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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렘17:5~11)

 

들어가는 말

“고난을 별로 겪지 않고 항상 인정을 받아 왔으며 별로 푸대접을 경험해보지 사람은

결혼 생활에서 오는 긴장과 갈등을 견뎌내기가 어렵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실 결혼 후의 남녀 갈등만큼 풀기 어려운 숙제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명한 부부들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결국 함께 가는 법을 배우죠. 그리고 가정마다 나름의 갈등을 푸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유난히 상하구조가 발달되었습니다. 말에도 영어에는 없는 존대어가 있고, 나이에 따라 서열을 자연스럽게 나누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남자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서열을 정하는 일임을 살펴볼 때, 이 나이라는 것이 남자들 사이에서는 나름 관계를 설정하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자 분들은 무엇으로 서열을 정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

 

그런데 사람이 있는 곳에는 갈등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주재인 등나무와 칡나무는 갈등의 의미로써 이 두 나무가 서로 엉켜서 절대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지 현재 대한민국은 바로 이 갈등 때문에 많은 몸살을 낳고 있습니다. 이건 교회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죠. 그야말로 갈등을 잘 해결하는 것이 개인과 공동체의 중요한 경쟁력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 사회는 심각한 소통부재와 권력남용이 문제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갈등의 문제가 생길 경우 어떻게 반응할까요? 아마도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의 예를 통해 그 경우들을 한 편 살펴보시죠.

번째 방법은 갈등이 생겨도 아예 문제로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무시해버린 결과 그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은 채 시간 속에 묻혀버리게 되지요. 이것은 실은 문제를 회피하는 경우이며 절대로 긍정적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번째는 갈등을 조용히 처리하겠다면서 뒤로 물러섭니다. 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그들의 죄를 내어놓고 회개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동산 나무 뒤에 숨어버린 것이 바로 그 좋은 예이지요. 조용한 처리가 아닌 실은 감춤인 것이죠.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자기가 연루되어 있음을 피해보자는 심산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죠.

그리고 번째는 갈등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내가 말해봐야 아무도 듣지 않을 거야.” 또는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되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 결과도 역시 문제만 점점 더 증폭되다가 나중에는 엄청난 폭발로 이어집니다. 대부분의 공동체에서 담임목사가 나가게 되거나, 인사 문제가 생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외면은 잠재된 폭탄을 끌어 안은 것을 말하지 결코 정상적인 태도는 아닌 것이죠.

 

번째는 상황을 모두 영적인 문제로만 보는 태도이지요. 즉,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로마서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떠맡겨 버리는 겁니다. 이 같은 태도 속에는 사실 갈등을 풀어보겠다는 진지함이 빠져있지요. 진지함, 혹은 진정성이라고 여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분명 서로 간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반면교사의 역할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러나 만일 죄가 들어와 공동체가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면,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인내할 문제가 아니라 해당되는 문제를 회개하거나 고쳐야 한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갈등에 대해 부정적으로 대응하는 다섯 번째 방법은 갈등과 분노의 감정을 병 속에 담아두었다가 갈등이 있을 때마다 그 병 속에 담겨있는 과거의 감정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는데 이 같은 싸움은 한 번 싸움이 시작되면 여간해서는 끝나지 않습니다. 대부분 교회 재판국까지 가는 일들이 그렇습니다. 이 원한 관계는 사실 누구도 풀 수 없을 만큼 매우 견교한 갈등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대응법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문제의 원인을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지요. 이 같은 경우 죄도 용서받지 못하고 갈등도 치유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한 공동체에서 어떤 사건이 주는 의미는 실은 구성원 각자의 무관심과 비정함, 무책임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살펴봅니다. 특히 구성원들 간에 유착관계가 심한 공동체일수록 좀처럼 갈등이 풀어지지 않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갈등 해결의 실마리는 유착관계 때문이 아니라 바로 모두 남에게 탓을 돌리는 무책임에 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갈등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이 같은 부정적인 대응법으로부터 떠나 갈등의 원인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어놓고 먼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올바른 해답을 찾으려는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나 그 안에 진정한 해결책과 기쁨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원리는 무엇이 있을까요?

첫 번째 원리는 나 자신도 언제나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나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잠언에서도 “자신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지만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고 격려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갈등 앞에서 고통 받을 때마다 “주님, 저는 이 모든 갈등을 주님께 내어놓습니다. 주님께서 해결해주십시오. 그렇지만 저의 잘못을 고치는 일로부터 먼저 시작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해야겠지요.

