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돌짝

카테고리

필통 (34)
풋살이 (2)
구암일기 (0)
목회이야기 (0)
딸랑구 (0)
구암설교 (30)
자료실 (2)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14.9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태그목록

최근에 올라온 글

'2014/09/13'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4.09.13 도피가 아닌 초월(요한1서5장1절~4절)20140914오후

도피가 아닌 초월(요한1서5장1~4)

들어가는 말

토마스는 세상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우며, 그 일을 통해 사람은 참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말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로 달려간 삶이었고, 세상을 벗어 던진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수도사들이 그렇게 세상을 등졌습니다. 아니 세상을 등진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실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헌신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이들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회는 지난 500년 동안 이들에 대해 오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수도사와 신부만이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이고, 세상의 일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로마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이들은 다만 구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생이 다르듯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분명 거룩하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주님이 인정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어느 곳에 있던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도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면 그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맞추려고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거룩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개신교회는 성과 속, 즉 거룩함과 세속 됨의 차이를 구별 없이 받아들인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회들이 본래의 맛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50년전 흑인해방운동가이며, 종교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자신이 성직을 걷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떤 신비한 부르심을 따라 이 길을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고통 받는 나의 동포와 인류를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뜨거운 마음으로 나선 것입니다.

이후로도 많은 성직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한 사람들. 예수님이 구원하고자 했던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직으로 각 자의 삶의 자리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들이 신자들이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다가 세상과 닮아버리게 된 것입니다. 적지 않은 교회들이 주님의 일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은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더욱 사랑했습니다. 지도자가 병들자 교인들도 점차 세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교회인지 정당집단인지.. 교회인지 장사터인지 알지 못할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줄이면.. 결국 ‘거리조절’에 실패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닮아 버리면 곧바로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자의 입과 눈에서는 세상의 학문과 비난이 쏟아져 나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대해 심판하시고 비판하셨지만, 이들과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처음 사랑이 있고 없음일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 특히 복음적인 교회라 불리는 곳에서도 기본적인 교리를 제외하고는 매우 놀랍게도 세속적 프로그램과 유행을 따라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진리만 헤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좋다는 융통성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생각들이 오히려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진리와 세상을 두 동강이 내버리는 결과를 만들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진리를 움켜쥔 체 성공과 물질주의로 화려하게 무장한 교회들은 세상으로 하여금 상식과 신학을 벗어던진 대적자 골리앗처럼 비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성직자 스스로 이 모든 불행을 만든 셈입니다. 스스로 천박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신자들 역시 스스로 이와 같은 불행이 행복이라고, 성공이라고 속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생명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임하면, 반드시 세상에 대해서는 한 번 죽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충분히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야 다시 세상을 사랑할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이 세상에서는 지켜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이젠 그가 부활하신 것과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자마다 세상을 이겨낼 만한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대해 한 번 죽으셨고, 다시 사셔서 이젠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한 번 죽은 자라야 그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세상에 대한 미련이 완전히 한 번은 죽어야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말뜻을 여러분 스스로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멀리 나갔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되돌아왔을 때 그 충격과 그 기쁨을 상상해보십시오. 반면에 꾸준히 연락하던 아들이 되돌아왔을 때는 어떨까요. 그 기쁨과 놀람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번은 완전히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미워해야 합니다. 그 동안 세상과 연락하며, 아무런 죄책감과 자각 없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 또 나를 속여 온 세상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라야. 하늘 나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보물이 이곳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는 죽어서나 혹시 갈 수 있는 곳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면서 한 번 죽은 자는 그 순간부터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의 목적점이 달라 집니다.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세상과 다른 차이를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천천히 세상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사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타협할 때도 있습니다. 죄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이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한 번 죽은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므로, 마지막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을 위해 기도하고 고민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시간 두 갈래의 흐름으로 흘러 내려왔습니다. 하나는 사회운동과 민주화, 빈민구제 등의 사업에 최선을 다해온 교회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최초 선배들이 뜨거운 기도와 말씀에 대한 묵상으로 이 세상을 건너고 이겨냈던 것과 달리 이제 이들 교회에서 이런 기본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과 등을 지고 오직 복음이란 이름 아래 모인 교회들입니다. 이들 역시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최초 선배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상을 이겨냈던 것과 달리 그동안의 엄청난 부흥 덕분에 ‘성공과 출세와 부패’가 이들의 다른 이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들은 거룩함에서 도망쳤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인생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를 때도 자신이 계신 곳은 거룩한 곳이라고 구별하셨습니다. 이때의 구별은 차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지켜 줄 안전선인 것입니다. 도로 위의 차들이 안전거리를 유지하지 않고 운행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수도 없이 많은 사고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이 나라에 수많은 사건 사고가 넘쳐납니다. 인간성이 무너지고, 세상도 더 이상 교회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별함이 없어서입니다. 초월함이 없어서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란 뜻입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 뿐 아니라 그의 말씀을 지키고,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판사가 모든 증거가 충분한대도 외압에 못이겨 ‘무죄’라고 선언했다면, 그가 비록 교회에 다닌다 하더라도 그는 성도가 아닙니다. 세상에 대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은 이 세상의 유한함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양심이 늘 하나님께 닿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판사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거짓 증언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는 성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판사의 판결을 보고, 같은 판사로써 그 불의함을 고발하여 시정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분명히 한 번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세례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출애굽 하던 백성들이 건넜던 홍해가 바로 그 의미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는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 가운데 살면서 도피가 아닌 초월의 삶을 살아내는 비결인 것입니다.

 

초월은 지금 여기에서 나의 한계를 너머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 깊은 관심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를 끊임 없이 초대하십니다. 자신의 자녀들을 잃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쏟는 노력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왔는지 모릅니다. 성직자이던 아니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저는 이제는 누구라도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을 초월해 하나님 앞에 용기를 보이는 자에게만 하나님께서 구원을 허락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제 자신부터가 세상적입니다. 평생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서 들어선 길이면서, 스스로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고, 조직을 운영하는 것을 배우고, 인간관계의 비정함을 배우고, 남을 속이고, 속이며, 그런 것이 세상이라고 습득하는 것이 원치 않아도 되는 제 자신을 볼 때가 그렇습니다.

그야말로 천박하지 말아야 할 삶을 결단하고도, 쉽지가 않은 것이죠.

그러나 다시 한 번 십자가 안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도피가 아닌 초월해내는 삶을 연습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기쁨이 유지됩니다. 능력이 유지됩니다. 생명이 유지됩니다.

한 번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거듭남을 통해, 즉 세상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삶을 통해서만 그 신령함이 유지된다고 진리는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도피가 아닌 초월로 자신의 생명을 증명할 뿐입니다. 끝..

Posted by 돌짝
, |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