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돌짝

카테고리

필통 (34)
풋살이 (2)
구암일기 (0)
목회이야기 (0)
딸랑구 (0)
구암설교 (30)
자료실 (2)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태그목록

최근에 올라온 글

하나님이 살리는 사람(왕상17:1~16)

들어가는 말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무너뜨린 것을 다시 세운 히엘의 두 아들이 죽음을 당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죽음과 대비해서 하나님의 종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 살아나는 두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살리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나눠보고자 합니다.

 

1. 이스라엘 현실

지금으로부터 약2900년전에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 북이스라엘은 특히 우상숭배가 범람하였고, 북이스라엘의 왕 중에 가장 완악한 왕을 뽑는다면 열왕기서에서는 단연 아합왕을 뽑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 이후에 나오겠지만, 예언자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는 훗날 군대장관 예후와 더불어 군부 쿠테타를 일으켜, 예후를 왕으로 세우고, 예언자집단에 우호적인 정권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예후는 말하기를 실제로는 ‘아합’이 다른 왕들보다 바알신을 섬기는 것을 열심히 한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일반 국민이나 정치인의 눈에 아합은 이스라엘이 그래왔듯이 어쩌면 평범하게 악한 왕일수도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지독히 악한 군주였다고 열왕기서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아합왕을 가장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아합은 지금의 레바논 지역인 당시 유력한 제국 페니키아의 군주였던, 엣바알의 딸과 결혼함으로서 역사가 말하는 대로 상당한 공처가로 주변국의 영향 아래에 이스라엘을 놓이게 한 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실은 아합은 믿음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자였습니다. 다만 제왕 초기부터 머리가 영민하고 계산이 빠른 자임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왕이 되자 당시 이스라엘 왕국의 북쪽에 위치한 시돈 땅의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과 결혼함으로서 국가의 이익과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했습니다. 물론 그가 나중에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것을 생각한다면, 이 모든 일이 철저히 자기 욕심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교활하고, 욕심이 많은 자가 아합인 것이죠.

역사가들도 그가 솔로몬 왕이 이스라엘의 부국을 위해 선택했던 해상중개무역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세벨과 결혼을 했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이미 이스라엘에 들어온 주변국과의 외교의 생리는 외부적으로 결혼정책으로 이해관계를 결속하고, 내부적으로 군사력을 키워 우발적인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 풍토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엘리야를 세우신 하나님

오늘 본문은 그런데 몇 가지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가뭄을 통해 모든 사람을 괴롭게 했는가? 그리고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르밧의 이방 과부에게 은혜를 베풀었는가 입니다. 왜 그녀를 살리셨는가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받은 후 첫 번째 했던 일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왕인 아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엘리야에게 선지자로서 첫번째 임무로 아합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라고 하셨을까? 선지자는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스스로 곤고한 자리에 내모는 것.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자리를 회복하는 것이 비로소 하나님 안에서 예언자적 사명을 갖춘 교회를 회복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충만한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 당시 악하기로 유명한 아합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자는 미가야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850명의 공식선지자가 있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선지자들이 있었겠지만 아합의 악행을 고발하지 못했습니다. 아합에게 악행을 지적하는 것은 곧 바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아무도 하지 않고 하기를 끔찍히 두려워하는 일을 하나님에게 명령받아서 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에게 공증 받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선지자는 그가 왕이든 평민이든 사악한 자든 착한 자든 하나님의 말씀을 단호히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상을 가려서는 안되는 것이죠. 이제 엘리야는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아합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으니 아합과 같은 권력자의 도움을 받기는 그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제 너는 권력자에게 붙어서 무엇 얻어먹을까 하는 생각은 아예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먹고 사는 문제도 하나님께만 맡기라는 뜻으로 즉시 요단 그릿시냇가에 가서 까마귀들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기근을 선포하고 난 후 까마귀가 주는 떡과 고기 그리고 시냇물이 마르기 전까지 마십니다.

