아리로는 성도라 부를 수 없습니다. 예수를 만나야 포도주가 됩니다. 포도주인척 해도 소용없습니다. 진짜 예수님을 알고 있는 사람 앞에 서면 금새 거짓신앙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도회는 인간집단이 아니라 성도의 모임으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공급받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분위기를 축제의 분위기로 만드는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나 청년이 아무리 앞에서 나팔을 불고 북을 쳐도, 남신도분들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 집회는 망쳐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 한 집사님이 남신도 기도회를 만들기 위해 궁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자청해서 목사님께 말씀을 드리고는 아침밥을 지어 기도회에 나온 분들에게 나눠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신도 아침기도회가 끝나고 아침을 먹으니.. 예전에 보지 못한 분들도 나왔다고 합니다. 식사를 거르기 쉬운 가장이나 혼자 사는 분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죠. 대화중에 근엄한 줄 알았던 집사님이 실은 수다쟁이였다든지.. 아무 말도 안해서 신앙이 있을까 했던 분이 실은 3대째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좋은 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끈은 쉽게 끊어지지만, 여러 줄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성도 역시 모였을 때 강해지는 것입니다. 자청하는 신앙으로 힘써 모이고, 교회의 분위기를 바꾸는데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는 섬기는 자세만이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신도회 활동 중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성과욕심입니다. 이것들은 대부분은 명령하고, 통제하는 습관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실상 이런 통제 욕구는 정신질병에 가깝지 건강한 리더십과는 거리가 멉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섬김의 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자기 목숨을 내려놓은 희생과 사랑이었습니다.

원래 인간 정치는 힘을 모으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힘을 나누는 행동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생활의 기본 역시 원래는 힘을 모아 역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소유를 나누고, 힘을 나누는 일에서 시작되었음을 살펴봅니다.

 

나가며..

저는 간혹 잘못된 조직화를 목격합니다. 한 사람에게 모든 힘을 실어주어 질서를 이루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 수 있는 것은.. 힘을 실어주는 대상은 바뀌지만, 힘을 실어주는 분들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끼리 권력화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신도회의 실상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타 교단의 실상은 조금 알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모든 신도회의 기본은 섬김이지 권력화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구나 요즘같이 합리적인 젊은 세대에게 어른들의 잘못된 모습들이 이내 교회에 대한 흥미를 심각하게 떨어트리는 부작용을 선물합니다. 정말 먼저 된 자가 정신을 바짝차리지 않으면 안되는 때입니다.

 

일당 백의 우리 구암교회 남신도회가 다시 부활하여 승승장구하는 그날을 바라며, 모든 성도님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이 변화되는 은혜가 넘치시길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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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가 아닌 초월(요한1서5장1~4)

들어가는 말

토마스는 세상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우며, 그 일을 통해 사람은 참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말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로 달려간 삶이었고, 세상을 벗어 던진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수도사들이 그렇게 세상을 등졌습니다. 아니 세상을 등진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실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헌신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이들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회는 지난 500년 동안 이들에 대해 오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수도사와 신부만이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이고, 세상의 일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로마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이들은 다만 구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생이 다르듯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분명 거룩하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주님이 인정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어느 곳에 있던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도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면 그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맞추려고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거룩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개신교회는 성과 속, 즉 거룩함과 세속 됨의 차이를 구별 없이 받아들인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회들이 본래의 맛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50년전 흑인해방운동가이며, 종교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자신이 성직을 걷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떤 신비한 부르심을 따라 이 길을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고통 받는 나의 동포와 인류를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뜨거운 마음으로 나선 것입니다.

