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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얌과 아사(왕상15)

 

들어가는 말

 

1. 하나님이 하나로 묶은 것

오늘 이야기에는 아비얌과 아사가 나옵니다. 우선 아비얌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15장 1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열여덟째 해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 성경은 북이스라엘의 왕의 통치 년도에 맞춰 남유다의 왕 아비얌의 등극 시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임금을 이렇게 묘사한 것은 이 두 나라가 서로 전쟁을 하여도, 결국 한 나라, 한 백성임을 말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인생은 하나님이 하나로 묶은 것을 인간이 어떻게 둘로 만드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비얌은 그의 아버지 르호보암이 행한 모든 악행을 그대로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권력을 사랑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져버린 경우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책임했습니다. 또 백성들 앞에 무책임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유다 공동체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세우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산 정상으로 가는 오솔길이 여러 갈래 일뿐 결국 정상은 하나가 아닌가. 진리를 두고, 여러 종교가 결국 분란을 멈추고 하나 아닌 가라는 무책임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도 무책임한 말입니다. 심지어 기독교에는 진리가 없다는 말은 무책임을 넘어 죄악에 가까운 말입니다.

아비얌의 아버지 르호보암은 하나님께 가는 길을 병들게 했습니다. 아세라 상과 우상숭배가 그 증거입니다.

그의 정치는 하나님 아닌 사람의 인기에 있었습니다. 인기를 얻고자 우상숭배를 하고, 그리고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예배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실제로 그들이 산당에 모여 행한 일은 우상숭배일 뿐입니다. 자신들이 그 전부터 믿어왔던 전통과 믿음으로 여호와의 얼굴을 가렸을 뿐입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신앙을 눈감아 주는 여로보암과 아비얌의 통치에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 유다 땅에서도 우상숭배가 이뤄졌습니다.(왕상14:23)

 

우리가 기독교 신앙 가운데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왜 당신들은 당신의 종교만 옳다고 말합니까? 당신은 왜 관용적이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에 대해 뭔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한 사람들의 신앙을 말합니다. 이 세상이 죄로 인해 온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에게 무책임하게 여기도 저기도 모든 것을 다 인정하라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인 것이죠. 그래서 다른 종교와 달리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가 틀어진 것을’ 죄라고 말하고, 그 죄 때문에 그 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그 죄가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대로 예수님만이 진리이고 구원의 길이라고 믿고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오히려 책임 있는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비얌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책임 있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한 가지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실은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나는 사람입니다. ” 그는 여러 사람의 인기를 얻고자 정치적 태도를 취했을 뿐. 생명과 신앙의 태도를 보이지는 못했습니다.

성경은 그의 태도와 다윗의 태도를 비교합니다. 15:3절에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다.”

다윗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죄를 깨닫는 마음이고, 자복하는 마음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일까..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이 자꾸만 생각이 납니다. 아무리 믿음을 지키려 해도 지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방 잊기 때문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사모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모해야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비얌은 그 신앙적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믿음을 잃음으로 3년이란 짧은 기간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아사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15:9) 아사는 아비얌을 이어 유다왕으로 세워집니다. 아사는 아비얌과 한 형제로 오해할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15:10절의 말씀입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라.. 그리고 그가 태후에서 쫓겨난 것으로 보아, 아사의 어머니가 확실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사는 마아가의 손자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우상숭배를 일삼던 할머니 마아가가 아비얌이 죽자 스스로 태후 즉 왕의 어머니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이스라엘을 전횡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사는 종교개혁과 더불어 할머니 마아가를 태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사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만든 사람이 되고, 아비얌과 마아가는 모자사이가 아니라 마치.. 어머니와 통간한 아들 관계처럼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습성을 볼 때 또 역사서는 마아가가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이와 같은 행위를 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사는 야비얌과 달리 41년이란 세월을 통치합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11절,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선 아비얌이 행했었던 남색하는 자들을 쫓아내고, 모든 우상을 제거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할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우상과 아세라 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태후의 위를 폐했다고 1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이 이룬 아세라 목을 찍어 기드론에서 불태웠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우선 아세라는 여성최고신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아세라와 우상은 따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아세라는 우상을 둘러쌓기 위해 만든 자연히 자란 나무가 아닌 ‘억지로 심어 놓은 나무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바알 제단을 허물고, 그 곁에 있는 나무들을 베어 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 역시 왜곡과 변질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신 것은 다 선하지만 인간은 이것을 왜곡한다.”라는 말이 떠 올랐습니다.