 

그리고 두 번째는 상대방에 대해 내가 취한 감정적 반응에 대해 내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만약 내 기분이 나쁘다고 무조건 다른 사람을 탓했다면 그것은 상대방에 앞서 나의 내면의 성품이 잘못되어 있음을 스스로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세 번째 방법은 나와 갈등관계에 서있는 상대방의 입장에 내가 서보는 겁니다. 일단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면 왜 그가 그런 생각과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과거 친구와의 갈등 때문에 고통받았던 경험을 갖고 있는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이해시키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자기 자신을 매일 다그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 이해받기보다 남을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이 애쓰게 해주소서.”라는 기도문으로 유명한 성 프란시스를 기억나게 하는 지혜로운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갈등은 각자의 다른 입장이나 다른 입장으로 덮기엔 위험한 이기심 때문에 생겨납니다.

 

자 그럼 본문으로 들어가볼까요? 오늘 본문은 자기 성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절에서 말하는 삶은 실은 ‘가인’의 삶을 말합니다. 가인은 동생을 쳐 죽이고, 하나님을 떠나 살게 된 들사람을 말합니다. 지독한 불신은 실은 지독한 힘에 대한 맹신을 만듭니다. 누구도 자신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사실은 실은 가인으로 하여금 무기와 쇠를 다루는 야인으로 만들기에 적당한 동기 부여가 되었겠죠. 그런데 실은 우리 문명과 인간의 성공의 밑바닥에는 사실 이런 가인이 갖고 있는 불안감과 불신이 꿈틀대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것입니다. 힘을 가지려는 인간의 속성은 실은 바로 이러한 불신에서 출발함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가인적인 인간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죠. 무릇 사람을 의지하고(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을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은 분명 6절과 같이 좋은 일들을 밀어내며, 가시처럼 사람들에게 굴어서 결국 자신 뿐 아니라 주변도 가시밭으로 광야로 만드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토마스는 우리 자신이 그리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의 말씀을 빗대어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종종 우리 안에는 은혜가 없고, 때로는 총명도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죠.

우리는 고작 우리 안에 작은 빛을 내고 있을 뿐인데 그나마도 꺼트리기가 쉬우며, 그 불이 꺼지면 그나마 내면의 어두움을 바라보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악을 행하기도 하며, 잘못을 변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작은 문제는 책망하면서도 우리 속의 큰 문제는 그냥 넘어갑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정작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 다는 점에 대해서는 둔하기가 그를 때가 없는 것이죠.

그러나 실은 자신의 일이 잘 되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을 판단할 이유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실은 다른 모든 것은 제쳐놓고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만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그 자신에 대한 돌봄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부패한 것이 바로 나의 마음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호와께서는 이 같은 나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꿰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떠나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힐난하는 그 힐난은 마치 자고새가 낳지 않은 알을 품음 같다 말하고 있습니다.

자고새에 대한 이솝우화 한 편을 들려드리고 마칠까 합니다.

 

집 마당에서 두 마리의 싸움닭을 키우고 있는 농부가 있었다.

어느날 농부는 시장에서 우연히 길들인 후 팔면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자고새를 발견했다. 농부는 이 자고새를 구입하고 집으로 가져왔다.

농부는 닭들과 친하게 지낼 것으로 기대해 마당에 같이 놓아 키우기로 한다.

근데 싸움닭들은 자고새를 닭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고새를 못살게 굴기 시작한다. 닭들이 부리고 쪼아대고 따돌리자 자고새는 서럽고 외로워 그들과 떨어져서 외톨이로 지내기 시작한다.

그러기를 몇일후, 자고새가 보이지 않자 이제는 수탉들끼리 싸우기 시작한다. 이 광경을 본 자고새는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내 자신을 자책할 필요가 없군. 내가 못나서 당한 것이 아니야. 나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자비심 없이 싸우는 원래 못된 놈들 아닌가

 

사회는 흔히 이런 현상을 집단 광기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런 집단 현상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들 세계에서도 공공연히 혹은 은근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점을 아실 것입니다. 결국 이 이솝우화가 말해주는 것은 집단 광기에 빠진 사람들은 “누군가를 해치거나 괴롭히면서 서로 의리 있는 척, 용감한 척 하지만 결국 이들은 자신들 밖에 모르는 비겁한 자들” 일뿐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신앙은 바로 이런 우리의 부패함을 스스로 하나님께 고발하고, 하나님의 편에 서도록 노력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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