이후로도 많은 성직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한 사람들. 예수님이 구원하고자 했던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직으로 각 자의 삶의 자리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들이 신자들이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다가 세상과 닮아버리게 된 것입니다. 적지 않은 교회들이 주님의 일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은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더욱 사랑했습니다. 지도자가 병들자 교인들도 점차 세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교회인지 정당집단인지.. 교회인지 장사터인지 알지 못할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줄이면.. 결국 ‘거리조절’에 실패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닮아 버리면 곧바로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자의 입과 눈에서는 세상의 학문과 비난이 쏟아져 나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대해 심판하시고 비판하셨지만, 이들과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처음 사랑이 있고 없음일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 특히 복음적인 교회라 불리는 곳에서도 기본적인 교리를 제외하고는 매우 놀랍게도 세속적 프로그램과 유행을 따라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진리만 헤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좋다는 융통성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생각들이 오히려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진리와 세상을 두 동강이 내버리는 결과를 만들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진리를 움켜쥔 체 성공과 물질주의로 화려하게 무장한 교회들은 세상으로 하여금 상식과 신학을 벗어던진 대적자 골리앗처럼 비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성직자 스스로 이 모든 불행을 만든 셈입니다. 스스로 천박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신자들 역시 스스로 이와 같은 불행이 행복이라고, 성공이라고 속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생명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임하면, 반드시 세상에 대해서는 한 번 죽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충분히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야 다시 세상을 사랑할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이 세상에서는 지켜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이젠 그가 부활하신 것과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자마다 세상을 이겨낼 만한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대해 한 번 죽으셨고, 다시 사셔서 이젠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한 번 죽은 자라야 그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세상에 대한 미련이 완전히 한 번은 죽어야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말뜻을 여러분 스스로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멀리 나갔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되돌아왔을 때 그 충격과 그 기쁨을 상상해보십시오. 반면에 꾸준히 연락하던 아들이 되돌아왔을 때는 어떨까요. 그 기쁨과 놀람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번은 완전히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미워해야 합니다. 그 동안 세상과 연락하며, 아무런 죄책감과 자각 없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 또 나를 속여 온 세상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라야. 하늘 나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보물이 이곳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는 죽어서나 혹시 갈 수 있는 곳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면서 한 번 죽은 자는 그 순간부터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의 목적점이 달라 집니다.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세상과 다른 차이를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천천히 세상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사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타협할 때도 있습니다. 죄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이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한 번 죽은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므로, 마지막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을 위해 기도하고 고민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시간 두 갈래의 흐름으로 흘러 내려왔습니다. 하나는 사회운동과 민주화, 빈민구제 등의 사업에 최선을 다해온 교회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최초 선배들이 뜨거운 기도와 말씀에 대한 묵상으로 이 세상을 건너고 이겨냈던 것과 달리 이제 이들 교회에서 이런 기본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과 등을 지고 오직 복음이란 이름 아래 모인 교회들입니다. 이들 역시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최초 선배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상을 이겨냈던 것과 달리 그동안의 엄청난 부흥 덕분에 ‘성공과 출세와 부패’가 이들의 다른 이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들은 거룩함에서 도망쳤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인생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를 때도 자신이 계신 곳은 거룩한 곳이라고 구별하셨습니다. 이때의 구별은 차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지켜 줄 안전선인 것입니다. 도로 위의 차들이 안전거리를 유지하지 않고 운행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수도 없이 많은 사고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이 나라에 수많은 사건 사고가 넘쳐납니다. 인간성이 무너지고, 세상도 더 이상 교회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별함이 없어서입니다. 초월함이 없어서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란 뜻입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 뿐 아니라 그의 말씀을 지키고,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판사가 모든 증거가 충분한대도 외압에 못이겨 ‘무죄’라고 선언했다면, 그가 비록 교회에 다닌다 하더라도 그는 성도가 아닙니다. 세상에 대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은 이 세상의 유한함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양심이 늘 하나님께 닿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판사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거짓 증언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는 성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판사의 판결을 보고, 같은 판사로써 그 불의함을 고발하여 시정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분명히 한 번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세례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출애굽 하던 백성들이 건넜던 홍해가 바로 그 의미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는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 가운데 살면서 도피가 아닌 초월의 삶을 살아내는 비결인 것입니다.

 

초월은 지금 여기에서 나의 한계를 너머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 깊은 관심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를 끊임 없이 초대하십니다. 자신의 자녀들을 잃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쏟는 노력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왔는지 모릅니다. 성직자이던 아니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저는 이제는 누구라도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을 초월해 하나님 앞에 용기를 보이는 자에게만 하나님께서 구원을 허락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제 자신부터가 세상적입니다. 평생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서 들어선 길이면서, 스스로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고, 조직을 운영하는 것을 배우고, 인간관계의 비정함을 배우고, 남을 속이고, 속이며, 그런 것이 세상이라고 습득하는 것이 원치 않아도 되는 제 자신을 볼 때가 그렇습니다.

그야말로 천박하지 말아야 할 삶을 결단하고도, 쉽지가 않은 것이죠.

그러나 다시 한 번 십자가 안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도피가 아닌 초월해내는 삶을 연습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기쁨이 유지됩니다. 능력이 유지됩니다. 생명이 유지됩니다.

한 번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거듭남을 통해, 즉 세상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삶을 통해서만 그 신령함이 유지된다고 진리는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도피가 아닌 초월로 자신의 생명을 증명할 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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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이라도 겸비하면(왕상21:17~29)20180910수요기도회

외환 위기 이후로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질서에 한국이 편입되었습니다.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예전에 대학생은 낭만과 시국과 문화라는 것을 향유하고도, 좋은 회사에 취업했었지만, 지난 1998년 이후로 20대는 영어만 잘할 뿐, 자신이 빼앗긴 자유와 문화에 대해 단 한 번도 항거하지 못한 체 밀려밀려 30대와 40대가 되어가고 있음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티브이를 보면 20대 배우들이 모두 40~50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드라마에서 윗 세대를 재연할 뿐, 자신들의 20대 문화와 자유를 연기하는 친구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이유도 모른 체 영혼의 목이 잘린것처럼 이 세상에 대해 자신이 잃은 것들에 대해 질문하는 친구도 적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엘리야처럼 자신들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 분명히 알고, 외치는 소리가 간절한 때입니다.