왜냐하면 “노아는 창세기 12:8,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합니다. 또 아브라함은 창21:33절에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에셀을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에셀은 아세라의 다른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 이젠 우상을 숭배하는 것으로 왜곡되거나 변질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왜곡으로부터 아사는 통치의 질서와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는 형 아비얌과 달리 무책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윗과 같이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친 할머니를 폐위하고 이스라엘의 정신을 지켜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할 수 있습니다. 혹시 그가 종교적 광기 때문에 냉정하게도 할머니를 내친 것일까요? 아니요. 그것이 나라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는 것임을 아사는 하나님을 통해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책임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사는 형 아비얌의 통치에서 또 어머니의 우상숭배가 어떻게 백성들을 병들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지게 하는지 봐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실 “우두머리”가 되 보기 전에는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 저건 저렇게 해야한다라고 말은 해도.. 막상 우두머리가 되면 이해관계들 때문에 쉽게 일을 처리하지는 못하는데..., 아사는 믿는 대로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상당히 놀라운 일입니다. 아사는 하나님 앞에 악행을 정리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의 통합을 원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통합은 이처럼 반드시 죄의 문제의 해결안에서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예화>-어떻게 아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가정환경이 좋지 못한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가족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아직 어리기에 그대로 참았고, 나중에는 스스로 생기는 분노를 잠재우는데 탁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집을 나선 들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답습된 습관은 시간이 지나 잊혀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에 늘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어른이 되버렸다고 합니다. 분명 옳지 못한 일인데도 자신도 모르게 이 일을 용인해버리거나, 심지어 입장이 뒤 바꾸는 일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다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성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경험한 세상은 분명 뛰쳐 나가고 싶은 현실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다시 불의와 타협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사도 이 사람과 다름없는 현실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죽자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종교개혁을 이루고, 할머니의 욕심과 종교 혼잡주의를 꺽었으며, 왕권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사에게 놀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개혁은 기존 현실와의 관계 사이에서 상당한 감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본토 친척 집을 떠나 할머니를 폐위하고 우상숭배와 구습을 끊어내는 노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끊임없이 누나로 속여 팔아먹은 왜곡된 모습들과 닮아 있는 할머니와 아비얌 왕의 불신앙과 처신들 속에서 지혜를 배워, 다시는 이런 것들과는 타협하지 않되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가길 원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곡된 왕정 가문에서 태어나 그가 결국 하나님 신앙으로 이겨낸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할 결단이 분명한 것이죠.

 

그래서 아사에게서 지혜를 배우면 어떨까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각 자의 환경에서 왜곡을 경험합니다. 왜곡은 비틀어짐을 말합니다. 선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마치 매 맞는 어머니 편에서 아버지에게 저항하지 못한 아이가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이 아이를 어떻게 할까요? 일단 빼내야 합니다.

계모에게 학대당하고도 계모와 잘못된 애착을 형성한 아이들의 예, 그리고 분명히 알려줘야 합니다. 무엇이 나쁘고, 니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와 같은 어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란 것을 알려주고, 그래도 세상에서 잘 살아야만 한다고 내공을 길러줘야 할 것입니다.)

 

아사 역시 왜곡된 사람들과 마주쳐야 하는 숙제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아사는 왜곡된 현실과 마주했습니다. 그래서 14절에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론 왜곡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현실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산당은 분명 왜곡되고 온전하지 못한 현실, 가정, 회사, 관계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사는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그 자비와 공의에 편에서 여호와 앞에 온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가 하나님을 통해 가능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타협이 아닙니다. 영적인 주도권을 하나님께 두고 있는 한 오히려 아사는 아직 치유되어야 할 왜곡된 현실을 남겨두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부모이고, 할머니이고, 이스라엘이며, 당시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완전해질 가능성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사는

첫째로 하나님과의 믿음 안에서 온전한 신앙 인격을 실현했으며, 따라서 왜곡과 진리를 구분할 수 있는 마음과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둘째로는 왜곡된 현실을 개혁하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아 행동했으며,

셋째로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가지를 하나님 안에서 인정하며 통합해 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를 포함해 우리는 어쩌면 여전히 왜곡된 현실에서 종노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종의 마인드로는 온전한 삶의 지도자로 살 수 없습니다. 고작해야 장난질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과 현실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과 처신을 병들게 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아사의 이야기를 통해 끊을 것은 끊고, 마주할 것은 마주하는 지혜를 가지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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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에 관한 예화1

자료실 / 2014. 8. 12. 11:38

신앙인의 책임감

 

