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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 다른 나(시37편 7~31절)828쪽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방송이나 서점에서도 이와 비슷한 질문과 답들로 구성된 책들이 꽤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1885년 러시아의 문호인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책 덕분입니다. 인간성이 무너지고, 신앙이 공격을 받는 극도의 혼란 시기에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아니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을 던졌던 톨스토이의 신앙이 잘 드러난 책이기도 하죠.

 

책의 내용은 그렇습니다. 어느 날 하늘의 천사장인 미카엘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지상에 한 아이의 영혼을 데리러 내려옵니다. 그런데 아이의 죽음을 만류하는 아이 엄마의 애원을 못 이겨 그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죠. 그러자 하나님은 미카엘에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찾을 때까지 지상에 있으란 명령을 받습니다.

세 가지 질문은 그렇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두 번째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세 번째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였습니다.

마카엘은 인간 속에서 살며 이 질문에 대한 답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카엘은 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자신을 돕는 인간에게서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곧 죽을 지도 모르고, 1년 동안 신어도 튼튼한 신발을 원했던 귀족에게서는 “인간은 자신에게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란 질문에 대해서는 고아들을 돌보는 여인을 통해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을 소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화1}

어려서부터 교회에 출석한 한 청년이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잘 성장했고, 성경이 말하는 아름다운 가치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몇 안되는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취업을 하고 나서 큰 난관에 부딪쳤다고 합니다. 왜냐면 자신이 알고 있는 또 옳다고 여기는 ‘내 자신’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또 달라야 할 자신’은 엄청난 차이를 갖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 괴리감 속에서 청년은 복음 안에서 참 자유를 포기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되버렸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이러한 긴장감에서 낙오한 신앙인들이 많은 것입니다. 스스로 신앙인답지 않은 구석도 많으면서 교회에 계속 나오는 것이 옳은지..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기도 하고, 한편 세상에서 인정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자연히 교회를 멀리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간은 자신이 아무런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될까봐 두려워하므로 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자신의 위치를 얻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결국 이 청년도 하나님에게서 아닌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 성취를 위해 일반적인 삶을 선택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문제는 이런 선택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어느 순간 이런 삶들이 진짜라고 믿기 시작한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전환-이음/

사람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자기 소리를 귀로 듣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자신도 ‘나’라고 하지만, 자신에게 말하는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에 반응하여 만들어가는 나도 ‘또 다른 나’라고 말합니다.

처음의 나는 본래의 나를 말하고, 두 번째의 나는 만들어진 나를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점차 본래의 나와 두 번째의 나를 일치시키기 시작합니다. 분명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정말 나인것처럼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정말 소중한 자신을 잃도록 만들게 되죠.

그러나 신앙을 갖는 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나를 훈련하고 발견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다윗은 오늘 시편에서 악인의 형통과 잘됨을 목도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본문 7절에서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라는 말씀으로 이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악한 꾀’로 자신을 도모하는 사람에 대해 다윗은 조급해집니다. 그러나 곧 다윗의 마음은 다스려집니다.

조급함”은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인정욕구”, 즉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자신의 원수들이 재빨리 유익을 취하고, 자신을 조여오는 것을 목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은 미련해 보이고, 인간의 손빠른 행동은 너무나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시험 기간에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아이의 불안감이 그렇고,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 신자의 의무를 다하는 부모들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회사나 교회에서 “어쩌면 저렇게 영악하게 살아갈까.. 혀를 내두르지만, 한편 자신은 뒤처지는 것은 아닌가? 라며 불안해 하는 인간의 모습”이 이것을 닮아 있는 것이죠. 결국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은 불안감에서 옵니다.

불안감은 자신도 통제할 수 없으므로 곧잘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습성을 낳기도 합니다. 그렇게 점차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지배욕으로 자신과 주변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 사는 삶을 살기위해 애썼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깊은 곳까지 알고 있었고, 다윗은 무엇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대한 골리앗을 무모함이 아닌 물맷돌로 상대해 이겼습니다. 그는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이루리라는 믿음 안에서 서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불안과 조급함이 엄습할 때, 또 자신 안의 한계와 죄성 때문에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할 때, 겸허히 그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내려놓는데 성공한 예배자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항상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서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이 없음을 빨리 깨달았습니다.