 

3. 작은 자들의 용기

엘리야가 두 번째로 하나님에게 명령을 받은 것은 악한 아합에게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르밧 과부에게 찾아가서 그 가난한 과부의 떡을 빼앗아 먹는 것입니다.

차라리 사악한 왕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은 당당하고 떳떳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가뭄 중이었고 사람들은 양식이 떨어져서 난리가 났는데 그것도 부자집에 가서 떡을 달라고 하면 그나마 나을텐데 가난한 과부의 집에 가서 떡을 달라고 해서 먹으라니 하나님도 참 너무하시다고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 같은 것이죠.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이 시키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합니다. 하나님이 과부의 집에 가서 그것도 한 기근 중에 떡을 달라 해서 먹으라니 엘리야는 그대로 합니다.

 

엘리야는 시돈땅 사르밧에 가서 한 과부집에 들어갔는데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물을 달라하고 과부가 물을 가지러가는 것을 불러 세워놓고 떡 한 조각을 함께 가져오라 했습니다. 과부는 이런 가뭄에 물을 달라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양식이 다 떨어져서 죽을 판국인데 떡까지 가져오라는 엘리야를 보고 어이가 없는지 이렇게 대답합니다.

"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말은 엘리야가 이미 자신은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밝혔다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은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진짜로 말하는데 라는 뜻입니다.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있는데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마지막으로 떡을 만들어 아들과 먹고 죽을 판국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속에는 당신이 하나님 여호와의 선지자라 하는데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서 힘없고 가난한 우리 같은 과부를 굶어죽게 하려하느냐 그런데 그 마지막 떡을 달라고 하는군요.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선지자가 맞소? 하는 원망 섞인 소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원망섞인 과부에게 조용히 다정스럽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말대로 하시오 먼저 나를 위해 작을 떡을 만들어 가져오고 그 다음에 당신과 당신의 아들을 위해 만드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기까지 당신 집의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했고 하나님의 과부의 집에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이 엘리야가 선지자로서 행한 첫 번째 기적입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선망하며 위대하다고 외치는 엘리야가 지질이도 못나고 가난하고 그것도 이방의 시돈의 한 과부 앞에서 행한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요?

 

시돈 땅은 엣바알의 본고장이었다. 엣바알은 시돈의 왕이며 아합의 처 이세벨의 아버지이다. 또한 항구도시이며 아스다롯의 숭배지이기도 하다. 아스다롯은 사랑과 전쟁의 여신이며 검은 옷을 입고 입은 피를 흘리며 오른손에는 독사를 쥐었고 뱀 위에 올라탄 모습을 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타락한 모습과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아스다롯을 숭배하는 시돈의 왕이며 바알의 제사장의 딸이 아합 왕의 처가 되어 이스라엘에 아스다롯을 들여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세벨은 희대의 악녀가 된 것입니다. 희대의 악녀가 있는 그 땅에 바로 그 시돈 땅에 그것도 가뭄과 기근의 한 가운데서 그것도 아무 힘도 없는 가난하디 가난한 한 과부의 집에 왜 엘리야를 하나님이 보내셨을까요? 이스라엘의 믿음이 좋은 과부집이라면 그래도 나을 텐데 말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이며 우상숭배의 열악한 종교환경 속에서 궁핍하고 가난한 한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타락할 대로 타락했고 의인 하나가 없을 정도로 부패했습니다. 그러나 아스다롯의 악녀가 판을 치고 사악한 우상숭배가 팽배한 시돈 땅에 아주 보잘것없는 한 여인의 믿음과 순종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악한 가를 비교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 덕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지만 이 사르밧 과부는 한번 본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말을 들었고 믿었고 순종했고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고백하고 증거하기까지(왕상17:24) 합니다.