방관자효과(bystander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입니다.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이라고도 하고 구경꾼 효과라고도 말합니다. 1964년,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s)라는 여인이 뉴욕의 자기 집 근처에서 새벽 3시 30분경 30분 동안 반항하며 강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집 주변의 40가구에서 그 소리를 들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를 구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라테인(Latane)과 로빈(Robin)이라는 심리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대학생들을 실험 명목으로 불러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방을 여럿 나누어서, 어떤 사람들은 혼자 있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럿이 같이 있게 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문틈으로 연기가 새어들게 했습니다. 혼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75%가 2분 이내에 알렸고, 여럿이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6분 이내에 불과 13%만 알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럿이 있으면 서로 책임을 미루는 '책임감의 분산' 현상이 일어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때로 예배가 다 끝났는데도 에어컨은 계속 일을 하고 있고, 앰프는 설교자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모두가 다 갔는데 불은 여전히 밝게 켜 있고, 과자나 빵 부스러기가 방치되어 있으며, 방마다 사용한 흔적들을 그대로 남겨놓아 보는 이들에게 불평으로 소리를 하게 만듭니다. 다수가 사용하기 때문에 서로 방관하는 것입니다. 방관자 효과가 나타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상황의 애매함입니다. 위급한 상황인지 판단하기가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다수의 무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눈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책임감 분산입니다. '누군가 도와주겠지'하는 책임감 분산입니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방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경영해 본 분들은 직원은 능력보다 책임감이 우선이라고 말합니다. 책임감이야말로 사회생활의 최고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책임을 강조하는 책인 “무책임사원(로저 코너스, 톰 스미스 저)”에서 “책임감 없는 직원은 당신의 목표를 실현해 주지 않으며 문제가 발생하면 처벌을 피하려고 잔머리를 굴리거나 다른 사람 탓을 할 뿐이다. 이런 직원이 많아지면 조직에 불신과 분노가 쌓이고 성과는 바닥을 치며 리더는 좌절하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안창호 선생은 “책임감이 있는 이는 역사의 주인이요, 책임감이 없는 이는 역사의 객이다.”이라고 말했습니다.

급격한 산업화를 통한 고도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사회는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고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 풍토가 만연하여져 자연스럽게 책임감은 약화되었습니다. 권리를 찾는 목소리는 커졌는데 의무를 말하는 목소리는 작아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무한 경쟁의 전쟁터에 있는 아이들에게 부모들은 부족함 없이 채워주다 보니 무한개인주의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실종되어 책임감 교육은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책임감은 인내성, 주의집중, 자기통제, 자율성, 끈기, 성취동기, 의지력, 신뢰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책임감은 맡은 일을 완수하고자 하는 의욕과 자발성이 강한 정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책임감(responsibility)의 사전적 의미는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를 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책임감은 무책임, 책임회피, 투사, 무반성, 불평불만 등의 성격 경향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책임감 있는 사람은 스스로에 대해서 자존감을 느끼며 동시에 자기가 타인에게도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느낄 수 있게끔 행동합니다. 사회적 책임감이 높은 청소년이 낮은 청소년에 비해 사회적 행동을 더 많이 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책임을 잘 지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합니다. 자기에 대한 책임감과 타인에 대한 책임감, 도덕적 책임감, 법적인 책임감, 사회적인 책임감이 있는 사람들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냅니다.

책임감은 네 단계로 발달된다고 합니다. 첫째, 무지 혹은 본능적 행동의 단계로 책임감의 결과가 자신에게 미치는 고통 또는 불쾌감에 의하여 책임을 수행하는 수준으로, 이는 영아기에 주로 나타납니다. 둘째, 상벌에 의해서 행동하는 단계로 교사, 부모 등에 의하여 관리 감독되어 자기의 책임을 수행하는 수준으로, 이는 사춘기까지의 외부적 통제의 시대입니다. 셋째, 사회적 승인에 의한 행동의 단계로 집단의 의견이 행동을 결정하는 동기가 됩니다. 여기서는 행동이 가져다 줄 구체적인 상벌이 아니라 사회적인 칭찬이나 비판을 중요시합니다. 넷째, 내적 규제의 단계로 공통의 선을 위하여 행동하는 수준입니다. 곧 자기의 양심이나 합리적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최고의 단계입니다(Mcdougall). 신앙인은 신전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의식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보고계시다는 최고수준의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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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이승훈의 교육사상(오산학교)  (0) 2014.07.19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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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을 넘는 제자도(막8:34~38/겔18:25~32)

 

들어가는말

오늘 우리 사회를 비유하자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솝우화 중에서 자고새에 대한 한 편을 들려드리겠습다.

 

집 마당에서 두 마리의 싸움닭을 키우고 있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농부는 시장에서 우연히 길들인 후 팔면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자고새를 발견했습니다. 농부는 이 자고새를 구입하고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농부는 닭들과 친하게 지낼 것으로 기대해 마당에 같이 놓아 키우기로 하죠.

