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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서는 자유(욘1:11~15/요8:31~36)

 

들어가는 말

2차 세계대전 중 잠수함 한 척이 바닷 속에 침몰했습니다. 미군함이 이들을 찾을 때 이 잠수함 속에 있던 군인들은 단단한 쇠붙이로 벽을 두드리며 모스 부호를 만들어 밖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내용은 “더 이상 이곳에 희망이 있을까?”였습니다. 아무도 구해줄 수 없을 것 같던 바로 그 순간에 병사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이 있을까?” 라고 마지막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죠.

이번 달에는 안타까운 사건이 유독 많습니다. 세월호 현장 지원을 나섰던 소방헬기 한 대가 추락하여, 5명의 탑승자 모두가 사망하기도 했고 말레아시아 항공기 한 대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격추당해 295명 전원이 실종되었으며, 지금도 이스라엘의 폭탄 세례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타격함으로 벌써 800명이 넘는 민간인이 숨지고 죽어가고 있다는 외신뉴스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는 적지 않은 다툼과 불행의 저편에 서 있는 그들 나름의 진리와 불편하게 서 있고는 합니다. 특히 각자의 신념이 모두의 행복을 앞질러 가는 세상에 살면서 옳고 그름을 하나님 앞에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1. 진리정치

지난 19대 총선 당시 어느 정당에서는 불법으로 비례대표 경선이 벌어져 문제가 커진 적이 있습니다. 당시 국민들은 진보 정당이 설마 그러하겠느냐 라며 그 실망감이 더욱 컸었는데요. 이들은 특히 자신들이 믿는 신념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국내의 다른 정당들과 아무런 차이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선거 참패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매체들은 이들 정치를 진리 정치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진리정치란 자기들이 믿는 것만 진리이며, 이외에 다른 것과는 철저히 투쟁하며 자신들의 이념을 성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옳고 그름은 목숨보다 중요한 일이며, 자신들의 생존의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했던 또.. 실은 이분들이 이야기하는 적지 않은 이야기들 속에서 저는 자주 다음과 같은 표현을 듣습니다. “우월한 생각”.. 예를 들어, 환경, 반핵, 인권 등의 가치들을 이야기할 때 이분들에게서는 분명 우월의식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월의식이 다른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자칫 “자기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무시하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도록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국민들은 진보의 필요성은 알기에 이들에게 표를 주지만, 결코 지금까지의 진보운동이나 행보들이 다 맘에 들어서는 아니라는 것쯤은 이들 정당들도 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편 누구나 완전한 승리만을 꿈꾸는 세상에 살면서도 적어도 / “십자가에서 완전한 패배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말에는 공감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외에는 어느 누구도 가장 확실한 진리의 담지자가 될 수는 없다. ”

즉 예수님 외에는 누구도 진리라고 말 할 수 없다입니다.

왜냐면 세상은 누구나 완전한 승리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면 대부분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님과 같이 패배의 쪽에 서려는 사람들은 적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기기 위해 간교해지고, 이기기 위해 자신을 진리 쪽으로 포장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 저를 포함해 우리들 역시 진리로 자신을 포장을 할 수 있을 뿐이지..누구도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2. 바보의 계산학

어느 교회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수련회에 참석시키려고 아이디어를 냈다고 합니다. 그건 아이들에게 문제를 내고 풀어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정답은 맨 뒷장에 적혀 있었죠.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이 땅에 내려오셨는가?”입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답을 뭐라고 썼냐면.. ‘세계 정복을 위해서다.’. ‘모두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다.’ 등 별의 별 이야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 모두 정답을 보고는 깊은 감동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 “네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사람이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달려가게 만드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옳고 그름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바보 같은 정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옳고 그름은 어쩌면.. 여러분을 끊임없이 분열시키는 아편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가 되게 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사랑과 믿음이 없으면, 다른 것으로 채워갑니다. 그것에는 사랑과 믿음 대신에 “정치”가 들어가고. 사랑과 믿음 대신에 “불안”이 들어가고. 사랑과 믿음 대신에 “오만”이 자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정치와 불안과 오만들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고, 똑같은 사람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죠.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점차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점차 내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에 놀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서 멀어지면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우리에게서 사랑을 없애려 우리의 영혼을 도둑질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또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관계와 신뢰입니다. 그래도 의심이 든다면 ‘무언가 옳고 그름이라는 자기 틀이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을 행복하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행복하십니까?/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만 옳고 그름을 말 할 수 있는 분이라고 고백한 것이 아닐까요? >

 

부끄럽게도 제가 이 시간 여러분에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제 안에 사랑이 충만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에 대한 확신이 약해져가기 때문에 드리는 호소입니다. 갈수록 세상의 것들과 방법이 손쉽게 제 영혼을 차지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수도 없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제 영혼을 갉아먹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각 자의 입장이 모두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오늘을 살며 저는 다시 사랑을 목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랑을 떠나면 엉뚱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떠나면 분열하고, 가슴 아픈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매번 똑같은 이유로 걸려 넘어지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3. 요나의 던져짐과 하나님의 넘어섬

