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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의 길(창3:22~24)

 

 

들어가는 말

 

토마스는 주님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먼저 너의 욕망이 온전히 나의 선한 뜻을 따르도록 하여라. 내가 너의 대의 명분이라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자족하는 마음을 얻겠지만, 조금이라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있다면 이는 너에게 걸림돌이 되고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미리 품은 욕망에 너무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여라.”(p182)

 

1.욕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는 인정의 욕망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직장에서 교회에서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도 이 욕망에 해당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욕망에 따라 자기 성취를 이루게 됩니다. 좋은 집과 차, 직장 등 부정할 수 없는 생존과 성취의 욕망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욕망이 잘 못 변질되면, 지배의 욕망으로 발전한다고 합니다. 지배의 욕망은 불안에서 출발하고, 모든 것을 손에 쥐어야 속이 편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도 없으며, 반드시 지배해야만 자신이 인정을 받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 경우는 매우 위험한 상태로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드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대등의 욕망입니다. 상대방을 자신과 대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할 필요도 없고, 있는 그대로 상대를 인정하면 그만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대등의 욕망에 이르지 못하고, 지배와 인정의 욕망에 머물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다 불안감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이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 모여서 세력을 이루는 것. 믿을 만한 사람을 만드는 것. 이 모든 행위가 실은 인간의 생존 욕망 중 가장 기본적인 인정의 욕망에 따라 이뤄진 행동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런 행동을 통해 실제의 자신과 불안 때문에 또는 사회적 요구때문에 만들어낸 자신을 헷갈리는 경우입니다.

 

 

2. 어떤 목사님은 아내에게도 자녀에게도 늘 목사로 산다고 합니다. 물론 그 사모님은 정신과 치료를 받고 계신다고 합니다. 아내는 목사님과 사는 것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뒤로 숨어버린 목사라는 성직도 부담이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결혼했을 때 목사님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요구와 성경을 보다 율법적으로 또는 종교적 열심으로 따르다 보니 어느 순간 자나 깨나 목사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흔히 하는 말로.. 날 때부터 목사는 없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는 만들어지는 것이란 뜻이겠죠. 그런데 녹녹치 않은 현장에 적응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목사로써 사는게 익숙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실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처음 목사님을 만날 때, 그 있는 그대로의 자아는 분명 지금의 목사와는 다를 것입니다.

순수함과 경직되지 않은 자유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왠지 사모님이 힘든 것은 직업 목사로 사는 남편. 아무런 행복도 느끼지 못하지만, 목사로 낮과 밤을 사는 남편이 불쌍하고 소통이 되지 않아 불행하게 되었다는 현실이었습니다.

 

 

3. 오전에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사람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자기 소리를 귀로 듣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을 하는 자신도 ‘나’라고 하지만, 외부에 들리는 소리에 반응하는 나도 ‘또 다른 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원래 나’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 때문에 곧잘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 설명해준다.

 

죄는 사람이 뱀의 소리를 듣고 ‘스스로 판단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 먹고는 동산에서 쫓겨난 상태를 말합니다. 무엇이 따먹게 만들었을까? 자기 결핍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향한 인간의 욕구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2장 16~1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최초로 사람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어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창세기3:5절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아 아심이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간교한 뱀(즉, 사탄이 공중 권세 잡은 세상)의 말을 듣고 맙니다.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생령이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귀한 존재였지만, 간교한 뱀의 속임수에 넘어갑니다. 어떤 속임수입니까? ‘바로 자신에게 없는 결핍을 자극하는 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를 먹도록 하시고, 다만 한 가지 선악과만을 먹지 말라 하셨지만, 뱀은 반대로 바로 그 선악과를 먹어야 산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자기 부정이 아닌 자기 인정을 따르다 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야말로 창3:16~17와 같이 에덴동산에서의 영생의 삶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한 명, 한 명을 바라보시는 분이시지, 저와 여러분을 비교하여 바라보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 상대적으로 죄가 더 많은 다른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 때문에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 에덴동산의 영생의 삶이 인생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세상은 간교하게 틈을 타 어떻게든지 우리를 거짓된 모습으로 만족하여 살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출산하고, 수고하고, 땀 흘리고, 노동하는 데만 가치를 두는 존재가 아닌 것 입니다. 꿈꾸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뜻을 따라 세상을 다스리고,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일 것입니다.

 

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체 영생할까 두려워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막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알게 하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께 만족하는 단순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첫째는. 가죽옷을 지어입히심입니다. 에덴 동산의 최초의 희생입니다. 입는 순간 제사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둘째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먹으면 정녕 죽는데, 영원히 죽는 상태를 막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실패했다고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

이제 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생명나무가 다시 발견되었다는 것은 에덴동산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천국이 회복되고 에덴동산이 회복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에 에덴동산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고 생명나무 과실을 먹게 될 것이며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놀랑룬 영적 경험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새 땅이 회복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 입니다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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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 다른 나(시37편 7~31절)828쪽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방송이나 서점에서도 이와 비슷한 질문과 답들로 구성된 책들이 꽤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1885년 러시아의 문호인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책 덕분입니다. 인간성이 무너지고, 신앙이 공격을 받는 극도의 혼란 시기에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아니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을 던졌던 톨스토이의 신앙이 잘 드러난 책이기도 하죠.