근데 싸움닭들은 자고새를 닭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고새를 못살게 굴기 시작합니다. 닭들이 부리고 쪼아대고 따돌리자 자고새는 서럽고 외로워 그들과 떨어져서 외톨이로 지내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기를 몇일 후, 자고새가 보이지 않자 이제는 수탉들끼리 싸우기 시작합니다. 이 광경을 본 자고새는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내 자신을 자책할 필요가 없군. 내가 못나서 당한 것이 아니야. 나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자비심 없이 싸우는 원래 못된 놈들 아닌가

 

사회학적으로는 흔히 이런 현상을 “집단 광기” 또는 “패거리 심리”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런 집단 현상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들 세계에서도 공공연히 혹은 은근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점을 아실 것입니다. 결국 이 이솝우화가 말해주는 것은 집단 광기에 빠진 사람들은 “누군가를 해치거나 괴롭히면서 서로 의리 있는 척, 용감한 척 하지만 결국 이들은 자신들 밖에 모르는 비겁한 자들” 일뿐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사회상 같지 않으십니까?

오늘은 평화통일 주일입니다. 우리 민족은 분단의 아픔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해방 이후 민족문제 역시 해결하지 못한 체 남북과 동서 분열 등 많은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중에서 우리 사회에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교회문제를 중심으로 그 중에서도 분열로 신음하고 있는 교회를 위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본래의 교회 정신은

카톨릭교회와 달리 우리 개신교회가 분파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반인들이 개신교회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갖는 이유 중에 하나인 이 분파에 대해 여러분은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실상 한국 교회의 분열이 대부분 권력 싸움에 의한 분열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양을 부탁하며, 또 함께 하실까요?

한국의 개신교회는 누가 뭐래도 장로교회가 주류 교단임을 부정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독 장로교회만이 100개가 넘는 종파가 범람하게 되었죠. 여러분은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선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상은 실은 이렇습니다.

먼저는 신사 참배에 관한 문제로 고신측이 제일 먼저 분열되었고, 신학을 충분히 학문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이유로 기장측이 두 번째로 분열되었으며, WCC총회 가입 문제로 마지막 합동측이 분열한 것이 오늘까지 이어져오는 실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후에 분열들입니다. 이들 분열은 신학적 차이가 없고, 교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도자들에 의해 100개가 넘는 분파를 거듭했다는데 있습니다. 그 이유는 권력을 갖고자 한 사람들의 행태였음을 알 수 있죠. 쉽게 말해서 나도 총회장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면 교회를 데리고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사실 장로교회는 매우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채택하고 있음에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예를 들어 성공회에서 떨어져 나와 그 성직 제도를 그대로 갖고 있는 감리교회는 사제인 목사의 권위가 월등한 반면에 칼빈에 의해 개혁교회를 이룬 우리 장로교회는 목사와 평신도들 가운데 선임한 장로가 당회를 구성하여 당회와 제직/공동의회가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보충해야 할 부분들이 나타나기도 했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믿음을 요구할 때 민주적 결의로만은 하나님의 뜻을 충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적 권위가 인간의 민주질서로만 통용될 수 없음을 안 교인들이 회중제도. 즉 목사와 집사의 구성만을 인정하는 정치제도인 회중교회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즉 교회가 목사의 목회 영역은 존중하면서 이 밖의 다른 사항에 대해서는 민주제도를 적용하여 치리하도록 한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은 위에서 말씀드린 고민과 실천에도 불구하고, 감리교회나 침례교회나 할 것 없이 장로를 채택하여 교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경우가 생겼다는 점입니다. 결국 본래에서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 실은 모두 불신앙과 욕심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결국 신앙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쉬고/

지난 2013년 미국의 교인 10000명의 교세를 가진 롱 아이슬랜드 연합감리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교회 앞에 한 노숙자가 주일 구걸을 하는 것을 어느 사람이 목격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교회의 담임목사가 부임하는 날로 교회는 큰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죠. 그래서 이 노숙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그는 예배당안으로 들어갈 때 제지를 받고, 그나마 맨 말석에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신임 목사님에 대한 소개가 있자. 앞에 연단에서 그 목사님은 보이지 않고, 맨 뒤 한 노숙자가 앞으로 걸어오는 것을 교인들이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노숙자로 분장을 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 목사님은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1절까지를 읽어 내려가셨다고 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다.... 양과 염소의 비유의 말씀을 읽기를 마쳤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인은 고개를 떨구고 차마 앞을 바라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 (예레미야 스티펙)