빨리 깨달으니 하늘을 봅니다. 그야말로 다윗은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예화2}

직장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 때문에 괴로워하는 성도님이 있었습니다. 그 상사는 늘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랫사람의 실적을 가로채거나 걸핏하면 야근을 시키는 어쩌면 흔한 상사들 중 하나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상처를 받은 성도님은 도저히 그 상사를 용서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비관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지난 시간 하나님 안에서 변화되어온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상대를 미워한들 실상 상대는 변화되지 않을 사실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이 변화시키실 것이란 소망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 같은 사람도 변화시킨 하나님께서 자신 앞에 닥친 상황들을 선하게 인도해주실 것이란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넓은 마음, 그 큰 그림을 받아들인 성도분은 다시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 깊은 사랑과 인정을 경험한 이 남자는 직장으로 돌아가 오히려 그 상사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자 놀랍게도 상사의 결핍이 채워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자 그 상사는 다른 부서로 옮겨가게 되었고, 심지어 이 성도분을 추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성도 분은 그 상사의 부서로 옮겨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하는지 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응답받지 못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해답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가 가진 답을 가지고, 그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그러나 이미 두 손에 오답을 들고 놓지 않는 사람에게 정답을 쥐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은 내게 꼭 필요한 응답을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정받는 삶’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인정 너머의 삶’을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다윗은 악한 꾀로 승승장구하던 원수를 보며 하나님 안에서 확신을 얻습니다.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걸음을 정했다는 것은 세상과 다른 사람이 원하는 또 다른 나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직하게 자신과 마주하여 얻어낸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의 걸음인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긍정하며, 두려움과 불안감 대신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거칠어도 황소걸음으로 뚜벅 뚜벅 제 길을 걷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의 유행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여호와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쉬고/

많은 사람들은 그러나 ‘인정받고 높아지려는 결핍’을 채우려다 ‘자기불행’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뻔히 불행해질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인정받아 높아지려는 마음은 정욕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높이려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씁니다.

자기 결핍에서 나오는 이와 같은 행동은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자기 결핍을 다른 사람 때문이라 핑계 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 내가 행복해질텐데.. 저 사람 때문에 일이 되지 않아.. 그러나 실상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알아갈 이유가 됩니다.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나의 영적 게으름이 온전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세상을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가진 자로 더 가지게 하는 곳입니다. 이 세상의 이자놀이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인정받고 높아지려는 결핍’을 극복한 사람이 하늘 소망으로 자신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니 더 큰 소망으로 자신을 채웁니다. 채워보니 자유해집니다. 채워보니 넉넉해집니다. 적게 가지고도 넘치게 가진 사람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본문 16절 말씀입니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쉬고/

 

나가며..

광야에 한 남자가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질문입니다. 모세는 이 질문을 통해서 자신의 소명과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유대인, 이집트의 왕자, 살인자, 목동과 같이 그때 그때 닥치는대로 살아가던 모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운명과 목적을 깨닫게 된 각성자였던 것입니다. 초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던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가 빛에 놀라 말에서 떨어져 물었던 질문은 “주는 누구십니까?” 였습니다. 바울은 이 질문을 통해 자신의 소명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혈통 있는 베냐민 지파요. 억만금을 줘야 살 수 있는 로마의 시민이요. 가말리엘 문하의 엘리트요. 율법에 능통한 바리새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갈2:20에서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바울은 자신을 설명하는 신분과 능력, 외모와 출중함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게 된 자신을 참다운 자신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거짓 자아를 깨트리고, 영원하고 온전한 자아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본래 자신의 모습대로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세상이 필요한대로 여러분을 이용만 할 뿐.. 여러분 안에 가치를 밝혀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는 동안 삶의 도움을 하나님께 바라며, 동시에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거나 친구간의 우정을 넘는 자신의 목숨을 드려 우리를 구원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장 나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난 후 은혜를 주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은혜를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한계를 이해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한 번 성령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로 결단한 저와 여러분은 더 이상 “인정받아 높아지려는 결핍”으로 삶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한 귀족은 1년도 살지 못하면서 1년 동안 신을 새 구두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없는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고” 미카엘 천사는 하나님께 아뢰었다고 합니다.

