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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완주(왕상11:1~13)

 

들어가는 말

인생의 경주를 완주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들 말씀합니다. 잘 달리는 것처럼 보이다가 마지막에 넘어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죠. 프랑스 총리였던 피에르 베리고부아는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으로 프랑스의 총리가 된 인물입니다. 철도 수리공부터 온갖 힘든 일을 하다가 정치에 입문한 그는 총리가 되어 강력한 프랑스를 재건하는 일에 큰 공을 세워 국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평소에 청렴과 정직을 명예로 삼은 그는 나중에 무이자 거액 대출 스캔들이 터지고, 이로 인해 총선에서 참패하자 크게 낙심하여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인생 밑바닥에서 최고 성공의 길을 달렸지만, 마지막 순간은 모든 이에게 안타까움을 남긴 사람인 것이죠.

신문기자였던 찰스 템플턴이란 사람은 어느 날 인생에 회의와 죄책감에 사로잡힌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어려울 때 간절히 소원하는 가운데 만난 예수님을 통해 그는 다시 삶에 대한 감사를 통해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평소 기자 생활을 하며 세상에 대해 큰 절망을 경험한 그가 당시 빌리 그레이험이라는 목사님을 따라 다니며, 전도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하나님과의 작별:내가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이유”라는 책을 쓰고는 갑자기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게 된 것이죠. 세상에 절망한 그가 이어서 사람에게 절망하고는 신앙을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결국 치매로 인생의 모든 것을 잊고, 살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신앙을 아름답게 가꾸고, 지키며, 신앙의 완주를 이루는 것이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생각보다 신앙을 시험 들게 하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신앙을 잃고, 그저 사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그렇습니다. 더구나 신앙을 잃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는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자신들을 지켜 줄 성벽과도 같은 이권과 고집을 더욱 고집스럽게 쌓아 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라는 한탄과 ‘과연 나는 이와 같은 불신앙에서 자유할 수 있는가?’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반드시 완주해야 합니다. 넘어지더라도 아주 엎드려지지 않도록 항상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1. 솔로몬의 전후반전

오늘 읽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솔로몬의 삶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흥왕했던 전반기 20년과 어두웠던 20년의 이야기를 살펴봄으로 신앙의 완주를 결단하는 귀한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통치 전반기는 ‘건축과 보물, 지혜’로 설명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거룩한 성전을 짓는 일에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자신의 광영을 열국에 높이기 위해 화려한 궁전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 두 개의 건물을 짓는데 20년이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건물이 높아질수록 하나님의 영광이 높아지는 것과 동시에 솔로몬의 영광도 높아졌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두 여인이 한 아이를 자기 아이라고 우길 때에도 문제를 해결했었고, 좁고 척박한 땅에 위치한 이스라엘 나라를 부요하게 만드는 길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실행에 옮긴 왕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해양중계무역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무역으로 재물을 쌓았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에 기술자가 없을 때는 원수라 할지라도 손을 벌려 그들의 기술과 재능을 배웠습니다. 실제로 사해와 홍해가 만나는 곳에 에시온과 게벨이라는 항구를 만들어 동방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고, 두로 지방의 항구를 통해서는 위쪽에 지중해와 연결하는 길을 열어 이스라엘이 역대 경험하지 못한 부유를 갖게 했던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로 이토록 훌륭한 왕으로 통치하던 솔로몬은 후반기에 들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그의 달라진 모습을 정리하면 “하나님 없이 스스로 부국강병을 이루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통해 삶의 지혜와 기술을 배웠다면, 나중에는 신앙을 잃고 삶의 술책과 테크닉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도록 내어준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 옛 것을 모두 유치하다고 치부하는 것처럼 신앙에 있어서도 솔로몬은 하나님의 손을 놔버리고, 자신의 주관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는 특히 다음의 두 가지 행동으로 이런 자신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먼저는 주변 나라들과 ‘결혼동맹’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나라’가 아닌 ‘동맹국들의 보호를 받는 나라’로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결혼 동맹은 20여민족과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혼’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혼한 이방여인을 위해 그 여인의 나라의 풍토에 맞는 궁전을 새로 짓고, 우상제단을 건축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궁전건축은 국고를 탕진하도록 하였습니다. 우상제단은 단순한 건축물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속에서 갖가지 축제와 행사가 이뤄지게 하였고, 왕과 신하 모두 이 행사에서 자유 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솔로몬과 이스라엘은 점차 죄에 대해 둔감해지고, 이와 같은 문화와 불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한 가지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품이 넓은 것처럼 행동한 들.. 그것은 우상숭배의 행동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탈을 쓰고는 실은 힘과 안전만을 도모하는 일들이 한국교회를 병들게 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무분별하게 품는 것이 아닌, 분별하여 품는 지혜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솔로몬은 비록 우방국을 통해 안정은 얻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날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기도합니다. 복을 받았습니다. 좋은 집도 갖습니다. 사람도 고생해졌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도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왠지 예전과 같은 뜨거움은 사라집니다. 안일하게 됩니다. 야성이 없어집니다. 손에 빠른 인간적인 수고가 기도를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기도로, 뜻으로, 영적인 두려움과 세상을 대적하는 신앙은 사라지고, 점차 솔로몬과 같이 ‘능력있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자녀들도 부모님의 부르짖는 신앙은 배우지 못한체 지금 부모님의 ‘수단’만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몰락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부로라도 하나님이 원하는 길에 자신을 세워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시험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나도 모르게 배워버린 세상이 불타 없어지고, 다시 하나님께 사용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대가 지불없이 배울 수 있는 신앙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가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도록 내몰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물질이나 명예의 곤란도 당하도록 내몰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신기하게도 곤란하게 했던 것들이 도리어 힘이 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아,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는구나..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신앙의 선배들이 어떤 심정으로 믿음을 얻고, 은혜를 입게 되었는지 나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배들이 자라게 한 나무의 가지와 줄기와 뿌리를 잘라, 자기 땔감으로 쓰면서, 옛 선배들의 일화만을 자랑하는 어린아이가 돼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단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더 이상 옛 선배들의 고난을 팔아 자신의 지적희락이나 영광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일부로라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길에 자신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성경 속에서 일어난 기적과 사건이 오늘 나의 사건과 기적이 될 줄로 믿습니다.

 

자, 두 번째 솔로몬의 잘못은 ‘전차부대’의 창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늘 주변국의 전차부대에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정착 초창기에 가나안땅에서 내쫓지 못한 부족은 대부분 기마부족이었습니다. 이들은 사사시대에도 사울왕때에도 반복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차부대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말’이 필요합니다. 말은 가나안 땅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집트, 애굽땅에서만 구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에 세워질 왕에게 경고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여자를 많이 가지는 것”과 “말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들이 떠난 애굽 땅을 말을 얻기 위해 다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북방과 남방에 매우 큰 전차부대를 만들기에 이릅니다. 그는 든든한 국방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매우 당연한 부국강병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위대한 신앙과 능력 있는 백성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때는 부국강병을 이룬 솔로몬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주변국의 압제와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싸워 나가던 모세와 여호수아, 사사들의 시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닐 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되어갔고, 또 하나님 안에서 된 자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 이만하면 됐어! 너야말로 나의 전사이고, 나의 종이며 친구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던 때가 바로 그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봤더니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봤더니 이스라엘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을 바라봤더니..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자기 힘만을 의지하는 문화가 판치는 세상문화가 되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 이후로 그의 자손들이 경험한 남북분열이 바로 이런 문화로부터 출발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패역한 것은 분열을 만듭니다. 죄가 나라와 공동체에 들어오면 분열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더욱 의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르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모든 분열의 악한 영이 이 시간 떠나가길 소원합니다. 신앙은 힘을 가지는 것에 있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곤고하고 낮은 곳에 처해야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낮고 곤고한 곳에서 여러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갚아 달라고, 하나님께서 변화시켜달라고, 하나님께서 분명 가만 두지 않으리란 믿음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솔로몬 이후 남북이 분열되고 고작 40년이 지나는 동안 왕이 7번이나 바뀌고, 그중 3명이 죽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답습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만과 패역한 신앙에서 자유해지시길 바랍니다. 솔로몬은 이를 이루지 못해 믿음의 지조를 버리고 도리어 하나님을 거역하는 늑대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는 온 나라를 우상숭배로 더렵했습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도 그랬습니다. 윗니가 시린다고 아랫니가 시리랴? 라는 에스겔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좋은 것을 받고도 나쁜 열매로 나라와 아들을 망친 것입니다. 그는 그 명석함으로 자신의 힘을 의지하다 나라 전체를 어려움에 빠트렸습니다. 지도자가 자기 힘을 의지하기 시작하면, 백성들은 모두 제 갈 길을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백성들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야말로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잃게 된 것입니다.

 

나가며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리고 왕의 보좌에 앉았습니다. 이 날의 영광은 모두의 기쁨이자 축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저와 여러분이 처음 신앙을 하기로 결단했을 때 하늘에서 크게 기뻐하시고, 잔치가 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처음 받은 것을 지키지 못하고, 점차 자신의 힘을 의지하더니 나라를 강하게 하기 위해, 부요하게 하기 위해.. 점차 신앙의 완주를 이룰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음을 이 시간 나눴습니다.