 

이 사르밧 과부의 믿음은 예수님 당시 두로 땅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과도 통합니다. 그 여인은 이방여인으로 천대받았지만 굽히지 않는 믿음과 간구로 예수님에게 딸을 고침 받았습니다. 이 믿음은 지금까지도 이방여인의 탁월한 믿음으로 칭찬을 받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믿음과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은 그 당시 스스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백성이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랑하던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조개 속에서 진주를 찾듯이 모래 속에서 금을 찾듯이 쓰레기더미에서 핀 장미꽃을 찾듯이 지금도 이름도 없고 내세울만한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믿음을 찾으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높여주시고 잘되게 하시니까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과부들은 하나님에게 특별히 받은 것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부족한 중에서 어려운 중에서 그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하나님 됨으로 높여 드리고 순종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너는 내가 너에게 특별한 것을 주지 않았는데도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높여주지 않았는데도 나를 믿고 순종하고 나를 높여주는구나! " 그래서 하나님은 이 비천한 이방과부 앞에서 엘리야의 첫 번째 기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 좋아하며 성공지상주의로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이 찾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살리시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사람인 것입니다.

Posted by 돌짝
, |

신앙의 완주(왕상11:1~13)

 

들어가는 말

인생의 경주를 완주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들 말씀합니다. 잘 달리는 것처럼 보이다가 마지막에 넘어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죠. 프랑스 총리였던 피에르 베리고부아는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으로 프랑스의 총리가 된 인물입니다. 철도 수리공부터 온갖 힘든 일을 하다가 정치에 입문한 그는 총리가 되어 강력한 프랑스를 재건하는 일에 큰 공을 세워 국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평소에 청렴과 정직을 명예로 삼은 그는 나중에 무이자 거액 대출 스캔들이 터지고, 이로 인해 총선에서 참패하자 크게 낙심하여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인생 밑바닥에서 최고 성공의 길을 달렸지만, 마지막 순간은 모든 이에게 안타까움을 남긴 사람인 것이죠.

신문기자였던 찰스 템플턴이란 사람은 어느 날 인생에 회의와 죄책감에 사로잡힌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어려울 때 간절히 소원하는 가운데 만난 예수님을 통해 그는 다시 삶에 대한 감사를 통해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평소 기자 생활을 하며 세상에 대해 큰 절망을 경험한 그가 당시 빌리 그레이험이라는 목사님을 따라 다니며, 전도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하나님과의 작별:내가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이유”라는 책을 쓰고는 갑자기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게 된 것이죠. 세상에 절망한 그가 이어서 사람에게 절망하고는 신앙을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결국 치매로 인생의 모든 것을 잊고, 살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신앙을 아름답게 가꾸고, 지키며, 신앙의 완주를 이루는 것이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생각보다 신앙을 시험 들게 하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신앙을 잃고, 그저 사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그렇습니다. 더구나 신앙을 잃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는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자신들을 지켜 줄 성벽과도 같은 이권과 고집을 더욱 고집스럽게 쌓아 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라는 한탄과 ‘과연 나는 이와 같은 불신앙에서 자유할 수 있는가?’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반드시 완주해야 합니다. 넘어지더라도 아주 엎드려지지 않도록 항상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1. 솔로몬의 전후반전