정말로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 시간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31절 말씀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을 품고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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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7기준과 포용이 있는 신앙(왕상15/)

들어가는 말

한 여성이 심리상담사를 찾았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성격이 평소 무덤덤한 탓 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요즘에 그 정도가 지나쳐 상담사를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특별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얼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전 제 부모님이 교통사고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별로 슬프질 않는 거에요.. 그때는 제가 집 떠나온지 오래되어서 그런가 했는데, 이번에는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거에요. 회사 생활도 쉽지는 않지만, 다른 동기들이 다 그만둘 때 저는 그래도 잘 버티고 왔거든요.. 그런데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 저는 지금 제 아이들이 잘못된다고 해도 전혀 걱정되지 않습니다. 선생님. 제 문제점이 뭐죠?”

정상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인생의 중요한 때에 늘 자신을 괴롭혀왔지만, 정작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이제야 부딪치기를 원했던 것이죠.

 

일단 이 여성은 어렸을 때 반복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늘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를 지킬 수 없었던 나약한 자신. 그런 불행을 매일 경험하면서 점차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마음을 닫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정은 따듯함이나 관계가 이뤄지는 곳이 아니라 그녀에게는 가족을 지킬 의무만 있고, 감정적인 교류나 올바른 관계를 만들어가는 곳이 아니었던 곳이죠.

그녀는 어린 나이에 내면성장이 멈추고만 것입니다. 그리고 상담사는 다음과 같이 해결점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당신은 아버지에게 그 부당함에 대해 말했어야 합니다. 왜냐면 당신은 불행을 외면하는 능력은 남들보다 월등하지만, 문제와 부딪쳐 자신과 가정을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제이자 심리학자인 죤 브래드 쇼는 ‘가족’이란 책을 통해서 한국에 알려진 분입니다. 그는 앞선 이야기와 같은 개인의 문제는 결국 가족 전체의 문제가 그 개인을 통해서 드러난 결과라고 말합니다. 그는 상처로 인해 우리 안에 있는 자라지 못한 인격. 그 내면아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결국 개인의 문제는 오로지 가족들 간의 문제 해결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만 문제 해결의 책임을 묻던 태도가 아니라 한 가정에게도 책임을 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공동체에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공동체가 반대로 일원들의 삶을 망칠 수도 있음을 이런 적용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병든 유대공동체와 왕정가문에서 태어난 아사왕

오늘 읽은 본문은 사울왕에서 솔로몬까지 하나를 이루었던 이스라엘이 분열하여,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지역으로 갈라지면서 남쪽에서 왕이 된 아사왕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국가의 역사 중에는 아사왕과 같은 하나님께 충실했던 역사보다 우상숭배와 범죄의 흔적이 더 많이 기록되어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솔로몬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복을 누렸던 이스라엘이 그가 죽고나자 결국 남쪽 2개 지파에는 르호보암왕이 북쪽 10개지파에는 여로보암 왕이 세워지면서 본격적인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원래 하나님과 약속한대로 하나님의 법도와 신앙을 잘 지켜내지 못하고, 솔로몬 때로부터는 우상숭배와 믿지 않는 이방여인과의 결혼 그리고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한 정치가 이스라엘 왕정가문과 나라를 병들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왕정가문이 비신앙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브래드 쇼에 말대로라면 한 번 타락한 가정이나 공동체는 다시는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적용할 수 있겠죠.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사는 달랐습니다. 는 혼란 가운데 올바른 신앙을 지켰습니다.

 

아사의 성장환경은 원래는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의 법도로 다스려져야 하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리고 공공연히 안식일마다 그런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고, 회당과 학교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가르쳐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였던 아비얌은 그런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사가 경험했을 할아버지 르호보암 왕 역시 이와 같은 의무를 다해야 할 분이었습니다. 더구나 할머니 마아가는 이스라엘의 시조인 다윗왕의 아들인 압살롬의 딸이었습니다. 본래 다윗의 후손이고, 하나님을 믿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할아버지 르호보암, 할머니 마아가, 아버지 아비얌은 모두 이런 하나님의 법도와 의무를 어겼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져야 할 이스라엘 땅에서 이 분들은 공공연히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산당과 성전 뜰에 가증스런 이방신상과 아세라 나무들을 심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의 딸 마아가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왕국을 장악하고는 나쁜 일만을 행했습니다. 그야말로 도무지 희망이라곤 없을 것 같은 곳이 바로 이스라엘이고 왕정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인 아사에게 신앙을 기대한다는 것은 애당초 어긋난 기대일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사는 왕이 되자. 할머니이면서 스스로 태후(왕의 어머니)로 높여 기득권을 놓지 않고, 혐오스런 아세라 상을 만들었던 할머니인 마아가를 폐위시킵니다.

