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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심의 두 방향(왕상11:30~40)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선조들은 장애를 질병 중의 하나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장애인과 그 부양자에게는 각종 부역과 잡역을 면제했다. 조선 초,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허조 (척추장애인)이었고, 중종 때 우의정을 지낸 권균 (간질장애인),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 (지체장애인), 영조 때 대제학, 형조판서에 오른 이덕수 (청각장애인), 역사를 빛낸 수많은 장애인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장애인은 단지 몸이 불편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세종대왕시절 박연이 왕에게 이렇게 아룁니다.

"옛날의 제왕은 모두 시각장애인에게 현송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음)의 임무를 맡겼으니 이는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신체적 장애를 등용 거절의 사유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이들에게 배려와 기회를 허락한 선조들의 지혜야 말로 이 시대가 따라가지 못하는 덕목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장애인을 등용했다고 해서 장애를 가졌어도 어찌되었던 무조건 등용되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 심지와 명철이 분명하고, 자기 재능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중심’이 바른 사람에게야 이와 같은 기회가 쥐어 줬겠죠.

그러므로 장애는 문제가 되지 않아도, 중심이 바르지 못한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도 쓰임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죠.

 

1.부에 도취하고 이방우상에게 마음이 팔린 솔로몬(10:14-29절)

오늘 이야기는 솔로몬의 이야기 마지막 시간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덕분에 크나 큰 복을 받습니다. 먼저는 듣는 마음을 얻은 그것이 하나이고, 두 번째는 넓은 마음을 얻게 된 것이 두 번째 일 것입니다. 지혜와 지략 등은 모두 이 두 가지 삶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그런데 솔로몬의 삶에 빨간등이 켜지는 징조가 나타나게 됩니다. 먼저는 10장 14~이하의 말씀입니다. 이 내용은 그가 엄청난 세금과 부를 누리게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에 눌리게 되는데, 필요 이상으로 솔로몬이 하나님의 영광에 기대어 부를 쌓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은 ‘부요함’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부요함은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일체의 족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부요함은 자족에서 출발하는 신앙입니다. 자족은 항상 족한 줄 아는 자세를 의미하죠. 더 가질 수 있을 때에도 다음을 위해 남겨두는 것을 말하고, 더 나갈 수 있음에도 주변을 살피기 위해 멈춤을 말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점차 자신의 욕심에 사로잡혀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도 솔로몬과 같은 우를 범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만, 물론 어디까지가 적정한 부인지 정하기도 어려운 터라.. 아마도 자신이 쌓아가는 부만큼의 대가지불이 그들에게 요구될 것이란 정도로만 이야기를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 늘 그래왔으니깐요.

여튼 본문 11장은 솔로몬의 결정적인 잘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가 쌓이고 명예가 쌓여서 그럴까.. 사람들은 지킬 수 있을 때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 때문에 명예나 능력을 잃기도 하는 것이죠. 솔로몬 역시 지킬 것이 많아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이방나라들과의 혼인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때 후궁이 칠백 명이고 첩이 삼백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큰 나라와 더불어 작은 도시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력자들과 더불어 혼인외교를 하고, 주변 국가의 부와 지식을 섭렵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국가가 성장하면서 다른 국가와의 교류를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11:4절은 그가 이방여인들로 인해 마음이 변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들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측근의 말만 듣다가 나중에는 소수에 의해 눈과 귀가 머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가 있죠. 마찬가지로 하나님 신앙이 갖는 그 분명한 공의의 기준과 그 넓은 자비가 갖는 균형의 기준이 점차.. 이쪽과 저쪽 사이의 균형을 기준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인간 정치는 양쪽 세력 간의 균형을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의 정치는 본질적인 균형에 있음을 아셔야만 할 것입니다. 불의와 공의가 친구가 될 수 없듯이 불신앙과 신앙은 더불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힘들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기준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들은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이방신을 멀리 하라는 음성을 들었지만, 이미 잘못된 길에 들어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멀리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함으로 결국 자신의 왕국을 자신의 부하에게 넘겨 주어야 하는 징계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솔로몬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항상 깨어서 믿음생활을 행하지 않으면 우리도 언제든지 솔로몬의 자리에 떨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고 항상 경성하여 믿음 안에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를 지켜주시는 신실하심도 있지만, 청종치 않는 백성을 향한 징계 역시 분명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인간에게서 찾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찾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좌우로 흔들리나 하나님은 어느 면에서나 우뚝 서시며, 사람은 인정에 흔들리나 하나님은 더 큰 사랑으로 모두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감히 닮을 수 없는 사람이기에 이 기준이 늘 부담이 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언제나 돌아보면 서 계시는 주님은 분명 망망대해에 등대와도 같은 분이십니다.