솔로몬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 없이 더 높이 날아오르려는 순간 추락하여 결국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생은 철저히 하나님과 한 호흡을 이루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완주는 그 호흡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불편을 자처하는 일이고, 하나님 때문에 형통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각자에게 주어진 단 한번 뿐인 삶을 솔로몬과 같이 낭비하지 마시고, 하나님 안에서 끝까지 완주하기 위해 노력하는 또 완주하시는 멋진 신앙의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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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의 길(창3:22~24)

 

 

들어가는 말

 

토마스는 주님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먼저 너의 욕망이 온전히 나의 선한 뜻을 따르도록 하여라. 내가 너의 대의 명분이라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자족하는 마음을 얻겠지만, 조금이라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있다면 이는 너에게 걸림돌이 되고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미리 품은 욕망에 너무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여라.”(p182)

 

1.욕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는 인정의 욕망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직장에서 교회에서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도 이 욕망에 해당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욕망에 따라 자기 성취를 이루게 됩니다. 좋은 집과 차, 직장 등 부정할 수 없는 생존과 성취의 욕망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욕망이 잘 못 변질되면, 지배의 욕망으로 발전한다고 합니다. 지배의 욕망은 불안에서 출발하고, 모든 것을 손에 쥐어야 속이 편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도 없으며, 반드시 지배해야만 자신이 인정을 받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 경우는 매우 위험한 상태로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드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대등의 욕망입니다. 상대방을 자신과 대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할 필요도 없고, 있는 그대로 상대를 인정하면 그만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대등의 욕망에 이르지 못하고, 지배와 인정의 욕망에 머물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다 불안감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이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 모여서 세력을 이루는 것. 믿을 만한 사람을 만드는 것. 이 모든 행위가 실은 인간의 생존 욕망 중 가장 기본적인 인정의 욕망에 따라 이뤄진 행동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런 행동을 통해 실제의 자신과 불안 때문에 또는 사회적 요구때문에 만들어낸 자신을 헷갈리는 경우입니다.

 

 

2. 어떤 목사님은 아내에게도 자녀에게도 늘 목사로 산다고 합니다. 물론 그 사모님은 정신과 치료를 받고 계신다고 합니다. 아내는 목사님과 사는 것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뒤로 숨어버린 목사라는 성직도 부담이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결혼했을 때 목사님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요구와 성경을 보다 율법적으로 또는 종교적 열심으로 따르다 보니 어느 순간 자나 깨나 목사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흔히 하는 말로.. 날 때부터 목사는 없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는 만들어지는 것이란 뜻이겠죠. 그런데 녹녹치 않은 현장에 적응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목사로써 사는게 익숙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실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처음 목사님을 만날 때, 그 있는 그대로의 자아는 분명 지금의 목사와는 다를 것입니다.

순수함과 경직되지 않은 자유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왠지 사모님이 힘든 것은 직업 목사로 사는 남편. 아무런 행복도 느끼지 못하지만, 목사로 낮과 밤을 사는 남편이 불쌍하고 소통이 되지 않아 불행하게 되었다는 현실이었습니다.

 

 

3. 오전에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사람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자기 소리를 귀로 듣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을 하는 자신도 ‘나’라고 하지만, 외부에 들리는 소리에 반응하는 나도 ‘또 다른 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원래 나’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 때문에 곧잘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 설명해준다.

 

죄는 사람이 뱀의 소리를 듣고 ‘스스로 판단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 먹고는 동산에서 쫓겨난 상태를 말합니다. 무엇이 따먹게 만들었을까? 자기 결핍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향한 인간의 욕구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2장 16~1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최초로 사람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어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창세기3:5절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아 아심이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간교한 뱀(즉, 사탄이 공중 권세 잡은 세상)의 말을 듣고 맙니다.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생령이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귀한 존재였지만, 간교한 뱀의 속임수에 넘어갑니다. 어떤 속임수입니까? ‘바로 자신에게 없는 결핍을 자극하는 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를 먹도록 하시고, 다만 한 가지 선악과만을 먹지 말라 하셨지만, 뱀은 반대로 바로 그 선악과를 먹어야 산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자기 부정이 아닌 자기 인정을 따르다 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야말로 창3:16~17와 같이 에덴동산에서의 영생의 삶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한 명, 한 명을 바라보시는 분이시지, 저와 여러분을 비교하여 바라보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 상대적으로 죄가 더 많은 다른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 때문에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 에덴동산의 영생의 삶이 인생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세상은 간교하게 틈을 타 어떻게든지 우리를 거짓된 모습으로 만족하여 살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출산하고, 수고하고, 땀 흘리고, 노동하는 데만 가치를 두는 존재가 아닌 것 입니다. 꿈꾸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뜻을 따라 세상을 다스리고,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일 것입니다.

 

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체 영생할까 두려워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막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알게 하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께 만족하는 단순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첫째는. 가죽옷을 지어입히심입니다. 에덴 동산의 최초의 희생입니다. 입는 순간 제사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둘째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먹으면 정녕 죽는데, 영원히 죽는 상태를 막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실패했다고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

이제 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생명나무가 다시 발견되었다는 것은 에덴동산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천국이 회복되고 에덴동산이 회복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에 에덴동산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고 생명나무 과실을 먹게 될 것이며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놀랑룬 영적 경험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새 땅이 회복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 입니다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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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 다른 나(시37편 7~31절)828쪽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방송이나 서점에서도 이와 비슷한 질문과 답들로 구성된 책들이 꽤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1885년 러시아의 문호인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책 덕분입니다. 인간성이 무너지고, 신앙이 공격을 받는 극도의 혼란 시기에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아니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을 던졌던 톨스토이의 신앙이 잘 드러난 책이기도 하죠.

 

책의 내용은 그렇습니다. 어느 날 하늘의 천사장인 미카엘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지상에 한 아이의 영혼을 데리러 내려옵니다. 그런데 아이의 죽음을 만류하는 아이 엄마의 애원을 못 이겨 그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죠. 그러자 하나님은 미카엘에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찾을 때까지 지상에 있으란 명령을 받습니다.

세 가지 질문은 그렇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두 번째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세 번째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였습니다.

마카엘은 인간 속에서 살며 이 질문에 대한 답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카엘은 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자신을 돕는 인간에게서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곧 죽을 지도 모르고, 1년 동안 신어도 튼튼한 신발을 원했던 귀족에게서는 “인간은 자신에게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란 질문에 대해서는 고아들을 돌보는 여인을 통해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을 소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화1}

어려서부터 교회에 출석한 한 청년이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잘 성장했고, 성경이 말하는 아름다운 가치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몇 안되는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취업을 하고 나서 큰 난관에 부딪쳤다고 합니다. 왜냐면 자신이 알고 있는 또 옳다고 여기는 ‘내 자신’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또 달라야 할 자신’은 엄청난 차이를 갖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 괴리감 속에서 청년은 복음 안에서 참 자유를 포기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되버렸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이러한 긴장감에서 낙오한 신앙인들이 많은 것입니다. 스스로 신앙인답지 않은 구석도 많으면서 교회에 계속 나오는 것이 옳은지..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기도 하고, 한편 세상에서 인정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자연히 교회를 멀리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간은 자신이 아무런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될까봐 두려워하므로 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자신의 위치를 얻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결국 이 청년도 하나님에게서 아닌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 성취를 위해 일반적인 삶을 선택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문제는 이런 선택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어느 순간 이런 삶들이 진짜라고 믿기 시작한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전환-이음/

사람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자기 소리를 귀로 듣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자신도 ‘나’라고 하지만, 자신에게 말하는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에 반응하여 만들어가는 나도 ‘또 다른 나’라고 말합니다.

처음의 나는 본래의 나를 말하고, 두 번째의 나는 만들어진 나를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점차 본래의 나와 두 번째의 나를 일치시키기 시작합니다. 분명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정말 나인것처럼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정말 소중한 자신을 잃도록 만들게 되죠.

그러나 신앙을 갖는 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나를 훈련하고 발견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다윗은 오늘 시편에서 악인의 형통과 잘됨을 목도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본문 7절에서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라는 말씀으로 이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악한 꾀’로 자신을 도모하는 사람에 대해 다윗은 조급해집니다. 그러나 곧 다윗의 마음은 다스려집니다.

조급함”은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인정욕구”, 즉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자신의 원수들이 재빨리 유익을 취하고, 자신을 조여오는 것을 목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은 미련해 보이고, 인간의 손빠른 행동은 너무나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시험 기간에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아이의 불안감이 그렇고,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 신자의 의무를 다하는 부모들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회사나 교회에서 “어쩌면 저렇게 영악하게 살아갈까.. 혀를 내두르지만, 한편 자신은 뒤처지는 것은 아닌가? 라며 불안해 하는 인간의 모습”이 이것을 닮아 있는 것이죠. 결국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은 불안감에서 옵니다.

불안감은 자신도 통제할 수 없으므로 곧잘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습성을 낳기도 합니다. 그렇게 점차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지배욕으로 자신과 주변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 사는 삶을 살기위해 애썼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깊은 곳까지 알고 있었고, 다윗은 무엇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대한 골리앗을 무모함이 아닌 물맷돌로 상대해 이겼습니다. 그는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이루리라는 믿음 안에서 서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불안과 조급함이 엄습할 때, 또 자신 안의 한계와 죄성 때문에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할 때, 겸허히 그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내려놓는데 성공한 예배자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항상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서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이 없음을 빨리 깨달았습니다.

빨리 깨달으니 하늘을 봅니다. 그야말로 다윗은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예화2}

직장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 때문에 괴로워하는 성도님이 있었습니다. 그 상사는 늘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랫사람의 실적을 가로채거나 걸핏하면 야근을 시키는 어쩌면 흔한 상사들 중 하나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상처를 받은 성도님은 도저히 그 상사를 용서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비관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지난 시간 하나님 안에서 변화되어온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상대를 미워한들 실상 상대는 변화되지 않을 사실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이 변화시키실 것이란 소망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 같은 사람도 변화시킨 하나님께서 자신 앞에 닥친 상황들을 선하게 인도해주실 것이란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넓은 마음, 그 큰 그림을 받아들인 성도분은 다시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 깊은 사랑과 인정을 경험한 이 남자는 직장으로 돌아가 오히려 그 상사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자 놀랍게도 상사의 결핍이 채워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자 그 상사는 다른 부서로 옮겨가게 되었고, 심지어 이 성도분을 추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성도 분은 그 상사의 부서로 옮겨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하는지 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응답받지 못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해답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가 가진 답을 가지고, 그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그러나 이미 두 손에 오답을 들고 놓지 않는 사람에게 정답을 쥐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은 내게 꼭 필요한 응답을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정받는 삶’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인정 너머의 삶’을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다윗은 악한 꾀로 승승장구하던 원수를 보며 하나님 안에서 확신을 얻습니다.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걸음을 정했다는 것은 세상과 다른 사람이 원하는 또 다른 나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직하게 자신과 마주하여 얻어낸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의 걸음인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긍정하며, 두려움과 불안감 대신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거칠어도 황소걸음으로 뚜벅 뚜벅 제 길을 걷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의 유행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여호와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쉬고/

많은 사람들은 그러나 ‘인정받고 높아지려는 결핍’을 채우려다 ‘자기불행’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뻔히 불행해질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인정받아 높아지려는 마음은 정욕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높이려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씁니다.