 

이처럼 아사는 부정적인 가족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 신앙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했음을 말해줍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본문 11절에서 아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했다고 기록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이란 바로 “행동의 기준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지배하고 있는 모습”임을 말합니다.

아사가 부정적인 가정환경과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도 하나님을 두렵고 귀하게 여기자 하나님도 그를 귀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자신을 높이는 자를 높이시며,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낮추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행히 한 개인이 하나님 없이 성공할 수 있다고 한들, 하나님 없이는 그의 가문이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마치 구멍이 뚫린 항아리처럼 사람이 모든 것을 쌓았다고 안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가져가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일을 매우 자주 목격합니다. 석학인 이어령 교수님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 이유는 어떻습니까? 명예와 덕망으로 승승장구하던 그의 삶에 갑자기 불행이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딸의 암선고입니다. 누구도 고칠 수 없는 절망의 시기에. 딸도 아빠도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병고침의 기적이 교수님과 가정의 삶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교수님은 지금도 인간의 지식의 한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숭고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노령에도 젊은 사람 못지않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짓밟힌 자신의 영광을 되찾으러 오시기 전에 아사와 같이 마음을 잡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쉬고/

두 번째로 아사왕이 부정적인 가족과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 신앙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4절 말씀입니다.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더라.”

온전함은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함을 말합니다. 흠이 없음을 말합니다. 산당은 원래 각 지역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처소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상숭배의 장소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사왕은 왕가의 개혁을 통해 자연스레 개혁의 물줄기가 아래로 흐르도록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시간을 준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다시 산당에서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사왕은 ‘한 사람의 법칙’을 알고 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친할머니라 할지라도 폐위시키는 적극적인 개혁을 통해 결국 하나님 앞에 ‘책임지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사람과 달리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한 사람’의 원칙에 있음을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만연한 죄악을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감당하시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죄악이 한 사람을 통해 들어온 것처럼(롬5:12) 이제는 한 사람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게 되었음을 성경은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성난 유대군중들과 로마병사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사도신경은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던 쥐와 같이 ‘본디오 빌라도’라는 책임 있는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스리실 때 특히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의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후에 아사왕도 이 모든 일에 책임 있는 마아가의 폐위를 통해 신민 앞에 책임 있는 정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살해하지 않았으며, 다만 백성과 하나님 앞에 두려운 모범을 세워 산당을 개혁하고 국가 운영의 권위를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사가 누구입니까?

아사왕은 부모님과 할머니의 범죄를 목격하며, 끊임없이 상처를 받은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불우한 신앙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놀라운 추진력과 포용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아사왕과 같이 어릴 때부터 불행한 일에 노출된 아이는 상처와 좌절때문에 성장해서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실천하지 못하거나 중요한 일에 대해 결정 장애를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들은 성장하면서 융통성 있고 원만한 성격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옳지 못한 일을 보고도 이를 저항하지 못한 상처 때문에 스스로는 깊은 무력감과 결정한 일을 끝까지 추진할 힘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내면아이를 극복할 경우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실천하며,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사왕도 하나님 신앙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극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온전함 안에는 “내 안에 있는 내면 아이와 상처와 죄악을 극복하고, 하나님 안에서 포용력을 갖추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안에서 뜻이 바로 서면, 다른 모든 일을 끌어안기에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이죠.

 

아사는 하나님 신앙을 통해 내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포용력을 갖춘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아사왕은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구원 받은 증거인 정직함과 온전함으로 나라를 다스려 남 유다를 크게 안정시켰습니다.

 

나가며...

여러분은 앞서 말한 여인의 예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상담사는 그녀에게 “옳지 못한 일에 대한 극복”을 요구했습니다. 동시에 관계를 회복할 끈 역시 그녀에게 있음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살인자의 누명을 쓴 아들을 둔 어머니와 아들이 감옥에서 면회하는 장면을 영화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면회장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만 보일 뿐, 범죄자와 일반인의 구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짓지만 결국 상처를 줬던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부모는 부모이고, 할머니는 할머니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상처는 그 관계를 풀 열쇠 역시 나에게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저널리스트인 필립얀시는 ‘단단한 진리’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물론 인간은 부패했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결국 그가 판단하는 인간도, 세상을 끌어안아야 하는 이유도 모두 하나님 때문에 품어야 하고, 끌어안아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물론 그의 책은 하나님 안에서 진리에 대한 단단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준이 없는 무조건적 포용은 무책임과 다르지 않습니다. 반대로 날카로운 기준만 있고 포용적이지 못한 것은 무자비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싫어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을 지켜내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방법은 어쩌면 어렵지 않은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준을 세우십시오. 그 다음은 있는 힘껏 여러분의 이웃을 끌어 안으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이 반드시 아사 왕과 같이 회복되고, 복을 받을 것입니다. 아사왕이 보여준 모범이 우리 신앙의 귀한 기준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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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사는 생활이냐 영생이냐(요12:24~26)