오늘 읽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솔로몬의 삶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흥왕했던 전반기 20년과 어두웠던 20년의 이야기를 살펴봄으로 신앙의 완주를 결단하는 귀한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통치 전반기는 ‘건축과 보물, 지혜’로 설명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거룩한 성전을 짓는 일에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자신의 광영을 열국에 높이기 위해 화려한 궁전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 두 개의 건물을 짓는데 20년이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건물이 높아질수록 하나님의 영광이 높아지는 것과 동시에 솔로몬의 영광도 높아졌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두 여인이 한 아이를 자기 아이라고 우길 때에도 문제를 해결했었고, 좁고 척박한 땅에 위치한 이스라엘 나라를 부요하게 만드는 길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실행에 옮긴 왕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해양중계무역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무역으로 재물을 쌓았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에 기술자가 없을 때는 원수라 할지라도 손을 벌려 그들의 기술과 재능을 배웠습니다. 실제로 사해와 홍해가 만나는 곳에 에시온과 게벨이라는 항구를 만들어 동방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고, 두로 지방의 항구를 통해서는 위쪽에 지중해와 연결하는 길을 열어 이스라엘이 역대 경험하지 못한 부유를 갖게 했던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로 이토록 훌륭한 왕으로 통치하던 솔로몬은 후반기에 들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그의 달라진 모습을 정리하면 “하나님 없이 스스로 부국강병을 이루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통해 삶의 지혜와 기술을 배웠다면, 나중에는 신앙을 잃고 삶의 술책과 테크닉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도록 내어준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 옛 것을 모두 유치하다고 치부하는 것처럼 신앙에 있어서도 솔로몬은 하나님의 손을 놔버리고, 자신의 주관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는 특히 다음의 두 가지 행동으로 이런 자신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먼저는 주변 나라들과 ‘결혼동맹’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나라’가 아닌 ‘동맹국들의 보호를 받는 나라’로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결혼 동맹은 20여민족과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혼’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혼한 이방여인을 위해 그 여인의 나라의 풍토에 맞는 궁전을 새로 짓고, 우상제단을 건축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궁전건축은 국고를 탕진하도록 하였습니다. 우상제단은 단순한 건축물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속에서 갖가지 축제와 행사가 이뤄지게 하였고, 왕과 신하 모두 이 행사에서 자유 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솔로몬과 이스라엘은 점차 죄에 대해 둔감해지고, 이와 같은 문화와 불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한 가지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품이 넓은 것처럼 행동한 들.. 그것은 우상숭배의 행동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탈을 쓰고는 실은 힘과 안전만을 도모하는 일들이 한국교회를 병들게 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무분별하게 품는 것이 아닌, 분별하여 품는 지혜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솔로몬은 비록 우방국을 통해 안정은 얻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날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기도합니다. 복을 받았습니다. 좋은 집도 갖습니다. 사람도 고생해졌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도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왠지 예전과 같은 뜨거움은 사라집니다. 안일하게 됩니다. 야성이 없어집니다. 손에 빠른 인간적인 수고가 기도를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기도로, 뜻으로, 영적인 두려움과 세상을 대적하는 신앙은 사라지고, 점차 솔로몬과 같이 ‘능력있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자녀들도 부모님의 부르짖는 신앙은 배우지 못한체 지금 부모님의 ‘수단’만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몰락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부로라도 하나님이 원하는 길에 자신을 세워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시험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나도 모르게 배워버린 세상이 불타 없어지고, 다시 하나님께 사용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대가 지불없이 배울 수 있는 신앙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가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도록 내몰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물질이나 명예의 곤란도 당하도록 내몰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신기하게도 곤란하게 했던 것들이 도리어 힘이 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아,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는구나..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신앙의 선배들이 어떤 심정으로 믿음을 얻고, 은혜를 입게 되었는지 나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배들이 자라게 한 나무의 가지와 줄기와 뿌리를 잘라, 자기 땔감으로 쓰면서, 옛 선배들의 일화만을 자랑하는 어린아이가 돼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단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더 이상 옛 선배들의 고난을 팔아 자신의 지적희락이나 영광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일부로라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길에 자신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성경 속에서 일어난 기적과 사건이 오늘 나의 사건과 기적이 될 줄로 믿습니다.

 