자기 결핍에서 나오는 이와 같은 행동은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자기 결핍을 다른 사람 때문이라 핑계 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 내가 행복해질텐데.. 저 사람 때문에 일이 되지 않아.. 그러나 실상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알아갈 이유가 됩니다.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나의 영적 게으름이 온전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세상을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가진 자로 더 가지게 하는 곳입니다. 이 세상의 이자놀이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인정받고 높아지려는 결핍’을 극복한 사람이 하늘 소망으로 자신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니 더 큰 소망으로 자신을 채웁니다. 채워보니 자유해집니다. 채워보니 넉넉해집니다. 적게 가지고도 넘치게 가진 사람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본문 16절 말씀입니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쉬고/

 

나가며..

광야에 한 남자가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질문입니다. 모세는 이 질문을 통해서 자신의 소명과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유대인, 이집트의 왕자, 살인자, 목동과 같이 그때 그때 닥치는대로 살아가던 모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운명과 목적을 깨닫게 된 각성자였던 것입니다. 초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던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가 빛에 놀라 말에서 떨어져 물었던 질문은 “주는 누구십니까?” 였습니다. 바울은 이 질문을 통해 자신의 소명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혈통 있는 베냐민 지파요. 억만금을 줘야 살 수 있는 로마의 시민이요. 가말리엘 문하의 엘리트요. 율법에 능통한 바리새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갈2:20에서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바울은 자신을 설명하는 신분과 능력, 외모와 출중함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게 된 자신을 참다운 자신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거짓 자아를 깨트리고, 영원하고 온전한 자아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본래 자신의 모습대로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세상이 필요한대로 여러분을 이용만 할 뿐.. 여러분 안에 가치를 밝혀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는 동안 삶의 도움을 하나님께 바라며, 동시에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거나 친구간의 우정을 넘는 자신의 목숨을 드려 우리를 구원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장 나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난 후 은혜를 주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은혜를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한계를 이해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한 번 성령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로 결단한 저와 여러분은 더 이상 “인정받아 높아지려는 결핍”으로 삶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한 귀족은 1년도 살지 못하면서 1년 동안 신을 새 구두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없는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고” 미카엘 천사는 하나님께 아뢰었다고 합니다.

정말로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 시간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31절 말씀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을 품고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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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7기준과 포용이 있는 신앙(왕상15/)

들어가는 말

한 여성이 심리상담사를 찾았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성격이 평소 무덤덤한 탓 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요즘에 그 정도가 지나쳐 상담사를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특별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얼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전 제 부모님이 교통사고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별로 슬프질 않는 거에요.. 그때는 제가 집 떠나온지 오래되어서 그런가 했는데, 이번에는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거에요. 회사 생활도 쉽지는 않지만, 다른 동기들이 다 그만둘 때 저는 그래도 잘 버티고 왔거든요.. 그런데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 저는 지금 제 아이들이 잘못된다고 해도 전혀 걱정되지 않습니다. 선생님. 제 문제점이 뭐죠?”

정상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인생의 중요한 때에 늘 자신을 괴롭혀왔지만, 정작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이제야 부딪치기를 원했던 것이죠.

 

일단 이 여성은 어렸을 때 반복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늘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를 지킬 수 없었던 나약한 자신. 그런 불행을 매일 경험하면서 점차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마음을 닫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정은 따듯함이나 관계가 이뤄지는 곳이 아니라 그녀에게는 가족을 지킬 의무만 있고, 감정적인 교류나 올바른 관계를 만들어가는 곳이 아니었던 곳이죠.

그녀는 어린 나이에 내면성장이 멈추고만 것입니다. 그리고 상담사는 다음과 같이 해결점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당신은 아버지에게 그 부당함에 대해 말했어야 합니다. 왜냐면 당신은 불행을 외면하는 능력은 남들보다 월등하지만, 문제와 부딪쳐 자신과 가정을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제이자 심리학자인 죤 브래드 쇼는 ‘가족’이란 책을 통해서 한국에 알려진 분입니다. 그는 앞선 이야기와 같은 개인의 문제는 결국 가족 전체의 문제가 그 개인을 통해서 드러난 결과라고 말합니다. 그는 상처로 인해 우리 안에 있는 자라지 못한 인격. 그 내면아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결국 개인의 문제는 오로지 가족들 간의 문제 해결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만 문제 해결의 책임을 묻던 태도가 아니라 한 가정에게도 책임을 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공동체에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공동체가 반대로 일원들의 삶을 망칠 수도 있음을 이런 적용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병든 유대공동체와 왕정가문에서 태어난 아사왕

오늘 읽은 본문은 사울왕에서 솔로몬까지 하나를 이루었던 이스라엘이 분열하여,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지역으로 갈라지면서 남쪽에서 왕이 된 아사왕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국가의 역사 중에는 아사왕과 같은 하나님께 충실했던 역사보다 우상숭배와 범죄의 흔적이 더 많이 기록되어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솔로몬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복을 누렸던 이스라엘이 그가 죽고나자 결국 남쪽 2개 지파에는 르호보암왕이 북쪽 10개지파에는 여로보암 왕이 세워지면서 본격적인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원래 하나님과 약속한대로 하나님의 법도와 신앙을 잘 지켜내지 못하고, 솔로몬 때로부터는 우상숭배와 믿지 않는 이방여인과의 결혼 그리고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한 정치가 이스라엘 왕정가문과 나라를 병들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왕정가문이 비신앙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브래드 쇼에 말대로라면 한 번 타락한 가정이나 공동체는 다시는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적용할 수 있겠죠.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사는 달랐습니다. 는 혼란 가운데 올바른 신앙을 지켰습니다.

 

아사의 성장환경은 원래는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의 법도로 다스려져야 하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리고 공공연히 안식일마다 그런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고, 회당과 학교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가르쳐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였던 아비얌은 그런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사가 경험했을 할아버지 르호보암 왕 역시 이와 같은 의무를 다해야 할 분이었습니다. 더구나 할머니 마아가는 이스라엘의 시조인 다윗왕의 아들인 압살롬의 딸이었습니다. 본래 다윗의 후손이고, 하나님을 믿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할아버지 르호보암, 할머니 마아가, 아버지 아비얌은 모두 이런 하나님의 법도와 의무를 어겼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져야 할 이스라엘 땅에서 이 분들은 공공연히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산당과 성전 뜰에 가증스런 이방신상과 아세라 나무들을 심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의 딸 마아가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왕국을 장악하고는 나쁜 일만을 행했습니다. 그야말로 도무지 희망이라곤 없을 것 같은 곳이 바로 이스라엘이고 왕정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인 아사에게 신앙을 기대한다는 것은 애당초 어긋난 기대일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사는 왕이 되자. 할머니이면서 스스로 태후(왕의 어머니)로 높여 기득권을 놓지 않고, 혐오스런 아세라 상을 만들었던 할머니인 마아가를 폐위시킵니다.

 

이처럼 아사는 부정적인 가족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 신앙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했음을 말해줍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본문 11절에서 아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했다고 기록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이란 바로 “행동의 기준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지배하고 있는 모습”임을 말합니다.

아사가 부정적인 가정환경과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도 하나님을 두렵고 귀하게 여기자 하나님도 그를 귀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자신을 높이는 자를 높이시며,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낮추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행히 한 개인이 하나님 없이 성공할 수 있다고 한들, 하나님 없이는 그의 가문이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마치 구멍이 뚫린 항아리처럼 사람이 모든 것을 쌓았다고 안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가져가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일을 매우 자주 목격합니다. 석학인 이어령 교수님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 이유는 어떻습니까? 명예와 덕망으로 승승장구하던 그의 삶에 갑자기 불행이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딸의 암선고입니다. 누구도 고칠 수 없는 절망의 시기에. 딸도 아빠도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병고침의 기적이 교수님과 가정의 삶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교수님은 지금도 인간의 지식의 한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숭고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노령에도 젊은 사람 못지않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짓밟힌 자신의 영광을 되찾으러 오시기 전에 아사와 같이 마음을 잡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쉬고/

두 번째로 아사왕이 부정적인 가족과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 신앙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4절 말씀입니다.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더라.”

온전함은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함을 말합니다. 흠이 없음을 말합니다. 산당은 원래 각 지역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처소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상숭배의 장소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사왕은 왕가의 개혁을 통해 자연스레 개혁의 물줄기가 아래로 흐르도록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시간을 준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다시 산당에서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사왕은 ‘한 사람의 법칙’을 알고 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친할머니라 할지라도 폐위시키는 적극적인 개혁을 통해 결국 하나님 앞에 ‘책임지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사람과 달리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한 사람’의 원칙에 있음을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만연한 죄악을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감당하시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죄악이 한 사람을 통해 들어온 것처럼(롬5:12) 이제는 한 사람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게 되었음을 성경은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성난 유대군중들과 로마병사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사도신경은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던 쥐와 같이 ‘본디오 빌라도’라는 책임 있는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스리실 때 특히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의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후에 아사왕도 이 모든 일에 책임 있는 마아가의 폐위를 통해 신민 앞에 책임 있는 정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살해하지 않았으며, 다만 백성과 하나님 앞에 두려운 모범을 세워 산당을 개혁하고 국가 운영의 권위를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사가 누구입니까?