 

 

에디슨(T. A. Edison)은"필요는발명의어머니(Necessity is the mother of invention)."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뭔가 생활 가운데에서 필요한 것이 생기면 이것을 위해 연구하고, 결과물을 얻어낸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두우면 등을 발명해 어둠을 비추고, 내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녹음기를 발명하거나, 먼 거리를 달리기 위해 자동차를 개발하는 것이 바로 이런 필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이 필요들에 의해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터넷, 인간관계, 멋진 자동차, 금융 등 그 모든 것이 바로 이 ‘필요’ 때문에 생겼기 때문이죠.

그러나 현대사회가 인간이 욕구에 따라 살아가도록 잘 돕는 사회일지는 몰라도, 진정한 인간의 요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화>

서울에 고시원에 사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고시를 준비하는 청년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월 25만원짜리 쪽방에 세들어 사는 취업 준비생입니다. 이 학생은 어렷을 때 꿈이 화가였지만, 부모님이 사업에 실패하고, 지금은 홀로 서울에서 생활을 해가는 청년이 된 것이죠. 이 학생은 시급 5500원짜리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4시간을 근무하고 나면, 22000원을 얻을 수 있게 되는데, 한 달에 방세와 공과금을 이 아르바이트를 통해 충당하는 것이죠. 그리고 나머지 식대와 생활비를 위해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직장을 갖지는 못한다고 해요. 취업을 준비한다고는 하지만 꿈을 지키고, 꿈을 키울 수 있는 시간도 물질도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죠. 그야말로 지금의 필요를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활이 지속될 뿐입니다.

 

이번에는 어떤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주부가 아이를 낳고, 1년이 지나자 그 동안 남편과 모은 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해요. 맞벌이인 이 부부에게 고민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계산을 해보니까... 지금 버는 남편의 월급에서 딱 80만원만 더 벌으면 생활이 될 것 같아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고 해요. 그런데 교통비며 부대비용으로 50만원 이상이 들어가고, 아이 의탁과 돌보미 등으로 30만원 정도가 들어가니까.. 2살 된 아이를 돌보지 못한 대가로 벌고 남은 돈 80만원은.. 아이에 대한 미안함에 비하면..너무나 적은 돈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생활을 위해서만 살아가도록 시스템화된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소비적으로 착취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이 세상은 인간에게 적절한 일거리를 주고,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도록 해야 시장경제가 운영이 되니까.. 인간의 꿈이나 진정한 욕구보다 그야말로 시스템을 위해서 사람이 이용되는 구조가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 인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노동도 병들어버렸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을 포기해버렸다는 사실에서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이죠.

그야말로 필요에 따라 소비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자신의 순수한 동기를 위해서, 꿈을 지키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소비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이죠.

 

그러나 토마스는 말합니다. "나는 부당하게 나를 사랑하다가 나를 잃어버렸습니다.(요12:25) 그리고 오직 주님만을 찾을 때에 나 자신과 당신을 모두 찾았고, 그 사랑에 힘입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p174)"

영어로 Need는 욕구, 필요를 의미합니다. 그야말로 나의 필요, 내가 사랑하는 것을 위해 이 세상이 죄를 짓고, 우리 모두를 병들게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토마스 역시 이 모든 것이 실은 ‘나를 부당하게 나를 사랑하다가 천하보다 귀한 나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 말씀드리자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이 그대로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욕구나 필요 즉 ‘Need'를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은 필요’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영어로 Want는 내면으로부터의 진정한 필요. 또는 미래에 대한 요구를 말할 때 사용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환경에 따라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을 사모하도록 설계된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외부의 환경과 필요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니드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원트 즉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살도록 설계되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현대인들이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해 소비하는 것은 돈도 인간성도 아닌 어쩌면 더욱 중요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잃어버렸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원이란 무엇일까요?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과 부활로써 이루신 속죄를 믿음으로써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 3:36, 요 5:24, 롬 5:10, 엡 2:1-8).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진정한 생명이 되시는 것이죠(요 6:33, 요 14:6))

