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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9.20 맛을바꾸는비밀(요2:1~11)20140921오전

맛을 바꾸는 비밀(요2:1~11)

 

들어가는 말

카톨릭교회를 방문해보면, 좌우에 마리아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에게 ‘마리아신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묻는다면, 대부분 그렇다고 말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아니었음에도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으로 기적을 베푸는 내용이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도 어머니 마리아의 전언이 아들 예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지금도 마리아 상 앞에서 중보의 기도를 요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셨습니다. 또 어린 나이에 동정 잉태한 아들을 가진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여느 보통의 자녀들보다 더욱 애절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 사생아나 다름없이 태어난 예수님에 대한 평가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평판은 그렇게 좋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이들 가정은 지켜졌다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 가정이 아버지 요셉 덕분에 지켜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아버지 요셉의 역할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아버지 요셉의 역할은 예수님의 삶의 배경처럼 느껴지도록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할 때 보이지 않지만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통해 우리의 형편이 다스려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 역시 예수님이 태어나고, 기고 서며, 아이로 자라기까지 마치 하나님처럼 훌륭하게 이 가정을 보호하고, 재앙으로부터 건져내는 훌륭한 역할을 감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늑한 집과 같이 자신의 역할을 다 한 요셉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세계란 큰 집으로 인식되었었는데, 하나님이란 바로 그 집의 주인이란 믿음이 있었듯이 아버지 요셉은 이들 가정의 주인으로써 군림하지 않고, 오히려 연약한 아내와 독특한 아들을 보호하고, 사랑해낸 가장으로써 이해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를 가진 아내를 믿어준 요셉의 믿음과 용인은 애굽 땅과 베들레헴의 나그네 여정에서 투철한 가장의 모습으로 승화되어 있었고, 12살에 예수님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에 갔던 모습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훌륭한 남성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내와 아들을 위해 살았을 아버지 요셉의 삶 속에서 오늘 우리나라의 헌신적인 아버지의 모습 역시 읽을 수 있겠습니다. 교회에서의 남신도의 자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 남신도분들만 빼고, 나머지 해당되는 분은 저를 따라해 보시겠습니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여보 힘내세요 예쁜이가 있잖아요” , 민원이 많이 들어와서..마지막으로.. “집사님 힘내세요. 예수님이 있잖아요”

 

1. 맛을 바꾸는 코드 : 예수

오늘 성경 이야기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인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가나 땅에 혼례가 치러집니다. 최소 일주일은 걸리는 이 결혼식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가게 됩니다. 당시 보통의 여인들이 결혼식에 하는 일은 음식 장만 등의 일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의 경사스런 혼인잔치를 위해 여인들은 최선을 다해 게스트(손님)가 되어 주었습니다. 힘을 다해 결혼을 축하해줬고, 춤추고, 음식을 나누는 매우 즐거운 잔치였을 것입니다.

왜냐면 결혼은 인위적인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하신 최대의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도 하나님이 선물하신 최대의 축제인 결혼식에 나가 계셨습니다. 그래서 본문1절은 어머니가 거기 계셨고, 2절에서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 혼례식의 주인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 무리를 초대하지 않았을 것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정황상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아들 예수와 그 제자들에 대해 소식을 들은 주인이 기꺼이 이들을 초대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혼례식에 오자마자 마침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없다.’라고 말하십니다. 이 때 예수님의 대답이 조금 엉뚱합니다. “어머니,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이 둘의 대화는 지금 가나의 혼인잔치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대화입니다. 애시당초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과는 다른 관심을 가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나 아들이나 오직 한 가지에 주목하여 대화를 나누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때, 곧 하나님의 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때, 그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시작이 바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있음을 어머니 마리아는 강하게 확신했습니다.

때문에 어머니 마리아는 곧바로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일을 시키든지 그대로 하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중요한 순간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느냐가 곧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순간입니다. 도대체 성령으로 잉태된 내 아들 예수, 그 예수를 통해 앞으로 전개될 하나님 나라란 무엇일까. 어머니 마리아도 궁금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당시 유대법에 따라 정결례에 사용되는 돌 항아리를 보시고, 그 여섯 항아리에 물을 아귀까지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여섯 항아리는 비워져 있습니다. 모든 정결례식이 마쳐진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능력을 잃어버린 유대의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능력도 기적도 나타나지 않는 죽어버린 공동체나 나라를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비어 있는 그 항아리 6개에 물이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으로 시작했다가 내 노력으로 인생을 채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젠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절망하여, 아예 물을 채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세상에게 실족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어진 분량과 계획을 채우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를 보십시오. 내가 지금 믿지 못했을 뿐이지..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때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마치 모래시계에 모래가 빠지듯..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카운트다운을 세며, 항아리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어라!”