 그리고 오늘 열왕기상 21장 내용은 잘못된 권력에 의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나봇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나봇의 잃어버린 것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잃어버린 자유와 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대지 요략>

 

가. 나봇의 포도원(21장 이하 내용)

1. 아합이 사마리아 궁 옆에 나봇의 포도원을 마음에 들어 하더라.

-. 아합은 자기 궁 근처의 포도밭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확장되고, 더욱 멋져진 왕궁의 격에 맞는 끊임없는 인간의 지배욕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평소 아합의 관심이 어디 있었는지 알 수 있다.

 

2. 나봇이 하나님께 받은 땅을 팔지 않다.

-.유대인들은 조상때로부터 내려온 땅은 하나님의 기업으로 팔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자손대대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 정신 속에는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이 숨어 있다.

 

3. 이세벨이 간계를 부리다.

-.남편을 위해 간계를 구사해, 나봇이 사는 지역의 귀족과 장로들에게 편지를 보내, 연출된 금식행사를 열게 한다. 이때 두 불량배가 거짓 증언자로 나선다.

-.이에 귀족과 장로들은 나봇을 데려다 죽이게 내버려 둔다. 압박에도 불구하고, 지도층이 깨어 있었다면 나봇은 살 수 있었겠지만, 패색이 짙은 조직일수록 이와 같은 일은 기대할 수 없다.

 

나. 엘리야의 고발

1.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다.

-. 여호와의 말씀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온 몸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공명과 다름이 없다. 더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구체적인 아합의 심판을 선포하셨다.

 

2. 아합과 엘리야의 대화

-. 대결의 절정으로 엘리야를 바라본 아합의 태도가 나타난다.(20절)이에 엘리야는 “나를 찾았느냐”며, 정식으로 자신과 아합이 반대에 서 있음을 드러낸다. 당시 이와 같은 문화가 가능한 것은 엘리야를 비롯한 여호와의 편에 선 무리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언자는 언제든지 왕을 찾아가 독대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신변을 우려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쨌든 엘리야는 두 가지 예를 통해 그 처참함을 상기시켰다. 바로 바아사와 여로보암의 예이다. 이 둘은 반란을 통해 왕이 되었지만, 결국 반란을 통해 죽임을 당한 왕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판의 이유는 역시 ‘불의한 행위’ 때문이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기질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이 보지 않아도 불의함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고침을 받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 엘리야는 이세벨의 심판도 빼놓지 않았다. 이세벨은 아합에게 권모술수의 창고이자, 권력의 근원이었다. 잘못된 권력은 죄가 되어 공동체에 들어오고, 반드시 공동체에 상처를 준다. 기독교 신앙은 조직이나 체계가 아닌 하나님 앞에 선 ‘개인’의 책임이 훨씬 중요하게 존중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귀족과 장로, 아합과 이세벨과 같이 현실과 조직의 뒤에 숨어 자신의 유익을 취하는 무책임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기 위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이는 카톨릭과 달리 기독교가 개인의 성숙을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말하기도 하며, 성서의 내용이기도 하다.

 

3. 아합의 겸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엘리야의 저주가 엄준했기에 아합은 더욱 놀랐다. 이미 닥친 불행도 아합의 겸비로 하나님은 아합의 때가 아닌 자녀의 때로 연기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심판주이시지만, 심판이 목적이 아니시다. 한 영혼이라도 돌아서서 선한 의의 도구로 이 땅을 바르게 펴내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역대 왕 중 가장 간악한 왕이었지만, 아합은 자신이 행한 놀라운 악행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심판받게 될 것인지 듣게 됨으로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는 풀이 죽어 다녔다. 그동안의 기고만장함은 근신의 자세로 변화되게 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종교의 생활 질서 안에서 예언자의 직책이 차지하는 자리를 인정하고, 이로써 그에 대한 처벌은 부분적으로 이뤄지게 되었음을 성경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만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내 손으로 해낼 수 있는 부분보다 하나님의 뜻을 인정할 때 누리게 되는 복락이 더욱 큼도 깨닫게 된다. 어쩌면 신앙생활이란 나와 하나님의 차이를 분명히 아는 것이며, 동시에 각 자에게 맡겨주신 직분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임도 알게 된다.

기독교회는 교회에서 세 가지의 말씀만을 인정하고 있다. 하나는 성경이다. 두 번째는 보이는 말씀인 성만찬이다. 세 번째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예수 중심의 말씀이다.

목회자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타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도는 선포되어진 예수님을 전파하고, 살아내는데 협력하여 노력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겸비이며, 우리가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용서받고 구원받으며,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인 것이다.

 예수님을 입고, 먹고 마시는 성도는 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오늘도 이 예수님을 통해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이 주신 여러분의 참사람됨을 찾아내시고, 그 신앙의 깊이를 더해가시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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