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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그리스도를 본받아1(전1:8)

들어가며

신대원 시절 필독서로 읽었던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란 책이 있습니다. 캠피스 출신의 토마스란 뜻이 이 책 저자의 이름인데 그는 1380년에 시골에서 태어났으며, 수도원에서 평생을 살았던 수도자였습니다. 이 책은 천로역정과 고백록과 함께 3대 기독교 고전에 속한 책인데,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유익한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 있어서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읽어 볼 책 중에 하나입니다.

이번부터 오후에는 성경과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것들을 연결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의 글은 토마스의 것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1. 소금물

소금물이란 제목을 들으셨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짜다. 상하지 않는다. 눈으로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맹물보다 밀도가 높다.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금물을 한 컵 이상 마시라면 어떨까요? 아마도 이 물을 아무렇지 않게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음식이나 사람에게나 적당한 양 이상이 들어가면 바로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이 소금물입니다. 분명 염분을 보충해주고, 음식을 상하게는 하지 않지만, 이것이 좋다고 이 물만 먹고 살 사람은 없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을 조금 더 강박적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에 가슴에 뜨거움을 체험했을 때 앞에 선 강사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항상 성령 충만하셔야 합니다.” 저는 이 말처럼 부담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담임목사님께 여쭤봤어요. 어떻게 항상 성령 충만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담임목사님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라고 대답하시더군요.

그런데 저는 저도 모르게 집요하게 그 ‘거룩과 성령충만’이란 단어에 몰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아는 한 최대한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한 시간들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오히려 제 삶에 붉은 신호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첫째는 관계의 훼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세상은 너무나도 차이가 나 보였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도 가려서 만나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일반인들과의 정상적인 대화가 어려워서 답답한 적도 있었고,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을 피해 그야말로 ‘깨끗하게 살았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기쁨이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저는 절대로 ‘거룩함 자체’로 살 수가 없었고, 두 번째는 사람들과의 건강한 교재를 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죠. 심지어 좋아하는 이성이 있었는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고백을 하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그 작은 후배가 이런 저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본 날이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납니다.

 

두 번째는 인격의 훼손입니다. 그런 시간들이 길어지자. 저도 모르게 어떤 내적인 자만심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거룩함은 거룩한 표정과 행동으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거룩함 자체에서 나오는 능력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가식적인 행동은 꼭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도 모르게 그게 편함으로 가식적인 행동들이 저를 감춰지게 했던 것이죠. 그러나 어떤 식의 가면도 건강한 인격을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로 가면은 이면의 나를 가려주기보다 오히려 더욱 부패하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찢어진 보리자루처럼 시도 때도 없이 나의 연약함을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과 내가 다를 바 없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정상적으로 갖기 까지는 이 인격 장애를 고치기 위해 애썼던 기억이 납니다. 신앙은 인격 장애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보다 하나님 앞에 나은 사람이 많은 것이 하나님 보시기엔 더욱 수지맞는 장사란 사실입니다.”

토마스는 그의 책에서 이런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말합니다.

「 우리는 모두 연약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보다 더 연약한 사람은 없다는 생각을 굳게 지켜내야 합니다.(창8:21-노아제사, 이는 인간이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그리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더 공공연히 죄를 짓거나 흉악한 죄를 짓더라도 당신이 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당신이 죄를 짓지 않는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저는 연약함이 부끄러움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연약함은 죄와 연관이 있습니다. 가벼운 죄책감이 드는 것은 바람 같을 수 있지만, 저는 죄가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언제고 한 번은 죄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과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합니다.

그래서 죄가 있거나 죄성이 있다고 해서 그 죄가 나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만 죄의 뿌리가 얼마나 제 깊숙한 곳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알면 알수록 저는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과연 누가 있어 이 죄에서 자유할 수 있을까란 한탄이나왔었죠.

그런데 창세기8:21절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악하므로, 삭제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시는 땅을 물로써 심판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하다고 삭제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에 더욱 안타까워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할을 무엇일까요? 바로 서비스(인사, 마땅히 해야할 일) 하나님을 만나는 것. 예배이며 동행인 줄로 믿습니다.

 

2. 자신을 헤아려 보는 지혜

어떤 산골에 감자 농사를 짓는 한 농부가 거친 손을 하고는 하나님께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렸습니다. 평소에 글도 모르고, 고생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얼굴을 한 노인은 그러나 뭔가를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한 화가가 그의 손을 스케치하고, 색을 입혀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자 그의 친구가 말합니다. 자네 그림에는 온통 거친 흔적만 있는 손만 그려져 있을 뿐이군. 도대체 누가 이런 손을 가진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인가?

그러자 그 화가는 말했습니다.

“자네의 기도하지 않는 부드러운 손보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림의 손을 더욱 사랑할 것일세.”

 

기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도록 만듭니다. 기도할 때 보통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모읍니다. 생각과 마음을 모을 때 ‘내가 기도해야 할 제목’이 분명히 생각이 나고, 분명한 생각은 분명한 목적과 방법까지 우리의 생각줄을 이끌어 가죠.

그리고 기도의 가장 큰 능력은 역시 ‘가장 큰 공부’를 가능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토마스는 가장 큰 공부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을 잘 알고 헤아려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어쩌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이유가 무엇일까 확인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을 만한 이유가 매우 적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눈물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때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토마스는 겸손한 농부의 기도가 우주 전체를 알려고 애쓰는 교만한 철학자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스스로를 낮게 여기며 사람의 칭찬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세상 만물을 다 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행실에 따라 나를 심판하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

 

공부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의 하는 일이 이런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공부의 목적은 남들에게 유식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순수하게 지키는데 있습니다.

중국에서 공부는 쿵푸입니다. 즉 삶의 모든 기술과 연마가 다 공부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공부는 오직 대입과 취업, 고시 시험이 전부입니다. 방학이면 아이들에게 고액과외를 시키는 부모는 있어도 해외연수나 여행을 보내는 일에 돈을 쓰는 부모는 적습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은 오히려 풍파 가운데 더욱 단단해지기도 합니다. 영혼의 공부는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아버지를 보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과유불급입니다. 모든 것이 과도하게 공급됩니다. 수단이 목적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로 시작해서, 예배로 불려 지는 쇼의 연예인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교사로 시작해서, 아이들에게 학원강사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소금물처럼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들입니다. 예배 중에도 분명 쇼맨십이 필요할 때가 있고, 문제 풀이 중에는 분명 학원 강사처럼 명확하게 핵심을 짚어 낼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모두 조금씩 조금씩 ‘소금물’을 필요 이상으로 들이키며, 그 쓴 물을 참아내는 것만 배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습니다.(전1:8) 전도서의 솔로몬이 기록한 지혜의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마셔도 목이 타는 욕망과 삼켜도 만족이 없는 교만이 아닌 하나님 앞에 믿음과 지식에 절제를 더하여 살아가시는 생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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