자, 두 번째 솔로몬의 잘못은 ‘전차부대’의 창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늘 주변국의 전차부대에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정착 초창기에 가나안땅에서 내쫓지 못한 부족은 대부분 기마부족이었습니다. 이들은 사사시대에도 사울왕때에도 반복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차부대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말’이 필요합니다. 말은 가나안 땅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집트, 애굽땅에서만 구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에 세워질 왕에게 경고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여자를 많이 가지는 것”과 “말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들이 떠난 애굽 땅을 말을 얻기 위해 다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북방과 남방에 매우 큰 전차부대를 만들기에 이릅니다. 그는 든든한 국방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매우 당연한 부국강병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위대한 신앙과 능력 있는 백성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때는 부국강병을 이룬 솔로몬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주변국의 압제와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싸워 나가던 모세와 여호수아, 사사들의 시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닐 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되어갔고, 또 하나님 안에서 된 자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 이만하면 됐어! 너야말로 나의 전사이고, 나의 종이며 친구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던 때가 바로 그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봤더니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봤더니 이스라엘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을 바라봤더니..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자기 힘만을 의지하는 문화가 판치는 세상문화가 되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 이후로 그의 자손들이 경험한 남북분열이 바로 이런 문화로부터 출발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패역한 것은 분열을 만듭니다. 죄가 나라와 공동체에 들어오면 분열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더욱 의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르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모든 분열의 악한 영이 이 시간 떠나가길 소원합니다. 신앙은 힘을 가지는 것에 있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곤고하고 낮은 곳에 처해야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낮고 곤고한 곳에서 여러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갚아 달라고, 하나님께서 변화시켜달라고, 하나님께서 분명 가만 두지 않으리란 믿음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솔로몬 이후 남북이 분열되고 고작 40년이 지나는 동안 왕이 7번이나 바뀌고, 그중 3명이 죽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답습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만과 패역한 신앙에서 자유해지시길 바랍니다. 솔로몬은 이를 이루지 못해 믿음의 지조를 버리고 도리어 하나님을 거역하는 늑대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는 온 나라를 우상숭배로 더렵했습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도 그랬습니다. 윗니가 시린다고 아랫니가 시리랴? 라는 에스겔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좋은 것을 받고도 나쁜 열매로 나라와 아들을 망친 것입니다. 그는 그 명석함으로 자신의 힘을 의지하다 나라 전체를 어려움에 빠트렸습니다. 지도자가 자기 힘을 의지하기 시작하면, 백성들은 모두 제 갈 길을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백성들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야말로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잃게 된 것입니다.

 

나가며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리고 왕의 보좌에 앉았습니다. 이 날의 영광은 모두의 기쁨이자 축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저와 여러분이 처음 신앙을 하기로 결단했을 때 하늘에서 크게 기뻐하시고, 잔치가 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처음 받은 것을 지키지 못하고, 점차 자신의 힘을 의지하더니 나라를 강하게 하기 위해, 부요하게 하기 위해.. 점차 신앙의 완주를 이룰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음을 이 시간 나눴습니다.

솔로몬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 없이 더 높이 날아오르려는 순간 추락하여 결국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생은 철저히 하나님과 한 호흡을 이루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완주는 그 호흡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불편을 자처하는 일이고, 하나님 때문에 형통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각자에게 주어진 단 한번 뿐인 삶을 솔로몬과 같이 낭비하지 마시고, 하나님 안에서 끝까지 완주하기 위해 노력하는 또 완주하시는 멋진 신앙의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

Posted by 돌짝
, |

생명나무의 길(창3:22~24)

 

 

들어가는 말

 

토마스는 주님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먼저 너의 욕망이 온전히 나의 선한 뜻을 따르도록 하여라. 내가 너의 대의 명분이라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자족하는 마음을 얻겠지만, 조금이라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있다면 이는 너에게 걸림돌이 되고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미리 품은 욕망에 너무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여라.”(p182)

 

1.욕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는 인정의 욕망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직장에서 교회에서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도 이 욕망에 해당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욕망에 따라 자기 성취를 이루게 됩니다. 좋은 집과 차, 직장 등 부정할 수 없는 생존과 성취의 욕망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욕망이 잘 못 변질되면, 지배의 욕망으로 발전한다고 합니다. 지배의 욕망은 불안에서 출발하고, 모든 것을 손에 쥐어야 속이 편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도 없으며, 반드시 지배해야만 자신이 인정을 받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 경우는 매우 위험한 상태로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드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대등의 욕망입니다. 상대방을 자신과 대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할 필요도 없고, 있는 그대로 상대를 인정하면 그만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대등의 욕망에 이르지 못하고, 지배와 인정의 욕망에 머물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다 불안감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이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 모여서 세력을 이루는 것. 믿을 만한 사람을 만드는 것. 이 모든 행위가 실은 인간의 생존 욕망 중 가장 기본적인 인정의 욕망에 따라 이뤄진 행동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런 행동을 통해 실제의 자신과 불안 때문에 또는 사회적 요구때문에 만들어낸 자신을 헷갈리는 경우입니다.