아사왕은 부모님과 할머니의 범죄를 목격하며, 끊임없이 상처를 받은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불우한 신앙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놀라운 추진력과 포용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아사왕과 같이 어릴 때부터 불행한 일에 노출된 아이는 상처와 좌절때문에 성장해서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실천하지 못하거나 중요한 일에 대해 결정 장애를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들은 성장하면서 융통성 있고 원만한 성격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옳지 못한 일을 보고도 이를 저항하지 못한 상처 때문에 스스로는 깊은 무력감과 결정한 일을 끝까지 추진할 힘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내면아이를 극복할 경우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실천하며,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사왕도 하나님 신앙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극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온전함 안에는 “내 안에 있는 내면 아이와 상처와 죄악을 극복하고, 하나님 안에서 포용력을 갖추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안에서 뜻이 바로 서면, 다른 모든 일을 끌어안기에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이죠.

 

아사는 하나님 신앙을 통해 내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포용력을 갖춘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아사왕은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구원 받은 증거인 정직함과 온전함으로 나라를 다스려 남 유다를 크게 안정시켰습니다.

 

나가며...

여러분은 앞서 말한 여인의 예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상담사는 그녀에게 “옳지 못한 일에 대한 극복”을 요구했습니다. 동시에 관계를 회복할 끈 역시 그녀에게 있음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살인자의 누명을 쓴 아들을 둔 어머니와 아들이 감옥에서 면회하는 장면을 영화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면회장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만 보일 뿐, 범죄자와 일반인의 구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짓지만 결국 상처를 줬던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부모는 부모이고, 할머니는 할머니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상처는 그 관계를 풀 열쇠 역시 나에게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저널리스트인 필립얀시는 ‘단단한 진리’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물론 인간은 부패했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결국 그가 판단하는 인간도, 세상을 끌어안아야 하는 이유도 모두 하나님 때문에 품어야 하고, 끌어안아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물론 그의 책은 하나님 안에서 진리에 대한 단단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준이 없는 무조건적 포용은 무책임과 다르지 않습니다. 반대로 날카로운 기준만 있고 포용적이지 못한 것은 무자비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싫어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을 지켜내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방법은 어쩌면 어렵지 않은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준을 세우십시오. 그 다음은 있는 힘껏 여러분의 이웃을 끌어 안으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이 반드시 아사 왕과 같이 회복되고, 복을 받을 것입니다. 아사왕이 보여준 모범이 우리 신앙의 귀한 기준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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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사는 생활이냐 영생이냐(요12:24~26)

 

 

에디슨(T. A. Edison)은"필요는발명의어머니(Necessity is the mother of invention)."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뭔가 생활 가운데에서 필요한 것이 생기면 이것을 위해 연구하고, 결과물을 얻어낸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두우면 등을 발명해 어둠을 비추고, 내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녹음기를 발명하거나, 먼 거리를 달리기 위해 자동차를 개발하는 것이 바로 이런 필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이 필요들에 의해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터넷, 인간관계, 멋진 자동차, 금융 등 그 모든 것이 바로 이 ‘필요’ 때문에 생겼기 때문이죠.

그러나 현대사회가 인간이 욕구에 따라 살아가도록 잘 돕는 사회일지는 몰라도, 진정한 인간의 요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화>

서울에 고시원에 사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고시를 준비하는 청년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월 25만원짜리 쪽방에 세들어 사는 취업 준비생입니다. 이 학생은 어렷을 때 꿈이 화가였지만, 부모님이 사업에 실패하고, 지금은 홀로 서울에서 생활을 해가는 청년이 된 것이죠. 이 학생은 시급 5500원짜리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4시간을 근무하고 나면, 22000원을 얻을 수 있게 되는데, 한 달에 방세와 공과금을 이 아르바이트를 통해 충당하는 것이죠. 그리고 나머지 식대와 생활비를 위해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직장을 갖지는 못한다고 해요. 취업을 준비한다고는 하지만 꿈을 지키고, 꿈을 키울 수 있는 시간도 물질도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죠. 그야말로 지금의 필요를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활이 지속될 뿐입니다.

 

이번에는 어떤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주부가 아이를 낳고, 1년이 지나자 그 동안 남편과 모은 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해요. 맞벌이인 이 부부에게 고민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계산을 해보니까... 지금 버는 남편의 월급에서 딱 80만원만 더 벌으면 생활이 될 것 같아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고 해요. 그런데 교통비며 부대비용으로 50만원 이상이 들어가고, 아이 의탁과 돌보미 등으로 30만원 정도가 들어가니까.. 2살 된 아이를 돌보지 못한 대가로 벌고 남은 돈 80만원은.. 아이에 대한 미안함에 비하면..너무나 적은 돈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생활을 위해서만 살아가도록 시스템화된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소비적으로 착취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이 세상은 인간에게 적절한 일거리를 주고,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도록 해야 시장경제가 운영이 되니까.. 인간의 꿈이나 진정한 욕구보다 그야말로 시스템을 위해서 사람이 이용되는 구조가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 인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노동도 병들어버렸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을 포기해버렸다는 사실에서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이죠.

그야말로 필요에 따라 소비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자신의 순수한 동기를 위해서, 꿈을 지키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소비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이죠.

 

그러나 토마스는 말합니다. "나는 부당하게 나를 사랑하다가 나를 잃어버렸습니다.(요12:25) 그리고 오직 주님만을 찾을 때에 나 자신과 당신을 모두 찾았고, 그 사랑에 힘입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p174)"

영어로 Need는 욕구, 필요를 의미합니다. 그야말로 나의 필요, 내가 사랑하는 것을 위해 이 세상이 죄를 짓고, 우리 모두를 병들게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토마스 역시 이 모든 것이 실은 ‘나를 부당하게 나를 사랑하다가 천하보다 귀한 나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 말씀드리자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이 그대로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욕구나 필요 즉 ‘Need'를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은 필요’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영어로 Want는 내면으로부터의 진정한 필요. 또는 미래에 대한 요구를 말할 때 사용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환경에 따라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을 사모하도록 설계된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외부의 환경과 필요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니드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원트 즉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살도록 설계되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현대인들이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해 소비하는 것은 돈도 인간성도 아닌 어쩌면 더욱 중요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잃어버렸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원이란 무엇일까요?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과 부활로써 이루신 속죄를 믿음으로써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 3:36, 요 5:24, 롬 5:10, 엡 2:1-8).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진정한 생명이 되시는 것이죠(요 6:33, 요 14:6))

영생은 지금 내가 누리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지금 내가 기뻐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안타깝게도 그 삶은 영생을 누리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없는 것이죠. 이 영원한 생명력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인도해낸 하나님의 능력이고, 기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진 사람의 여유이고, 세상이 뭐라고 하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제 멋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한 농촌 마을에 두 가정이 이사를 왔습니다. 한 가정은 기획귀농을 했어요. 오자마자 땅을 사고 전원형 집을 딱 짓고, 자기 땅에 함부로 난 논두렁으로 가는 물길을 흙으로 딱 채워 막는 센스를 보여줬죠. 오자마다 밭을 사고, 그동안 도시에서 번 돈을 전부 쏟아부었죠.. 그리고 농촌에서도 최상의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애썼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도시생활을 농촌으로 옮겨온 것뿐이지.. 곧.. 파산하시고 서울로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가정은 거의 빈손으로 귀농을 했어요. 오자마자 흙집을 수리하고, 마당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그리고 작은 십자가종을 풍경대신 처마에 달아놓았어요.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묻자.. 농촌에 살려고 왔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저것 불편한 것이 많았지만, 품일을 나가며, 나중에는 마을에 학원이 없는 것을 알고, 자청해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은 일 때에는 일하고, 다른 때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몇 년이 지나 물었습니다. 지금 기쁘세요? 네, 기쁩니다.

 

이분은 도시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느 날 지금의 직업과 도시생활이 결코 신앙생활을 온전히 해낼 수 있도록 돕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물론 어느 곳이나 사람이 사는 곳은 다 같겠지만, 그분은 째는 예수님처럼 생명을 대하는 감수성을 갖고자 째는 도시가 잃어버린 노동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째는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라야 영생하도록 보전하신다는 말씀에 따라.. 경쟁과 소비와 무가치가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그야말로 좀 더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 농촌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저는 저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생을 좇는 삶을 쉽게 포기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유는 영생에 대해 잘 모르거나 지금 삶을 포기해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영생을 좇는 것이 당장 내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포기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을 누리셨고, 도전하셨습니다. 꿈꾸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인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처럼 도전하고 꿈꿔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꿈을 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땅 위에 썩어질 것을 심는 것을 말하지 않고, 하늘 위 영원한 것을 사모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삶을 말합니다. 이것은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생활과 다릅니다. 이 영생은 뜻을 좇아 살아가는 삶입니다.

저는 소망합니다. 단 한순간을 살아도 산 것 같이 산다면 나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저는 스스로를 천박함에 쳐 넣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제 삶이 구차해질 때 그렇습니다. 기쁨이 없을 때 그렇습니다. 실은 제가 생명을 만들어 내지 못할 때 그렇습니다.

 

천박함은 구차한 삶에서 나옵니다. 생명에서 멀어진 공동체나 사람일수록 ‘천박해집니다.’ 그러나 생명적 삶은 구차하지 않고, 떳떳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떳떳하셔야 합니다. 세상은 여러분의 정당한 노동조차 돈 앞에서 구차하도록 만들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이 흘리는 땀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산제사임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우상으로 여겨지는 맘몬 즉 돈과 권력에 굽신거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굽신거리지 않았고, 다만 생명이 무엇인지 드러내심으로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그야말로 욕구에 따라 자신을 낭비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을 따라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길 원했던 것입니다.