 

물이 채워지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종교적 열정만으로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가 올 수 없습니다. 내 열심만으로는 주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다는 것은 맛이 달라짐을 말합니다. 성경은 수도 없이 예수님을 통해 놀라운 일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여인이 예수님을 통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린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란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린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왜 우린 변화될 수 없지?

안타깝게도 믿음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설명해줘도 얻지 못한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복음서는 오직 다음의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통해 인생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아무런 감동이 없던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통해 맛을 찾았습니다.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한 모임도 “예수님께 주목하였더니” 맛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미 모두 취해있었을 연회장이 새로 마시게 된 더 좋은 포도주의 맛을 보고는 여기 저기 탄식이 나옵니다. “사람마다 좋은 것을 먼저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고 소리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금방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지금까지 우리가 맛보지 못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신기하고, 놀랍고, 대단한 축제가 될 것이란 사실을 오늘 이야기는 말해준 것입니다.

 

2. 남신도회에게 부탁하는 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처음에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요셉의 진면모에 대해 나눈바가 있습니다. 남신도회는 여신도회와 달리 어느 교회나 그 수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우리 교회만 보더라도 여성신자와 비교하여 1/3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수가 적다고 해서 함부로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예수를 믿고, 직분을 맡아,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고,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 억센 사내들이 ‘예수’라는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도 왠지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나 남신도회가 변화되면 교회가 변화되는 경우는 많이 봅니다. 어떻게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먼저는 예수님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올해 총회 표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로워지는 교회입니다. 그만큼 교회와 성도를 답게 만다는 것은 예수 밖에 없다는 성찰에서 나온 표어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 근심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제일 큰 걱정은 교회에서 예수가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를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지만, 그 속에 예수가 없습니다. 맹물 같은 인생처럼 아직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경험할 마음이 없는 빈 항아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빈 항아리로는 성도라 부를 수 없습니다. 예수를 만나야 포도주가 됩니다. 포도주인척 해도 소용없습니다. 진짜 예수님을 알고 있는 사람 앞에 서면 금새 거짓신앙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도회는 인간집단이 아니라 성도의 모임으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공급받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분위기를 축제의 분위기로 만드는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나 청년이 아무리 앞에서 나팔을 불고 북을 쳐도, 남신도분들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 집회는 망쳐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 한 집사님이 남신도 기도회를 만들기 위해 궁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자청해서 목사님께 말씀을 드리고는 아침밥을 지어 기도회에 나온 분들에게 나눠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신도 아침기도회가 끝나고 아침을 먹으니.. 예전에 보지 못한 분들도 나왔다고 합니다. 식사를 거르기 쉬운 가장이나 혼자 사는 분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죠. 대화중에 근엄한 줄 알았던 집사님이 실은 수다쟁이였다든지.. 아무 말도 안해서 신앙이 있을까 했던 분이 실은 3대째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좋은 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끈은 쉽게 끊어지지만, 여러 줄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성도 역시 모였을 때 강해지는 것입니다. 자청하는 신앙으로 힘써 모이고, 교회의 분위기를 바꾸는데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는 섬기는 자세만이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신도회 활동 중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성과욕심입니다. 이것들은 대부분은 명령하고, 통제하는 습관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실상 이런 통제 욕구는 정신질병에 가깝지 건강한 리더십과는 거리가 멉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섬김의 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자기 목숨을 내려놓은 희생과 사랑이었습니다.

원래 인간 정치는 힘을 모으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힘을 나누는 행동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생활의 기본 역시 원래는 힘을 모아 역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소유를 나누고, 힘을 나누는 일에서 시작되었음을 살펴봅니다.

 

나가며..

저는 간혹 잘못된 조직화를 목격합니다. 한 사람에게 모든 힘을 실어주어 질서를 이루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 수 있는 것은.. 힘을 실어주는 대상은 바뀌지만, 힘을 실어주는 분들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끼리 권력화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신도회의 실상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타 교단의 실상은 조금 알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모든 신도회의 기본은 섬김이지 권력화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구나 요즘같이 합리적인 젊은 세대에게 어른들의 잘못된 모습들이 이내 교회에 대한 흥미를 심각하게 떨어트리는 부작용을 선물합니다. 정말 먼저 된 자가 정신을 바짝차리지 않으면 안되는 때입니다.

 

일당 백의 우리 구암교회 남신도회가 다시 부활하여 승승장구하는 그날을 바라며, 모든 성도님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이 변화되는 은혜가 넘치시길 바랍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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