 

2. 자비로우신 하나님

다음에 또 하나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러한 솔로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생전에 이 일을 행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더욱이 그 나라를 모두 넘기지 않으시고 유다지파를 통하여 다윗과의 언약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항상 자신 앞에 등불을 들게 하신 것입니다.(11:36)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한량없으심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사랑을 받고 있는 믿음의 자녀임을 감사하면서 항상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의 약속에 충실하게 행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솔로몬의 대적과 여로보암

솔로몬의 부흥기가 끝이 나기 시작합니다. 주변에 적대국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때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11:14절에 등장하는 하닷입니다. 하닷은 에돔사람입니다. 예전에 사무엘서 설교 중에도 나왔습니다만 에돔은 다윗 시절 요압장군이 육개월이나 그 땅에 머물며, 에돔의 모든 남자를 진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하닷은 작은 아이에 불과했는데, 몇몇 어른과 간신히 도망하여 애굽에 머무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부패한 세상을 심판하고자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애굽 땅에서 불러내었듯이, 하닷 역시 부패한 솔로몬의 왕국에 저항하고자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닷은 애굽왕의 총애를 얻어 황제의 사돈이 되었고, 이후 르손과 여로보암과 더불어 유다왕국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신실하게 이들을 보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부패하여 또 다른 이를 압제할 때 하나님은 이제 그 압제당한 이들을 통해 원 나무를 심판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불의에 대해 심판을 공의에 대해서는 선대의 심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실로(보냄받았다)의 사람 아히야 선지자는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합니다. 31절 말씀.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각종 우상 신들을 모시고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내 법도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함이니라.”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에게 언약하신대로 여로보암에게도 37절에 동일한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 여기서도 하나님의 두 가지 신실함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여로보암을 통해 솔로몬 왕을 심판하실 것이란 사실과 또 하나는 그래도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하되 영원하지는 않으며, 한 지파는 남겨둘 것이란 자비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때와 같이 동일하게 솔로몬(사울)-여로보암(다윗)의 구도로 여로보암이 애굽땅으로 도망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이스라엘 주민 정체성)

 

나가며

마무리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악한 자에게는 악의 보응을 선한 자에게는 선한 응답을 주십니다. 오늘 악으로 심는 자는 이미 그 어리석음으로 심판받았음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신약의 데살로니가후서2장의 이야기에서도 이와 같은 면을 알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악한 자들이 이 땅에 나타나는 이유는 이들이 불의를 좋아하고 심판을 받게 하시려고 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이들도 자기들의 역할이 있으며, 이들은 진리를 도무지 알 수도 따를 수도 없는 사람임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선택한 종이었습니다만, 결국 사울과 같이 심판을 받게 되고 말았습니다. 진리를 따르다가 실족하여 우상숭배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왕국을 이끌며 어쩔 수 없는 판단과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만... 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음으로 솔로몬은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신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심이란 균형의 문제가 아니라 기준을 향해가는 방향을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입니다. 믿음으로 판가름하며, 또 믿음 안에서 용납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이 두 가지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주의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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