 

본문 25,26절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 사랑함으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나님을 따르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귀히 여기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은 우리의 모든 궁극적인 목표와 원함이 하나님께 있을 때 가능합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지금 이대로도 괜찮을까?” 나는 정말로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고, 영생의 사람을 위한 도전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생명은 건강이나 행복을 포함한 본래 하나님이 내게 설계한 뜻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꿈을 갖고 달려가는 것이란 꼭 판사나 대통령이나 부자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고, 실은 여러분에게 꼭 맞는 옷을 입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 이 땅이 줄 수 없는 평안과 행복, 참 기쁨(joyful) 그 영생을 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어른 세대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이분들의 신앙, 그리고 이 어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안에서의 꿈을 다시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또 어른들께서는 지난 시간 이 땅이 줄 수 없는 영생의 기쁨을 잃어 버리셨다면, 어서 이 기쁨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영생을 다시 소망하는 거룩한 꿈을 꾸시는 그런 귀한 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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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얌과 아사(왕상15)

 

들어가는 말

 

1. 하나님이 하나로 묶은 것

오늘 이야기에는 아비얌과 아사가 나옵니다. 우선 아비얌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15장 1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열여덟째 해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 성경은 북이스라엘의 왕의 통치 년도에 맞춰 남유다의 왕 아비얌의 등극 시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임금을 이렇게 묘사한 것은 이 두 나라가 서로 전쟁을 하여도, 결국 한 나라, 한 백성임을 말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인생은 하나님이 하나로 묶은 것을 인간이 어떻게 둘로 만드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비얌은 그의 아버지 르호보암이 행한 모든 악행을 그대로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권력을 사랑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져버린 경우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책임했습니다. 또 백성들 앞에 무책임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유다 공동체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세우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산 정상으로 가는 오솔길이 여러 갈래 일뿐 결국 정상은 하나가 아닌가. 진리를 두고, 여러 종교가 결국 분란을 멈추고 하나 아닌 가라는 무책임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도 무책임한 말입니다. 심지어 기독교에는 진리가 없다는 말은 무책임을 넘어 죄악에 가까운 말입니다.

아비얌의 아버지 르호보암은 하나님께 가는 길을 병들게 했습니다. 아세라 상과 우상숭배가 그 증거입니다.

그의 정치는 하나님 아닌 사람의 인기에 있었습니다. 인기를 얻고자 우상숭배를 하고, 그리고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예배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실제로 그들이 산당에 모여 행한 일은 우상숭배일 뿐입니다. 자신들이 그 전부터 믿어왔던 전통과 믿음으로 여호와의 얼굴을 가렸을 뿐입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신앙을 눈감아 주는 여로보암과 아비얌의 통치에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 유다 땅에서도 우상숭배가 이뤄졌습니다.(왕상14:23)

 

우리가 기독교 신앙 가운데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왜 당신들은 당신의 종교만 옳다고 말합니까? 당신은 왜 관용적이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에 대해 뭔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한 사람들의 신앙을 말합니다. 이 세상이 죄로 인해 온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에게 무책임하게 여기도 저기도 모든 것을 다 인정하라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인 것이죠. 그래서 다른 종교와 달리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가 틀어진 것을’ 죄라고 말하고, 그 죄 때문에 그 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그 죄가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대로 예수님만이 진리이고 구원의 길이라고 믿고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오히려 책임 있는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비얌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책임 있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한 가지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실은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나는 사람입니다. ” 그는 여러 사람의 인기를 얻고자 정치적 태도를 취했을 뿐. 생명과 신앙의 태도를 보이지는 못했습니다.

성경은 그의 태도와 다윗의 태도를 비교합니다. 15:3절에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다.”

다윗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죄를 깨닫는 마음이고, 자복하는 마음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일까..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이 자꾸만 생각이 납니다. 아무리 믿음을 지키려 해도 지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방 잊기 때문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사모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모해야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비얌은 그 신앙적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믿음을 잃음으로 3년이란 짧은 기간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아사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15:9) 아사는 아비얌을 이어 유다왕으로 세워집니다. 아사는 아비얌과 한 형제로 오해할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15:10절의 말씀입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라.. 그리고 그가 태후에서 쫓겨난 것으로 보아, 아사의 어머니가 확실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사는 마아가의 손자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우상숭배를 일삼던 할머니 마아가가 아비얌이 죽자 스스로 태후 즉 왕의 어머니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이스라엘을 전횡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사는 종교개혁과 더불어 할머니 마아가를 태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사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만든 사람이 되고, 아비얌과 마아가는 모자사이가 아니라 마치.. 어머니와 통간한 아들 관계처럼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습성을 볼 때 또 역사서는 마아가가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이와 같은 행위를 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사는 야비얌과 달리 41년이란 세월을 통치합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11절,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선 아비얌이 행했었던 남색하는 자들을 쫓아내고, 모든 우상을 제거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할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우상과 아세라 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태후의 위를 폐했다고 1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이 이룬 아세라 목을 찍어 기드론에서 불태웠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우선 아세라는 여성최고신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아세라와 우상은 따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아세라는 우상을 둘러쌓기 위해 만든 자연히 자란 나무가 아닌 ‘억지로 심어 놓은 나무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바알 제단을 허물고, 그 곁에 있는 나무들을 베어 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 역시 왜곡과 변질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신 것은 다 선하지만 인간은 이것을 왜곡한다.”라는 말이 떠 올랐습니다.

왜냐하면 “노아는 창세기 12:8,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합니다. 또 아브라함은 창21:33절에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에셀을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에셀은 아세라의 다른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 이젠 우상을 숭배하는 것으로 왜곡되거나 변질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왜곡으로부터 아사는 통치의 질서와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는 형 아비얌과 달리 무책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윗과 같이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친 할머니를 폐위하고 이스라엘의 정신을 지켜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할 수 있습니다. 혹시 그가 종교적 광기 때문에 냉정하게도 할머니를 내친 것일까요? 아니요. 그것이 나라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는 것임을 아사는 하나님을 통해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책임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사는 형 아비얌의 통치에서 또 어머니의 우상숭배가 어떻게 백성들을 병들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지게 하는지 봐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실 “우두머리”가 되 보기 전에는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 저건 저렇게 해야한다라고 말은 해도.. 막상 우두머리가 되면 이해관계들 때문에 쉽게 일을 처리하지는 못하는데..., 아사는 믿는 대로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상당히 놀라운 일입니다. 아사는 하나님 앞에 악행을 정리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의 통합을 원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통합은 이처럼 반드시 죄의 문제의 해결안에서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예화>-어떻게 아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가정환경이 좋지 못한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가족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아직 어리기에 그대로 참았고, 나중에는 스스로 생기는 분노를 잠재우는데 탁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집을 나선 들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답습된 습관은 시간이 지나 잊혀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에 늘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어른이 되버렸다고 합니다. 분명 옳지 못한 일인데도 자신도 모르게 이 일을 용인해버리거나, 심지어 입장이 뒤 바꾸는 일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다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성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경험한 세상은 분명 뛰쳐 나가고 싶은 현실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다시 불의와 타협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사도 이 사람과 다름없는 현실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죽자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종교개혁을 이루고, 할머니의 욕심과 종교 혼잡주의를 꺽었으며, 왕권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사에게 놀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개혁은 기존 현실와의 관계 사이에서 상당한 감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본토 친척 집을 떠나 할머니를 폐위하고 우상숭배와 구습을 끊어내는 노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끊임없이 누나로 속여 팔아먹은 왜곡된 모습들과 닮아 있는 할머니와 아비얌 왕의 불신앙과 처신들 속에서 지혜를 배워, 다시는 이런 것들과는 타협하지 않되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가길 원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곡된 왕정 가문에서 태어나 그가 결국 하나님 신앙으로 이겨낸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할 결단이 분명한 것이죠.

 

그래서 아사에게서 지혜를 배우면 어떨까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각 자의 환경에서 왜곡을 경험합니다. 왜곡은 비틀어짐을 말합니다. 선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마치 매 맞는 어머니 편에서 아버지에게 저항하지 못한 아이가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이 아이를 어떻게 할까요? 일단 빼내야 합니다.

계모에게 학대당하고도 계모와 잘못된 애착을 형성한 아이들의 예, 그리고 분명히 알려줘야 합니다. 무엇이 나쁘고, 니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와 같은 어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란 것을 알려주고, 그래도 세상에서 잘 살아야만 한다고 내공을 길러줘야 할 것입니다.)