롱 아이슬랜드 교회는 본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증거에서 출발한 연합감리교회 소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스티펙이라는 목사님을 통해 비로소 교회의 설립 목적이 회복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죠. 그야말로 변질된 교회가 말씀으로 돌아가도록 회개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교회는 예수님을 닮는 것에서 하나로 연합될 수 있을 뿐. 다른 어떤 노력도 수고로울 뿐이란 사실을 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사회적 분열들과 복음

/쉬고/ 이어서 우리 사회는 어떨까요? 역시 수많은 분열과 불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쉬고/ 기억하십니까? 2009년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부엉이바위에서 자결을 했습니다. 이때 BBK 문제로 도덕적 문제를 제기 당했던 다른 한 대통령은 사대강 사업과 소고기 수입, 맥쿼리 등의 많은 이득을 챙기고도 살아남았습니다. 우리의 딸들은 OECD국가 중에서 가장 열악하게도 100:63비율로 남자보다 적은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취업을 하지 못한 성인이 다수이며, 세월호 사건 역시 결국 어른들에 의해서 아이들이 죽은 것과 다름 없다는 사실 때문에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아이들조차 지켜낼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730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단원고가 있는 안산을 포함해)여당은 11지역에서 야당의 4개 지역을 앞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세월호 심판론이 부각되었음에도 진 선거라 충격이컸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분별력 없는 국민을 욕하기도 하고, 야당과 여당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근본적으로 이 세상과 한국사회에 대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조차 지킬 수 없을 만큼 이 땅은 타락했고, 우리의 아이들도 지킬 수 없을 만큼 불행한 사회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진작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곁에서 이 사실을 바로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보다 나은 삶을 기대할 때 실은 가장 먼저 내가 심판받아 마땅한 사람이며, 이대로의 세상은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났다면 적어도 예수님을 죽였던 세상의 권력과 힘에 대해 우리도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흉기와도 같은 ‘힘’을 얻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죽이고, 우리의 썩어질 육신만을 살찌운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산참사, 소득양극화, 사대강, 세월호 사건을 보십시오. 이 사회는 불행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으며, 물이 고여 악취를 풍기듯이 아무런 변화의 노력도 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분열의 불의함들이 실은 아무도 벌어진 일에 책임지려 하지 않으려는 ‘무책임’과 연관이 있음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분명히 로마제국에 의해 죽은 예수님을 고백할 때, 본디오빌라도 라는 한 총독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 굳이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혐의를 찾지 못했고, 다만 집행의 책임자에 불과했던 사람의 이름을 기록했을까요? 이것은 교회가 단순히 예수님을 죽인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함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 스스로 불의한 선택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지도록 요구했던 기독교회의 신앙고백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결국에 죽음을 결정한 빌라도를 기억함으로서 신자 스스로 책임 있는 행동을 하도록 촉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죠.

 

냐면 이와 같은 고백은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우리의 모든 죄를 책임지셨다는 신자들의 찔림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찔림이 예리한 칼날이 되어 자신의 양심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 그 책임을 물으시고, 그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조차 아들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롭고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조차 살 수 없는 이 세상에 대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큰 환멸과 찔림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미 죄와 저주가운데 놓였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늘에 시민권을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은 세상과 자신에 대한 강력한 부정이자. 하늘에 것에 대한 소망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비로소 하늘의 마음이 내 마음 땅에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18장 32절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잘 들어 있습니다.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쁘지 않으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아라” 이는 하나님의 마음이 본래 심판에 있지 않고, 우리를 살림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가 ? “막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야말로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와 복음을 위해 살지 아니하면 세상과 같이 심판을 받겠지만 예수와 함께 죽고 살면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나가며..

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은 고작 12척의 배로 300여척의 왜구의 배를 물리친 사건입니다.

이순신장군은 좁은 길에서는 한 명이 능히 수천 의 병사도 막을 수 있다고 병사들을 이끌었습니다. 또 누구든지 죽고자 하면 살 것이란 병법서의 구절로 군사들을 독려해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좁은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는 죽기를 각오하고, 공중권세 잡은 마귀와 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로 이 땅의 불의함을 고발하셨고, 또 회개를 말씀하시다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이 이름 외에는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죽고자 하면, 영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살고자 하면 영원히 죽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책임과 권력과 같은 죄로 인해 분열된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분열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모인 무리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힘을 가지려 하지 마십시오. 그 힘이 영원히 여러분을 망칠 수 있습니다. 도리어 여러분의 힘을 나누고, 여러 신도들과 함께 화평을 이루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도이고, 우리 장로교회의 법도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산제사입니다. 기도합니다.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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