영생은 지금 내가 누리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지금 내가 기뻐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안타깝게도 그 삶은 영생을 누리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없는 것이죠. 이 영원한 생명력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인도해낸 하나님의 능력이고, 기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진 사람의 여유이고, 세상이 뭐라고 하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제 멋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한 농촌 마을에 두 가정이 이사를 왔습니다. 한 가정은 기획귀농을 했어요. 오자마자 땅을 사고 전원형 집을 딱 짓고, 자기 땅에 함부로 난 논두렁으로 가는 물길을 흙으로 딱 채워 막는 센스를 보여줬죠. 오자마다 밭을 사고, 그동안 도시에서 번 돈을 전부 쏟아부었죠.. 그리고 농촌에서도 최상의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애썼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도시생활을 농촌으로 옮겨온 것뿐이지.. 곧.. 파산하시고 서울로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가정은 거의 빈손으로 귀농을 했어요. 오자마자 흙집을 수리하고, 마당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그리고 작은 십자가종을 풍경대신 처마에 달아놓았어요.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묻자.. 농촌에 살려고 왔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저것 불편한 것이 많았지만, 품일을 나가며, 나중에는 마을에 학원이 없는 것을 알고, 자청해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은 일 때에는 일하고, 다른 때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몇 년이 지나 물었습니다. 지금 기쁘세요? 네, 기쁩니다.

 

이분은 도시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느 날 지금의 직업과 도시생활이 결코 신앙생활을 온전히 해낼 수 있도록 돕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물론 어느 곳이나 사람이 사는 곳은 다 같겠지만, 그분은 째는 예수님처럼 생명을 대하는 감수성을 갖고자 째는 도시가 잃어버린 노동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째는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라야 영생하도록 보전하신다는 말씀에 따라.. 경쟁과 소비와 무가치가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그야말로 좀 더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 농촌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저는 저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생을 좇는 삶을 쉽게 포기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유는 영생에 대해 잘 모르거나 지금 삶을 포기해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영생을 좇는 것이 당장 내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포기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을 누리셨고, 도전하셨습니다. 꿈꾸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인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처럼 도전하고 꿈꿔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꿈을 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땅 위에 썩어질 것을 심는 것을 말하지 않고, 하늘 위 영원한 것을 사모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삶을 말합니다. 이것은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생활과 다릅니다. 이 영생은 뜻을 좇아 살아가는 삶입니다.

저는 소망합니다. 단 한순간을 살아도 산 것 같이 산다면 나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저는 스스로를 천박함에 쳐 넣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제 삶이 구차해질 때 그렇습니다. 기쁨이 없을 때 그렇습니다. 실은 제가 생명을 만들어 내지 못할 때 그렇습니다.

 

천박함은 구차한 삶에서 나옵니다. 생명에서 멀어진 공동체나 사람일수록 ‘천박해집니다.’ 그러나 생명적 삶은 구차하지 않고, 떳떳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떳떳하셔야 합니다. 세상은 여러분의 정당한 노동조차 돈 앞에서 구차하도록 만들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이 흘리는 땀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산제사임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우상으로 여겨지는 맘몬 즉 돈과 권력에 굽신거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굽신거리지 않았고, 다만 생명이 무엇인지 드러내심으로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그야말로 욕구에 따라 자신을 낭비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을 따라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길 원했던 것입니다.

 

본문 25,26절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 사랑함으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나님을 따르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귀히 여기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은 우리의 모든 궁극적인 목표와 원함이 하나님께 있을 때 가능합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지금 이대로도 괜찮을까?” 나는 정말로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고, 영생의 사람을 위한 도전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생명은 건강이나 행복을 포함한 본래 하나님이 내게 설계한 뜻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꿈을 갖고 달려가는 것이란 꼭 판사나 대통령이나 부자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고, 실은 여러분에게 꼭 맞는 옷을 입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 이 땅이 줄 수 없는 평안과 행복, 참 기쁨(joyful) 그 영생을 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어른 세대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이분들의 신앙, 그리고 이 어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안에서의 꿈을 다시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또 어른들께서는 지난 시간 이 땅이 줄 수 없는 영생의 기쁨을 잃어 버리셨다면, 어서 이 기쁨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영생을 다시 소망하는 거룩한 꿈을 꾸시는 그런 귀한 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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