 

아사 역시 왜곡된 사람들과 마주쳐야 하는 숙제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아사는 왜곡된 현실과 마주했습니다. 그래서 14절에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론 왜곡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현실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산당은 분명 왜곡되고 온전하지 못한 현실, 가정, 회사, 관계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사는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그 자비와 공의에 편에서 여호와 앞에 온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가 하나님을 통해 가능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타협이 아닙니다. 영적인 주도권을 하나님께 두고 있는 한 오히려 아사는 아직 치유되어야 할 왜곡된 현실을 남겨두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부모이고, 할머니이고, 이스라엘이며, 당시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완전해질 가능성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사는

첫째로 하나님과의 믿음 안에서 온전한 신앙 인격을 실현했으며, 따라서 왜곡과 진리를 구분할 수 있는 마음과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둘째로는 왜곡된 현실을 개혁하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아 행동했으며,

셋째로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가지를 하나님 안에서 인정하며 통합해 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를 포함해 우리는 어쩌면 여전히 왜곡된 현실에서 종노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종의 마인드로는 온전한 삶의 지도자로 살 수 없습니다. 고작해야 장난질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과 현실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과 처신을 병들게 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아사의 이야기를 통해 끊을 것은 끊고, 마주할 것은 마주하는 지혜를 가지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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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에 관한 예화1

자료실 / 2014. 8. 12. 11:38

신앙인의 책임감

 

방관자효과(bystander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입니다.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이라고도 하고 구경꾼 효과라고도 말합니다. 1964년,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s)라는 여인이 뉴욕의 자기 집 근처에서 새벽 3시 30분경 30분 동안 반항하며 강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집 주변의 40가구에서 그 소리를 들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를 구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라테인(Latane)과 로빈(Robin)이라는 심리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대학생들을 실험 명목으로 불러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방을 여럿 나누어서, 어떤 사람들은 혼자 있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럿이 같이 있게 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문틈으로 연기가 새어들게 했습니다. 혼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75%가 2분 이내에 알렸고, 여럿이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6분 이내에 불과 13%만 알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럿이 있으면 서로 책임을 미루는 '책임감의 분산' 현상이 일어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때로 예배가 다 끝났는데도 에어컨은 계속 일을 하고 있고, 앰프는 설교자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모두가 다 갔는데 불은 여전히 밝게 켜 있고, 과자나 빵 부스러기가 방치되어 있으며, 방마다 사용한 흔적들을 그대로 남겨놓아 보는 이들에게 불평으로 소리를 하게 만듭니다. 다수가 사용하기 때문에 서로 방관하는 것입니다. 방관자 효과가 나타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상황의 애매함입니다. 위급한 상황인지 판단하기가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다수의 무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눈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책임감 분산입니다. '누군가 도와주겠지'하는 책임감 분산입니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방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경영해 본 분들은 직원은 능력보다 책임감이 우선이라고 말합니다. 책임감이야말로 사회생활의 최고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책임을 강조하는 책인 “무책임사원(로저 코너스, 톰 스미스 저)”에서 “책임감 없는 직원은 당신의 목표를 실현해 주지 않으며 문제가 발생하면 처벌을 피하려고 잔머리를 굴리거나 다른 사람 탓을 할 뿐이다. 이런 직원이 많아지면 조직에 불신과 분노가 쌓이고 성과는 바닥을 치며 리더는 좌절하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안창호 선생은 “책임감이 있는 이는 역사의 주인이요, 책임감이 없는 이는 역사의 객이다.”이라고 말했습니다.

급격한 산업화를 통한 고도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사회는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고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 풍토가 만연하여져 자연스럽게 책임감은 약화되었습니다. 권리를 찾는 목소리는 커졌는데 의무를 말하는 목소리는 작아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무한 경쟁의 전쟁터에 있는 아이들에게 부모들은 부족함 없이 채워주다 보니 무한개인주의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실종되어 책임감 교육은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책임감은 인내성, 주의집중, 자기통제, 자율성, 끈기, 성취동기, 의지력, 신뢰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책임감은 맡은 일을 완수하고자 하는 의욕과 자발성이 강한 정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책임감(responsibility)의 사전적 의미는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를 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책임감은 무책임, 책임회피, 투사, 무반성, 불평불만 등의 성격 경향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책임감 있는 사람은 스스로에 대해서 자존감을 느끼며 동시에 자기가 타인에게도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느낄 수 있게끔 행동합니다. 사회적 책임감이 높은 청소년이 낮은 청소년에 비해 사회적 행동을 더 많이 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책임을 잘 지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합니다. 자기에 대한 책임감과 타인에 대한 책임감, 도덕적 책임감, 법적인 책임감, 사회적인 책임감이 있는 사람들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냅니다.

책임감은 네 단계로 발달된다고 합니다. 첫째, 무지 혹은 본능적 행동의 단계로 책임감의 결과가 자신에게 미치는 고통 또는 불쾌감에 의하여 책임을 수행하는 수준으로, 이는 영아기에 주로 나타납니다. 둘째, 상벌에 의해서 행동하는 단계로 교사, 부모 등에 의하여 관리 감독되어 자기의 책임을 수행하는 수준으로, 이는 사춘기까지의 외부적 통제의 시대입니다. 셋째, 사회적 승인에 의한 행동의 단계로 집단의 의견이 행동을 결정하는 동기가 됩니다. 여기서는 행동이 가져다 줄 구체적인 상벌이 아니라 사회적인 칭찬이나 비판을 중요시합니다. 넷째, 내적 규제의 단계로 공통의 선을 위하여 행동하는 수준입니다. 곧 자기의 양심이나 합리적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최고의 단계입니다(Mcdougall). 신앙인은 신전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의식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보고계시다는 최고수준의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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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이승훈의 교육사상(오산학교)  (0) 2014.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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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을 넘는 제자도(막8:34~38/겔18:25~32)

 

들어가는말

오늘 우리 사회를 비유하자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솝우화 중에서 자고새에 대한 한 편을 들려드리겠습다.

 

집 마당에서 두 마리의 싸움닭을 키우고 있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농부는 시장에서 우연히 길들인 후 팔면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자고새를 발견했습니다. 농부는 이 자고새를 구입하고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농부는 닭들과 친하게 지낼 것으로 기대해 마당에 같이 놓아 키우기로 하죠.

근데 싸움닭들은 자고새를 닭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고새를 못살게 굴기 시작합니다. 닭들이 부리고 쪼아대고 따돌리자 자고새는 서럽고 외로워 그들과 떨어져서 외톨이로 지내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기를 몇일 후, 자고새가 보이지 않자 이제는 수탉들끼리 싸우기 시작합니다. 이 광경을 본 자고새는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내 자신을 자책할 필요가 없군. 내가 못나서 당한 것이 아니야. 나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자비심 없이 싸우는 원래 못된 놈들 아닌가

 

사회학적으로는 흔히 이런 현상을 “집단 광기” 또는 “패거리 심리”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런 집단 현상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들 세계에서도 공공연히 혹은 은근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점을 아실 것입니다. 결국 이 이솝우화가 말해주는 것은 집단 광기에 빠진 사람들은 “누군가를 해치거나 괴롭히면서 서로 의리 있는 척, 용감한 척 하지만 결국 이들은 자신들 밖에 모르는 비겁한 자들” 일뿐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사회상 같지 않으십니까?

오늘은 평화통일 주일입니다. 우리 민족은 분단의 아픔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해방 이후 민족문제 역시 해결하지 못한 체 남북과 동서 분열 등 많은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중에서 우리 사회에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교회문제를 중심으로 그 중에서도 분열로 신음하고 있는 교회를 위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본래의 교회 정신은

카톨릭교회와 달리 우리 개신교회가 분파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반인들이 개신교회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갖는 이유 중에 하나인 이 분파에 대해 여러분은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실상 한국 교회의 분열이 대부분 권력 싸움에 의한 분열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양을 부탁하며, 또 함께 하실까요?

한국의 개신교회는 누가 뭐래도 장로교회가 주류 교단임을 부정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독 장로교회만이 100개가 넘는 종파가 범람하게 되었죠. 여러분은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선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상은 실은 이렇습니다.

먼저는 신사 참배에 관한 문제로 고신측이 제일 먼저 분열되었고, 신학을 충분히 학문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이유로 기장측이 두 번째로 분열되었으며, WCC총회 가입 문제로 마지막 합동측이 분열한 것이 오늘까지 이어져오는 실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후에 분열들입니다. 이들 분열은 신학적 차이가 없고, 교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도자들에 의해 100개가 넘는 분파를 거듭했다는데 있습니다. 그 이유는 권력을 갖고자 한 사람들의 행태였음을 알 수 있죠. 쉽게 말해서 나도 총회장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면 교회를 데리고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사실 장로교회는 매우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채택하고 있음에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예를 들어 성공회에서 떨어져 나와 그 성직 제도를 그대로 갖고 있는 감리교회는 사제인 목사의 권위가 월등한 반면에 칼빈에 의해 개혁교회를 이룬 우리 장로교회는 목사와 평신도들 가운데 선임한 장로가 당회를 구성하여 당회와 제직/공동의회가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보충해야 할 부분들이 나타나기도 했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믿음을 요구할 때 민주적 결의로만은 하나님의 뜻을 충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적 권위가 인간의 민주질서로만 통용될 수 없음을 안 교인들이 회중제도. 즉 목사와 집사의 구성만을 인정하는 정치제도인 회중교회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즉 교회가 목사의 목회 영역은 존중하면서 이 밖의 다른 사항에 대해서는 민주제도를 적용하여 치리하도록 한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은 위에서 말씀드린 고민과 실천에도 불구하고, 감리교회나 침례교회나 할 것 없이 장로를 채택하여 교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경우가 생겼다는 점입니다. 결국 본래에서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 실은 모두 불신앙과 욕심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결국 신앙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쉬고/

지난 2013년 미국의 교인 10000명의 교세를 가진 롱 아이슬랜드 연합감리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교회 앞에 한 노숙자가 주일 구걸을 하는 것을 어느 사람이 목격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교회의 담임목사가 부임하는 날로 교회는 큰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죠. 그래서 이 노숙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그는 예배당안으로 들어갈 때 제지를 받고, 그나마 맨 말석에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신임 목사님에 대한 소개가 있자. 앞에 연단에서 그 목사님은 보이지 않고, 맨 뒤 한 노숙자가 앞으로 걸어오는 것을 교인들이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노숙자로 분장을 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 목사님은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1절까지를 읽어 내려가셨다고 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다.... 양과 염소의 비유의 말씀을 읽기를 마쳤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인은 고개를 떨구고 차마 앞을 바라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 (예레미야 스티펙)

롱 아이슬랜드 교회는 본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증거에서 출발한 연합감리교회 소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스티펙이라는 목사님을 통해 비로소 교회의 설립 목적이 회복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죠. 그야말로 변질된 교회가 말씀으로 돌아가도록 회개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교회는 예수님을 닮는 것에서 하나로 연합될 수 있을 뿐. 다른 어떤 노력도 수고로울 뿐이란 사실을 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사회적 분열들과 복음