오늘 본문에서 요나는 자신의 판단으로 니느웨로 가기를 멈추고 자신을 바다에 던질 것을 다른 선원들에게 말했습니다. 망망대해에 던져지는 일은 분명 두려운 일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하고, 어쩌면 같은 동족들에게 지탄받을 일들이 두려워, 그는 배에서 자신을 던져지길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끊임없는 판단이 그를 둘러쌌고 자신을 괴롭혔습니다. 니느웨는 우리 동족을 괴롭힌 나라의 성읍이야! 나의 원수라고! 그리고 설령 그가 믿음으로 이들에게 말씀을 선포한다고 한들 나의 동족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더구나 멸망이 코앞인데 이들을 살리는 회개의 선포를 하라니. 모두들 나를 제정신으로 여기지 않을 거야...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가 끝까지 니느웨에서 일을 마치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기어코 요나서의 마지막은 박넝쿨에게서 ‘생명과 사랑’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모든 어려움이 자신 때문인 것처럼 여겨지면서, 누구도 나의 처지를 알아주지 못할거란 두려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만 배에서 내리면 모든 일이 잘 될거라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준 숙제를 풀기까지 이 문제의 자리에서 도망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숙제를 풀기 까지 절대로 놔주시지도 않습니다.

일례로 우리는 같은 실수와 불행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을 경험합니다. 항상 같은 이유 때문에 실패하고, 같은 데를 다치거나 마지막 과정에서 그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들이 그렇습니다. 희망도 없고 대안도 없이 망망대해를 떠다니듯 지내는 시간이 그렇습니다.

개인 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도 그렇습니다. 옳고 그름의 목적이 생명이 아니므로 오늘도 이 나라는 저 나라로 폭탄을 떨어트렸고, 여자라서 혀가 잘렸으며,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아이들의 생명은 다음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람과 세상은 매 번 이 반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닷 속에 던져진 요나처럼 사람과 세상은 도무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 하기보다, 자신의 진리만을 믿고 따를 뿐입니다. (군산 교회 이야기)

예수님은 그런 세상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화가 난 군중들의 얼굴을 보았을 것입니다. 어제까지 자신을 따르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고, 도리어 아버지 하나님께 저와 여러분을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생명에 있었습니다. 영생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 도저히 넘지 못하던 현실의 장벽을 믿음으로 넘어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전에 요나에게 하나님은 민족주의와 유대인만 구원을 얻는다란 장벽을 넘도록 요구하셔던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 모든 민족이 잘못된 믿음과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회복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랑 없는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가 사랑을 시험하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사랑할 수 없을 때 사랑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부르셨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우리를 찾으시고, 사랑으로 세상을 넘어 서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예수님은 자신을 시험해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거할 하늘 처소가 적은지.. 하늘로부터의 복을 받을지 안 받을지.. 구원이 네게 임할지 안 임할지!

 

예수님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넘으셨고,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께서도 목적하셨던 그 길입니다. 사랑입니다. 생명입니다. 감사입니다. 기쁨입니다. 행복입니다. 넉넉함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사랑이 먼저 하늘로부터의 체험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한 번도 사랑다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위로부터 눌러 부어 주시는 사랑에 한 번도 노출이 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우려입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집니다. 매일의 삶의 목적이 달라져야 한다는 도전이 제 마음을 두드립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레디컬한 급진적인 가르침이 여전히 ‘사랑’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 라고 확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말하시며 이 말씀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완전히 내 체질과 기질이 녹을 때까지 하늘을 사모해야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밀려옵니다.

현명한 사람은 파산한 기업에 투자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성도 더 이상 파산한 세상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도 사람의 세 종류에 대해 말합니다.

첫 번째는 욕망의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두 번째는 권력의 사람입니다. 돈이나 기본적인 욕망을 성취한 인간은 바로 권력에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자신에 대한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이데거 자신도 자신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이 파산했음을 대신에 하늘나라의 임하심을 확신하셨습니다. 요나가 아무리 몸부림치며 소명을 거부하려고 했어도 결국 하나님이 생명과 사랑의 회복의 자리에 앉혔듯이, 저와 여러분도 다시 이 십자가의 사랑 앞에 앉아야만 할 것입니다.

 

나가며..

마무리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넘지 못하는 이 세상의 죄악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넘어 이기신 것도 믿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진리로 우리를 구속합니다. 때로는 이편에서 또 저편에서. 마치 공산당과 반공청년단 사이에 줄서기를 강요하듯 세상은 저와 여러분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이 바보 같은 행동은 분명 사랑이었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내린 들판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한 발 한 발 정성을 다해 사랑으로 걸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힘들지만, 분명한 걸음으로 꾸욱 꾸욱 눌려 걸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주님을 따라 갑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앞선 발걸음을 어지럽게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왜냐면 여러분의 자녀와 믿음의 후배들이 그대로 따라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오랜 시간 동안 믿음 생활을 했다는 것이 하나님께 더 많은 죄를 지어 왔음을 의미하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능히 먼저 된 자도 나중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랑으로 마음을 덥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 가슴을 충분히 씻어내야 합니다. 질투와 시기와 간교함에서 우리를 건져내야만 할 것입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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