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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이라도 겸비하면(왕상21:17~29)20180910수요기도회

외환 위기 이후로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질서에 한국이 편입되었습니다.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예전에 대학생은 낭만과 시국과 문화라는 것을 향유하고도, 좋은 회사에 취업했었지만, 지난 1998년 이후로 20대는 영어만 잘할 뿐, 자신이 빼앗긴 자유와 문화에 대해 단 한 번도 항거하지 못한 체 밀려밀려 30대와 40대가 되어가고 있음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티브이를 보면 20대 배우들이 모두 40~50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드라마에서 윗 세대를 재연할 뿐, 자신들의 20대 문화와 자유를 연기하는 친구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이유도 모른 체 영혼의 목이 잘린것처럼 이 세상에 대해 자신이 잃은 것들에 대해 질문하는 친구도 적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엘리야처럼 자신들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 분명히 알고, 외치는 소리가 간절한 때입니다.

 그리고 오늘 열왕기상 21장 내용은 잘못된 권력에 의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나봇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나봇의 잃어버린 것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잃어버린 자유와 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대지 요략>

 

가. 나봇의 포도원(21장 이하 내용)

1. 아합이 사마리아 궁 옆에 나봇의 포도원을 마음에 들어 하더라.

-. 아합은 자기 궁 근처의 포도밭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확장되고, 더욱 멋져진 왕궁의 격에 맞는 끊임없는 인간의 지배욕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평소 아합의 관심이 어디 있었는지 알 수 있다.

 

2. 나봇이 하나님께 받은 땅을 팔지 않다.

-.유대인들은 조상때로부터 내려온 땅은 하나님의 기업으로 팔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자손대대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 정신 속에는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이 숨어 있다.

 

3. 이세벨이 간계를 부리다.

-.남편을 위해 간계를 구사해, 나봇이 사는 지역의 귀족과 장로들에게 편지를 보내, 연출된 금식행사를 열게 한다. 이때 두 불량배가 거짓 증언자로 나선다.

-.이에 귀족과 장로들은 나봇을 데려다 죽이게 내버려 둔다. 압박에도 불구하고, 지도층이 깨어 있었다면 나봇은 살 수 있었겠지만, 패색이 짙은 조직일수록 이와 같은 일은 기대할 수 없다.

 

나. 엘리야의 고발

1.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다.

-. 여호와의 말씀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온 몸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공명과 다름이 없다. 더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구체적인 아합의 심판을 선포하셨다.

 

2. 아합과 엘리야의 대화

-. 대결의 절정으로 엘리야를 바라본 아합의 태도가 나타난다.(20절)이에 엘리야는 “나를 찾았느냐”며, 정식으로 자신과 아합이 반대에 서 있음을 드러낸다. 당시 이와 같은 문화가 가능한 것은 엘리야를 비롯한 여호와의 편에 선 무리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언자는 언제든지 왕을 찾아가 독대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신변을 우려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쨌든 엘리야는 두 가지 예를 통해 그 처참함을 상기시켰다. 바로 바아사와 여로보암의 예이다. 이 둘은 반란을 통해 왕이 되었지만, 결국 반란을 통해 죽임을 당한 왕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판의 이유는 역시 ‘불의한 행위’ 때문이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기질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이 보지 않아도 불의함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고침을 받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 엘리야는 이세벨의 심판도 빼놓지 않았다. 이세벨은 아합에게 권모술수의 창고이자, 권력의 근원이었다. 잘못된 권력은 죄가 되어 공동체에 들어오고, 반드시 공동체에 상처를 준다. 기독교 신앙은 조직이나 체계가 아닌 하나님 앞에 선 ‘개인’의 책임이 훨씬 중요하게 존중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귀족과 장로, 아합과 이세벨과 같이 현실과 조직의 뒤에 숨어 자신의 유익을 취하는 무책임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기 위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이는 카톨릭과 달리 기독교가 개인의 성숙을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말하기도 하며, 성서의 내용이기도 하다.

 

3. 아합의 겸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엘리야의 저주가 엄준했기에 아합은 더욱 놀랐다. 이미 닥친 불행도 아합의 겸비로 하나님은 아합의 때가 아닌 자녀의 때로 연기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심판주이시지만, 심판이 목적이 아니시다. 한 영혼이라도 돌아서서 선한 의의 도구로 이 땅을 바르게 펴내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역대 왕 중 가장 간악한 왕이었지만, 아합은 자신이 행한 놀라운 악행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심판받게 될 것인지 듣게 됨으로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는 풀이 죽어 다녔다. 그동안의 기고만장함은 근신의 자세로 변화되게 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종교의 생활 질서 안에서 예언자의 직책이 차지하는 자리를 인정하고, 이로써 그에 대한 처벌은 부분적으로 이뤄지게 되었음을 성경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만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내 손으로 해낼 수 있는 부분보다 하나님의 뜻을 인정할 때 누리게 되는 복락이 더욱 큼도 깨닫게 된다. 어쩌면 신앙생활이란 나와 하나님의 차이를 분명히 아는 것이며, 동시에 각 자에게 맡겨주신 직분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임도 알게 된다.

기독교회는 교회에서 세 가지의 말씀만을 인정하고 있다. 하나는 성경이다. 두 번째는 보이는 말씀인 성만찬이다. 세 번째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예수 중심의 말씀이다.

목회자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타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도는 선포되어진 예수님을 전파하고, 살아내는데 협력하여 노력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겸비이며, 우리가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용서받고 구원받으며,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인 것이다.

 예수님을 입고, 먹고 마시는 성도는 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오늘도 이 예수님을 통해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이 주신 여러분의 참사람됨을 찾아내시고, 그 신앙의 깊이를 더해가시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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