/쉬고/ 이어서 우리 사회는 어떨까요? 역시 수많은 분열과 불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쉬고/ 기억하십니까? 2009년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부엉이바위에서 자결을 했습니다. 이때 BBK 문제로 도덕적 문제를 제기 당했던 다른 한 대통령은 사대강 사업과 소고기 수입, 맥쿼리 등의 많은 이득을 챙기고도 살아남았습니다. 우리의 딸들은 OECD국가 중에서 가장 열악하게도 100:63비율로 남자보다 적은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취업을 하지 못한 성인이 다수이며, 세월호 사건 역시 결국 어른들에 의해서 아이들이 죽은 것과 다름 없다는 사실 때문에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아이들조차 지켜낼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730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단원고가 있는 안산을 포함해)여당은 11지역에서 야당의 4개 지역을 앞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세월호 심판론이 부각되었음에도 진 선거라 충격이컸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분별력 없는 국민을 욕하기도 하고, 야당과 여당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근본적으로 이 세상과 한국사회에 대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조차 지킬 수 없을 만큼 이 땅은 타락했고, 우리의 아이들도 지킬 수 없을 만큼 불행한 사회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진작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곁에서 이 사실을 바로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보다 나은 삶을 기대할 때 실은 가장 먼저 내가 심판받아 마땅한 사람이며, 이대로의 세상은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났다면 적어도 예수님을 죽였던 세상의 권력과 힘에 대해 우리도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흉기와도 같은 ‘힘’을 얻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죽이고, 우리의 썩어질 육신만을 살찌운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산참사, 소득양극화, 사대강, 세월호 사건을 보십시오. 이 사회는 불행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으며, 물이 고여 악취를 풍기듯이 아무런 변화의 노력도 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분열의 불의함들이 실은 아무도 벌어진 일에 책임지려 하지 않으려는 ‘무책임’과 연관이 있음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분명히 로마제국에 의해 죽은 예수님을 고백할 때, 본디오빌라도 라는 한 총독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 굳이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혐의를 찾지 못했고, 다만 집행의 책임자에 불과했던 사람의 이름을 기록했을까요? 이것은 교회가 단순히 예수님을 죽인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함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 스스로 불의한 선택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지도록 요구했던 기독교회의 신앙고백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결국에 죽음을 결정한 빌라도를 기억함으로서 신자 스스로 책임 있는 행동을 하도록 촉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죠.

 

냐면 이와 같은 고백은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우리의 모든 죄를 책임지셨다는 신자들의 찔림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찔림이 예리한 칼날이 되어 자신의 양심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 그 책임을 물으시고, 그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조차 아들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롭고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조차 살 수 없는 이 세상에 대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큰 환멸과 찔림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미 죄와 저주가운데 놓였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늘에 시민권을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은 세상과 자신에 대한 강력한 부정이자. 하늘에 것에 대한 소망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비로소 하늘의 마음이 내 마음 땅에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18장 32절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잘 들어 있습니다.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쁘지 않으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아라” 이는 하나님의 마음이 본래 심판에 있지 않고, 우리를 살림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가 ? “막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야말로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와 복음을 위해 살지 아니하면 세상과 같이 심판을 받겠지만 예수와 함께 죽고 살면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나가며..

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은 고작 12척의 배로 300여척의 왜구의 배를 물리친 사건입니다.

이순신장군은 좁은 길에서는 한 명이 능히 수천 의 병사도 막을 수 있다고 병사들을 이끌었습니다. 또 누구든지 죽고자 하면 살 것이란 병법서의 구절로 군사들을 독려해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좁은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는 죽기를 각오하고, 공중권세 잡은 마귀와 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로 이 땅의 불의함을 고발하셨고, 또 회개를 말씀하시다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이 이름 외에는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죽고자 하면, 영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살고자 하면 영원히 죽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책임과 권력과 같은 죄로 인해 분열된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분열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모인 무리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힘을 가지려 하지 마십시오. 그 힘이 영원히 여러분을 망칠 수 있습니다. 도리어 여러분의 힘을 나누고, 여러 신도들과 함께 화평을 이루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도이고, 우리 장로교회의 법도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산제사입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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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렘17:5~11)

 

들어가는 말

“고난을 별로 겪지 않고 항상 인정을 받아 왔으며 별로 푸대접을 경험해보지 사람은

결혼 생활에서 오는 긴장과 갈등을 견뎌내기가 어렵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실 결혼 후의 남녀 갈등만큼 풀기 어려운 숙제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명한 부부들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결국 함께 가는 법을 배우죠. 그리고 가정마다 나름의 갈등을 푸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유난히 상하구조가 발달되었습니다. 말에도 영어에는 없는 존대어가 있고, 나이에 따라 서열을 자연스럽게 나누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남자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서열을 정하는 일임을 살펴볼 때, 이 나이라는 것이 남자들 사이에서는 나름 관계를 설정하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자 분들은 무엇으로 서열을 정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

 

그런데 사람이 있는 곳에는 갈등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주재인 등나무와 칡나무는 갈등의 의미로써 이 두 나무가 서로 엉켜서 절대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지 현재 대한민국은 바로 이 갈등 때문에 많은 몸살을 낳고 있습니다. 이건 교회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죠. 그야말로 갈등을 잘 해결하는 것이 개인과 공동체의 중요한 경쟁력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 사회는 심각한 소통부재와 권력남용이 문제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갈등의 문제가 생길 경우 어떻게 반응할까요? 아마도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의 예를 통해 그 경우들을 한 편 살펴보시죠.

번째 방법은 갈등이 생겨도 아예 문제로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무시해버린 결과 그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은 채 시간 속에 묻혀버리게 되지요. 이것은 실은 문제를 회피하는 경우이며 절대로 긍정적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번째는 갈등을 조용히 처리하겠다면서 뒤로 물러섭니다. 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그들의 죄를 내어놓고 회개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동산 나무 뒤에 숨어버린 것이 바로 그 좋은 예이지요. 조용한 처리가 아닌 실은 감춤인 것이죠.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자기가 연루되어 있음을 피해보자는 심산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죠.

그리고 번째는 갈등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내가 말해봐야 아무도 듣지 않을 거야.” 또는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되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 결과도 역시 문제만 점점 더 증폭되다가 나중에는 엄청난 폭발로 이어집니다. 대부분의 공동체에서 담임목사가 나가게 되거나, 인사 문제가 생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외면은 잠재된 폭탄을 끌어 안은 것을 말하지 결코 정상적인 태도는 아닌 것이죠.

 

번째는 상황을 모두 영적인 문제로만 보는 태도이지요. 즉,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로마서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떠맡겨 버리는 겁니다. 이 같은 태도 속에는 사실 갈등을 풀어보겠다는 진지함이 빠져있지요. 진지함, 혹은 진정성이라고 여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분명 서로 간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반면교사의 역할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러나 만일 죄가 들어와 공동체가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면,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인내할 문제가 아니라 해당되는 문제를 회개하거나 고쳐야 한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갈등에 대해 부정적으로 대응하는 다섯 번째 방법은 갈등과 분노의 감정을 병 속에 담아두었다가 갈등이 있을 때마다 그 병 속에 담겨있는 과거의 감정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는데 이 같은 싸움은 한 번 싸움이 시작되면 여간해서는 끝나지 않습니다. 대부분 교회 재판국까지 가는 일들이 그렇습니다. 이 원한 관계는 사실 누구도 풀 수 없을 만큼 매우 견교한 갈등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대응법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문제의 원인을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지요. 이 같은 경우 죄도 용서받지 못하고 갈등도 치유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한 공동체에서 어떤 사건이 주는 의미는 실은 구성원 각자의 무관심과 비정함, 무책임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살펴봅니다. 특히 구성원들 간에 유착관계가 심한 공동체일수록 좀처럼 갈등이 풀어지지 않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갈등 해결의 실마리는 유착관계 때문이 아니라 바로 모두 남에게 탓을 돌리는 무책임에 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갈등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이 같은 부정적인 대응법으로부터 떠나 갈등의 원인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어놓고 먼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올바른 해답을 찾으려는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나 그 안에 진정한 해결책과 기쁨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원리는 무엇이 있을까요?

첫 번째 원리는 나 자신도 언제나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나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잠언에서도 “자신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지만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고 격려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갈등 앞에서 고통 받을 때마다 “주님, 저는 이 모든 갈등을 주님께 내어놓습니다. 주님께서 해결해주십시오. 그렇지만 저의 잘못을 고치는 일로부터 먼저 시작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해야겠지요.

 

그리고 두 번째는 상대방에 대해 내가 취한 감정적 반응에 대해 내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만약 내 기분이 나쁘다고 무조건 다른 사람을 탓했다면 그것은 상대방에 앞서 나의 내면의 성품이 잘못되어 있음을 스스로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세 번째 방법은 나와 갈등관계에 서있는 상대방의 입장에 내가 서보는 겁니다. 일단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면 왜 그가 그런 생각과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과거 친구와의 갈등 때문에 고통받았던 경험을 갖고 있는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이해시키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자기 자신을 매일 다그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 이해받기보다 남을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이 애쓰게 해주소서.”라는 기도문으로 유명한 성 프란시스를 기억나게 하는 지혜로운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갈등은 각자의 다른 입장이나 다른 입장으로 덮기엔 위험한 이기심 때문에 생겨납니다.

