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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 다른 나(시37편 7~31절)828쪽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방송이나 서점에서도 이와 비슷한 질문과 답들로 구성된 책들이 꽤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1885년 러시아의 문호인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책 덕분입니다. 인간성이 무너지고, 신앙이 공격을 받는 극도의 혼란 시기에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아니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을 던졌던 톨스토이의 신앙이 잘 드러난 책이기도 하죠.

 

책의 내용은 그렇습니다. 어느 날 하늘의 천사장인 미카엘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지상에 한 아이의 영혼을 데리러 내려옵니다. 그런데 아이의 죽음을 만류하는 아이 엄마의 애원을 못 이겨 그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죠. 그러자 하나님은 미카엘에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찾을 때까지 지상에 있으란 명령을 받습니다.

세 가지 질문은 그렇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두 번째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세 번째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였습니다.

마카엘은 인간 속에서 살며 이 질문에 대한 답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카엘은 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자신을 돕는 인간에게서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곧 죽을 지도 모르고, 1년 동안 신어도 튼튼한 신발을 원했던 귀족에게서는 “인간은 자신에게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란 질문에 대해서는 고아들을 돌보는 여인을 통해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을 소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화1}

어려서부터 교회에 출석한 한 청년이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잘 성장했고, 성경이 말하는 아름다운 가치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몇 안되는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취업을 하고 나서 큰 난관에 부딪쳤다고 합니다. 왜냐면 자신이 알고 있는 또 옳다고 여기는 ‘내 자신’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또 달라야 할 자신’은 엄청난 차이를 갖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 괴리감 속에서 청년은 복음 안에서 참 자유를 포기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되버렸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이러한 긴장감에서 낙오한 신앙인들이 많은 것입니다. 스스로 신앙인답지 않은 구석도 많으면서 교회에 계속 나오는 것이 옳은지..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기도 하고, 한편 세상에서 인정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자연히 교회를 멀리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간은 자신이 아무런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될까봐 두려워하므로 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자신의 위치를 얻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결국 이 청년도 하나님에게서 아닌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 성취를 위해 일반적인 삶을 선택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문제는 이런 선택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어느 순간 이런 삶들이 진짜라고 믿기 시작한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전환-이음/

사람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자기 소리를 귀로 듣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자신도 ‘나’라고 하지만, 자신에게 말하는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에 반응하여 만들어가는 나도 ‘또 다른 나’라고 말합니다.

처음의 나는 본래의 나를 말하고, 두 번째의 나는 만들어진 나를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점차 본래의 나와 두 번째의 나를 일치시키기 시작합니다. 분명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정말 나인것처럼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정말 소중한 자신을 잃도록 만들게 되죠.

그러나 신앙을 갖는 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나를 훈련하고 발견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다윗은 오늘 시편에서 악인의 형통과 잘됨을 목도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본문 7절에서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라는 말씀으로 이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악한 꾀’로 자신을 도모하는 사람에 대해 다윗은 조급해집니다. 그러나 곧 다윗의 마음은 다스려집니다.

조급함”은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인정욕구”, 즉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자신의 원수들이 재빨리 유익을 취하고, 자신을 조여오는 것을 목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은 미련해 보이고, 인간의 손빠른 행동은 너무나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시험 기간에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아이의 불안감이 그렇고,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 신자의 의무를 다하는 부모들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회사나 교회에서 “어쩌면 저렇게 영악하게 살아갈까.. 혀를 내두르지만, 한편 자신은 뒤처지는 것은 아닌가? 라며 불안해 하는 인간의 모습”이 이것을 닮아 있는 것이죠. 결국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은 불안감에서 옵니다.

불안감은 자신도 통제할 수 없으므로 곧잘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습성을 낳기도 합니다. 그렇게 점차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지배욕으로 자신과 주변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 사는 삶을 살기위해 애썼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깊은 곳까지 알고 있었고, 다윗은 무엇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대한 골리앗을 무모함이 아닌 물맷돌로 상대해 이겼습니다. 그는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이루리라는 믿음 안에서 서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불안과 조급함이 엄습할 때, 또 자신 안의 한계와 죄성 때문에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할 때, 겸허히 그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내려놓는데 성공한 예배자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항상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서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이 없음을 빨리 깨달았습니다.