 

 

2. 어떤 목사님은 아내에게도 자녀에게도 늘 목사로 산다고 합니다. 물론 그 사모님은 정신과 치료를 받고 계신다고 합니다. 아내는 목사님과 사는 것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뒤로 숨어버린 목사라는 성직도 부담이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결혼했을 때 목사님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요구와 성경을 보다 율법적으로 또는 종교적 열심으로 따르다 보니 어느 순간 자나 깨나 목사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흔히 하는 말로.. 날 때부터 목사는 없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는 만들어지는 것이란 뜻이겠죠. 그런데 녹녹치 않은 현장에 적응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목사로써 사는게 익숙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실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처음 목사님을 만날 때, 그 있는 그대로의 자아는 분명 지금의 목사와는 다를 것입니다.

순수함과 경직되지 않은 자유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왠지 사모님이 힘든 것은 직업 목사로 사는 남편. 아무런 행복도 느끼지 못하지만, 목사로 낮과 밤을 사는 남편이 불쌍하고 소통이 되지 않아 불행하게 되었다는 현실이었습니다.

 

 

3. 오전에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사람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자기 소리를 귀로 듣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을 하는 자신도 ‘나’라고 하지만, 외부에 들리는 소리에 반응하는 나도 ‘또 다른 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원래 나’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 때문에 곧잘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 설명해준다.

 

죄는 사람이 뱀의 소리를 듣고 ‘스스로 판단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 먹고는 동산에서 쫓겨난 상태를 말합니다. 무엇이 따먹게 만들었을까? 자기 결핍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향한 인간의 욕구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2장 16~1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최초로 사람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어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창세기3:5절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아 아심이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간교한 뱀(즉, 사탄이 공중 권세 잡은 세상)의 말을 듣고 맙니다.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생령이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귀한 존재였지만, 간교한 뱀의 속임수에 넘어갑니다. 어떤 속임수입니까? ‘바로 자신에게 없는 결핍을 자극하는 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를 먹도록 하시고, 다만 한 가지 선악과만을 먹지 말라 하셨지만, 뱀은 반대로 바로 그 선악과를 먹어야 산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자기 부정이 아닌 자기 인정을 따르다 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야말로 창3:16~17와 같이 에덴동산에서의 영생의 삶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한 명, 한 명을 바라보시는 분이시지, 저와 여러분을 비교하여 바라보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 상대적으로 죄가 더 많은 다른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 때문에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 에덴동산의 영생의 삶이 인생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세상은 간교하게 틈을 타 어떻게든지 우리를 거짓된 모습으로 만족하여 살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출산하고, 수고하고, 땀 흘리고, 노동하는 데만 가치를 두는 존재가 아닌 것 입니다. 꿈꾸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뜻을 따라 세상을 다스리고,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일 것입니다.

 

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체 영생할까 두려워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막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알게 하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께 만족하는 단순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첫째는. 가죽옷을 지어입히심입니다. 에덴 동산의 최초의 희생입니다. 입는 순간 제사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둘째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먹으면 정녕 죽는데, 영원히 죽는 상태를 막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실패했다고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

이제 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생명나무가 다시 발견되었다는 것은 에덴동산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천국이 회복되고 에덴동산이 회복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에 에덴동산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고 생명나무 과실을 먹게 될 것이며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놀랑룬 영적 경험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새 땅이 회복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 입니다

 

 

Posted by 돌짝
, |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