 

자 그럼 본문으로 들어가볼까요? 오늘 본문은 자기 성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절에서 말하는 삶은 실은 ‘가인’의 삶을 말합니다. 가인은 동생을 쳐 죽이고, 하나님을 떠나 살게 된 들사람을 말합니다. 지독한 불신은 실은 지독한 힘에 대한 맹신을 만듭니다. 누구도 자신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사실은 실은 가인으로 하여금 무기와 쇠를 다루는 야인으로 만들기에 적당한 동기 부여가 되었겠죠. 그런데 실은 우리 문명과 인간의 성공의 밑바닥에는 사실 이런 가인이 갖고 있는 불안감과 불신이 꿈틀대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것입니다. 힘을 가지려는 인간의 속성은 실은 바로 이러한 불신에서 출발함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가인적인 인간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죠. 무릇 사람을 의지하고(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을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은 분명 6절과 같이 좋은 일들을 밀어내며, 가시처럼 사람들에게 굴어서 결국 자신 뿐 아니라 주변도 가시밭으로 광야로 만드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토마스는 우리 자신이 그리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의 말씀을 빗대어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종종 우리 안에는 은혜가 없고, 때로는 총명도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죠.

우리는 고작 우리 안에 작은 빛을 내고 있을 뿐인데 그나마도 꺼트리기가 쉬우며, 그 불이 꺼지면 그나마 내면의 어두움을 바라보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악을 행하기도 하며, 잘못을 변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작은 문제는 책망하면서도 우리 속의 큰 문제는 그냥 넘어갑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정작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 다는 점에 대해서는 둔하기가 그를 때가 없는 것이죠.

그러나 실은 자신의 일이 잘 되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을 판단할 이유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실은 다른 모든 것은 제쳐놓고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만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그 자신에 대한 돌봄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부패한 것이 바로 나의 마음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호와께서는 이 같은 나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꿰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떠나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힐난하는 그 힐난은 마치 자고새가 낳지 않은 알을 품음 같다 말하고 있습니다.

자고새에 대한 이솝우화 한 편을 들려드리고 마칠까 합니다.

 

집 마당에서 두 마리의 싸움닭을 키우고 있는 농부가 있었다.

어느날 농부는 시장에서 우연히 길들인 후 팔면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자고새를 발견했다. 농부는 이 자고새를 구입하고 집으로 가져왔다.

농부는 닭들과 친하게 지낼 것으로 기대해 마당에 같이 놓아 키우기로 한다.

근데 싸움닭들은 자고새를 닭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고새를 못살게 굴기 시작한다. 닭들이 부리고 쪼아대고 따돌리자 자고새는 서럽고 외로워 그들과 떨어져서 외톨이로 지내기 시작한다.

그러기를 몇일후, 자고새가 보이지 않자 이제는 수탉들끼리 싸우기 시작한다. 이 광경을 본 자고새는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내 자신을 자책할 필요가 없군. 내가 못나서 당한 것이 아니야. 나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자비심 없이 싸우는 원래 못된 놈들 아닌가

 

사회는 흔히 이런 현상을 집단 광기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런 집단 현상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들 세계에서도 공공연히 혹은 은근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점을 아실 것입니다. 결국 이 이솝우화가 말해주는 것은 집단 광기에 빠진 사람들은 “누군가를 해치거나 괴롭히면서 서로 의리 있는 척, 용감한 척 하지만 결국 이들은 자신들 밖에 모르는 비겁한 자들” 일뿐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신앙은 바로 이런 우리의 부패함을 스스로 하나님께 고발하고, 하나님의 편에 서도록 노력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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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그리스도를 본받아1(전1:8)

들어가며

신대원 시절 필독서로 읽었던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란 책이 있습니다. 캠피스 출신의 토마스란 뜻이 이 책 저자의 이름인데 그는 1380년에 시골에서 태어났으며, 수도원에서 평생을 살았던 수도자였습니다. 이 책은 천로역정과 고백록과 함께 3대 기독교 고전에 속한 책인데,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유익한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 있어서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읽어 볼 책 중에 하나입니다.

이번부터 오후에는 성경과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것들을 연결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의 글은 토마스의 것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1. 소금물

소금물이란 제목을 들으셨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짜다. 상하지 않는다. 눈으로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맹물보다 밀도가 높다.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금물을 한 컵 이상 마시라면 어떨까요? 아마도 이 물을 아무렇지 않게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음식이나 사람에게나 적당한 양 이상이 들어가면 바로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이 소금물입니다. 분명 염분을 보충해주고, 음식을 상하게는 하지 않지만, 이것이 좋다고 이 물만 먹고 살 사람은 없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을 조금 더 강박적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에 가슴에 뜨거움을 체험했을 때 앞에 선 강사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항상 성령 충만하셔야 합니다.” 저는 이 말처럼 부담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담임목사님께 여쭤봤어요. 어떻게 항상 성령 충만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담임목사님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라고 대답하시더군요.

그런데 저는 저도 모르게 집요하게 그 ‘거룩과 성령충만’이란 단어에 몰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아는 한 최대한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한 시간들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오히려 제 삶에 붉은 신호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첫째는 관계의 훼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세상은 너무나도 차이가 나 보였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도 가려서 만나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일반인들과의 정상적인 대화가 어려워서 답답한 적도 있었고,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을 피해 그야말로 ‘깨끗하게 살았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기쁨이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저는 절대로 ‘거룩함 자체’로 살 수가 없었고, 두 번째는 사람들과의 건강한 교재를 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죠. 심지어 좋아하는 이성이 있었는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고백을 하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그 작은 후배가 이런 저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본 날이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납니다.

 

두 번째는 인격의 훼손입니다. 그런 시간들이 길어지자. 저도 모르게 어떤 내적인 자만심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거룩함은 거룩한 표정과 행동으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거룩함 자체에서 나오는 능력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가식적인 행동은 꼭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도 모르게 그게 편함으로 가식적인 행동들이 저를 감춰지게 했던 것이죠. 그러나 어떤 식의 가면도 건강한 인격을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로 가면은 이면의 나를 가려주기보다 오히려 더욱 부패하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찢어진 보리자루처럼 시도 때도 없이 나의 연약함을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과 내가 다를 바 없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정상적으로 갖기 까지는 이 인격 장애를 고치기 위해 애썼던 기억이 납니다. 신앙은 인격 장애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보다 하나님 앞에 나은 사람이 많은 것이 하나님 보시기엔 더욱 수지맞는 장사란 사실입니다.”

토마스는 그의 책에서 이런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말합니다.

「 우리는 모두 연약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보다 더 연약한 사람은 없다는 생각을 굳게 지켜내야 합니다.(창8:21-노아제사, 이는 인간이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그리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더 공공연히 죄를 짓거나 흉악한 죄를 짓더라도 당신이 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당신이 죄를 짓지 않는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저는 연약함이 부끄러움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연약함은 죄와 연관이 있습니다. 가벼운 죄책감이 드는 것은 바람 같을 수 있지만, 저는 죄가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언제고 한 번은 죄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과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합니다.

그래서 죄가 있거나 죄성이 있다고 해서 그 죄가 나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만 죄의 뿌리가 얼마나 제 깊숙한 곳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알면 알수록 저는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과연 누가 있어 이 죄에서 자유할 수 있을까란 한탄이나왔었죠.

그런데 창세기8:21절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악하므로, 삭제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시는 땅을 물로써 심판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하다고 삭제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에 더욱 안타까워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할을 무엇일까요? 바로 서비스(인사, 마땅히 해야할 일) 하나님을 만나는 것. 예배이며 동행인 줄로 믿습니다.

 

2. 자신을 헤아려 보는 지혜

어떤 산골에 감자 농사를 짓는 한 농부가 거친 손을 하고는 하나님께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렸습니다. 평소에 글도 모르고, 고생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얼굴을 한 노인은 그러나 뭔가를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한 화가가 그의 손을 스케치하고, 색을 입혀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자 그의 친구가 말합니다. 자네 그림에는 온통 거친 흔적만 있는 손만 그려져 있을 뿐이군. 도대체 누가 이런 손을 가진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인가?

그러자 그 화가는 말했습니다.

“자네의 기도하지 않는 부드러운 손보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림의 손을 더욱 사랑할 것일세.”

 

기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도록 만듭니다. 기도할 때 보통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모읍니다. 생각과 마음을 모을 때 ‘내가 기도해야 할 제목’이 분명히 생각이 나고, 분명한 생각은 분명한 목적과 방법까지 우리의 생각줄을 이끌어 가죠.

그리고 기도의 가장 큰 능력은 역시 ‘가장 큰 공부’를 가능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토마스는 가장 큰 공부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을 잘 알고 헤아려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어쩌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이유가 무엇일까 확인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을 만한 이유가 매우 적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눈물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때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토마스는 겸손한 농부의 기도가 우주 전체를 알려고 애쓰는 교만한 철학자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스스로를 낮게 여기며 사람의 칭찬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세상 만물을 다 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행실에 따라 나를 심판하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

 

공부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의 하는 일이 이런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공부의 목적은 남들에게 유식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순수하게 지키는데 있습니다.

중국에서 공부는 쿵푸입니다. 즉 삶의 모든 기술과 연마가 다 공부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공부는 오직 대입과 취업, 고시 시험이 전부입니다. 방학이면 아이들에게 고액과외를 시키는 부모는 있어도 해외연수나 여행을 보내는 일에 돈을 쓰는 부모는 적습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은 오히려 풍파 가운데 더욱 단단해지기도 합니다. 영혼의 공부는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아버지를 보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과유불급입니다. 모든 것이 과도하게 공급됩니다. 수단이 목적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로 시작해서, 예배로 불려 지는 쇼의 연예인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교사로 시작해서, 아이들에게 학원강사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소금물처럼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들입니다. 예배 중에도 분명 쇼맨십이 필요할 때가 있고, 문제 풀이 중에는 분명 학원 강사처럼 명확하게 핵심을 짚어 낼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모두 조금씩 조금씩 ‘소금물’을 필요 이상으로 들이키며, 그 쓴 물을 참아내는 것만 배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습니다.(전1:8) 전도서의 솔로몬이 기록한 지혜의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마셔도 목이 타는 욕망과 삼켜도 만족이 없는 교만이 아닌 하나님 앞에 믿음과 지식에 절제를 더하여 살아가시는 생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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