빨리 깨달으니 하늘을 봅니다. 그야말로 다윗은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예화2}

직장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 때문에 괴로워하는 성도님이 있었습니다. 그 상사는 늘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랫사람의 실적을 가로채거나 걸핏하면 야근을 시키는 어쩌면 흔한 상사들 중 하나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상처를 받은 성도님은 도저히 그 상사를 용서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비관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지난 시간 하나님 안에서 변화되어온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상대를 미워한들 실상 상대는 변화되지 않을 사실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이 변화시키실 것이란 소망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 같은 사람도 변화시킨 하나님께서 자신 앞에 닥친 상황들을 선하게 인도해주실 것이란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넓은 마음, 그 큰 그림을 받아들인 성도분은 다시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 깊은 사랑과 인정을 경험한 이 남자는 직장으로 돌아가 오히려 그 상사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자 놀랍게도 상사의 결핍이 채워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자 그 상사는 다른 부서로 옮겨가게 되었고, 심지어 이 성도분을 추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성도 분은 그 상사의 부서로 옮겨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하는지 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응답받지 못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해답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가 가진 답을 가지고, 그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그러나 이미 두 손에 오답을 들고 놓지 않는 사람에게 정답을 쥐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은 내게 꼭 필요한 응답을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정받는 삶’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인정 너머의 삶’을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다윗은 악한 꾀로 승승장구하던 원수를 보며 하나님 안에서 확신을 얻습니다.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걸음을 정했다는 것은 세상과 다른 사람이 원하는 또 다른 나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직하게 자신과 마주하여 얻어낸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의 걸음인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긍정하며, 두려움과 불안감 대신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거칠어도 황소걸음으로 뚜벅 뚜벅 제 길을 걷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의 유행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여호와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쉬고/

많은 사람들은 그러나 ‘인정받고 높아지려는 결핍’을 채우려다 ‘자기불행’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뻔히 불행해질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인정받아 높아지려는 마음은 정욕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높이려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씁니다.

자기 결핍에서 나오는 이와 같은 행동은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자기 결핍을 다른 사람 때문이라 핑계 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 내가 행복해질텐데.. 저 사람 때문에 일이 되지 않아.. 그러나 실상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알아갈 이유가 됩니다.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나의 영적 게으름이 온전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세상을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가진 자로 더 가지게 하는 곳입니다. 이 세상의 이자놀이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인정받고 높아지려는 결핍’을 극복한 사람이 하늘 소망으로 자신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니 더 큰 소망으로 자신을 채웁니다. 채워보니 자유해집니다. 채워보니 넉넉해집니다. 적게 가지고도 넘치게 가진 사람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본문 16절 말씀입니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쉬고/

 

나가며..

광야에 한 남자가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질문입니다. 모세는 이 질문을 통해서 자신의 소명과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유대인, 이집트의 왕자, 살인자, 목동과 같이 그때 그때 닥치는대로 살아가던 모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운명과 목적을 깨닫게 된 각성자였던 것입니다. 초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던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가 빛에 놀라 말에서 떨어져 물었던 질문은 “주는 누구십니까?” 였습니다. 바울은 이 질문을 통해 자신의 소명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혈통 있는 베냐민 지파요. 억만금을 줘야 살 수 있는 로마의 시민이요. 가말리엘 문하의 엘리트요. 율법에 능통한 바리새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갈2:20에서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바울은 자신을 설명하는 신분과 능력, 외모와 출중함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게 된 자신을 참다운 자신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거짓 자아를 깨트리고, 영원하고 온전한 자아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본래 자신의 모습대로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세상이 필요한대로 여러분을 이용만 할 뿐.. 여러분 안에 가치를 밝혀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는 동안 삶의 도움을 하나님께 바라며, 동시에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거나 친구간의 우정을 넘는 자신의 목숨을 드려 우리를 구원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장 나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난 후 은혜를 주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은혜를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한계를 이해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한 번 성령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로 결단한 저와 여러분은 더 이상 “인정받아 높아지려는 결핍”으로 삶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한 귀족은 1년도 살지 못하면서 1년 동안 신을 새 구두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없는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고” 미카엘 천사는 하나님께 아뢰었다고 합니다.

정말로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 시간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31절 말씀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을 품고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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