 

책의 내용은 그렇습니다. 어느 날 하늘의 천사장인 미카엘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지상에 한 아이의 영혼을 데리러 내려옵니다. 그런데 아이의 죽음을 만류하는 아이 엄마의 애원을 못 이겨 그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죠. 그러자 하나님은 미카엘에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찾을 때까지 지상에 있으란 명령을 받습니다.

세 가지 질문은 그렇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두 번째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세 번째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였습니다.

마카엘은 인간 속에서 살며 이 질문에 대한 답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카엘은 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자신을 돕는 인간에게서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곧 죽을 지도 모르고, 1년 동안 신어도 튼튼한 신발을 원했던 귀족에게서는 “인간은 자신에게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란 질문에 대해서는 고아들을 돌보는 여인을 통해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을 소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화1}

어려서부터 교회에 출석한 한 청년이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잘 성장했고, 성경이 말하는 아름다운 가치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몇 안되는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취업을 하고 나서 큰 난관에 부딪쳤다고 합니다. 왜냐면 자신이 알고 있는 또 옳다고 여기는 ‘내 자신’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또 달라야 할 자신’은 엄청난 차이를 갖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 괴리감 속에서 청년은 복음 안에서 참 자유를 포기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되버렸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이러한 긴장감에서 낙오한 신앙인들이 많은 것입니다. 스스로 신앙인답지 않은 구석도 많으면서 교회에 계속 나오는 것이 옳은지..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기도 하고, 한편 세상에서 인정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자연히 교회를 멀리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간은 자신이 아무런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될까봐 두려워하므로 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자신의 위치를 얻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결국 이 청년도 하나님에게서 아닌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 성취를 위해 일반적인 삶을 선택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문제는 이런 선택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어느 순간 이런 삶들이 진짜라고 믿기 시작한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전환-이음/

사람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자기 소리를 귀로 듣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자신도 ‘나’라고 하지만, 자신에게 말하는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에 반응하여 만들어가는 나도 ‘또 다른 나’라고 말합니다.

처음의 나는 본래의 나를 말하고, 두 번째의 나는 만들어진 나를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점차 본래의 나와 두 번째의 나를 일치시키기 시작합니다. 분명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정말 나인것처럼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정말 소중한 자신을 잃도록 만들게 되죠.

그러나 신앙을 갖는 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나를 훈련하고 발견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다윗은 오늘 시편에서 악인의 형통과 잘됨을 목도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본문 7절에서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라는 말씀으로 이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악한 꾀’로 자신을 도모하는 사람에 대해 다윗은 조급해집니다. 그러나 곧 다윗의 마음은 다스려집니다.

조급함”은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인정욕구”, 즉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자신의 원수들이 재빨리 유익을 취하고, 자신을 조여오는 것을 목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은 미련해 보이고, 인간의 손빠른 행동은 너무나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시험 기간에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아이의 불안감이 그렇고,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 신자의 의무를 다하는 부모들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회사나 교회에서 “어쩌면 저렇게 영악하게 살아갈까.. 혀를 내두르지만, 한편 자신은 뒤처지는 것은 아닌가? 라며 불안해 하는 인간의 모습”이 이것을 닮아 있는 것이죠. 결국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은 불안감에서 옵니다.

불안감은 자신도 통제할 수 없으므로 곧잘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습성을 낳기도 합니다. 그렇게 점차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지배욕으로 자신과 주변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 사는 삶을 살기위해 애썼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깊은 곳까지 알고 있었고, 다윗은 무엇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대한 골리앗을 무모함이 아닌 물맷돌로 상대해 이겼습니다. 그는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이루리라는 믿음 안에서 서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불안과 조급함이 엄습할 때, 또 자신 안의 한계와 죄성 때문에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할 때, 겸허히 그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내려놓는데 성공한 예배자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항상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서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이 없음을 빨리 깨달았습니다.

빨리 깨달으니 하늘을 봅니다. 그야말로 다윗은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예화2}

직장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 때문에 괴로워하는 성도님이 있었습니다. 그 상사는 늘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랫사람의 실적을 가로채거나 걸핏하면 야근을 시키는 어쩌면 흔한 상사들 중 하나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상처를 받은 성도님은 도저히 그 상사를 용서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비관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지난 시간 하나님 안에서 변화되어온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상대를 미워한들 실상 상대는 변화되지 않을 사실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이 변화시키실 것이란 소망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 같은 사람도 변화시킨 하나님께서 자신 앞에 닥친 상황들을 선하게 인도해주실 것이란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넓은 마음, 그 큰 그림을 받아들인 성도분은 다시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 깊은 사랑과 인정을 경험한 이 남자는 직장으로 돌아가 오히려 그 상사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자 놀랍게도 상사의 결핍이 채워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자 그 상사는 다른 부서로 옮겨가게 되었고, 심지어 이 성도분을 추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성도 분은 그 상사의 부서로 옮겨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하는지 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응답받지 못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해답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가 가진 답을 가지고, 그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그러나 이미 두 손에 오답을 들고 놓지 않는 사람에게 정답을 쥐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은 내게 꼭 필요한 응답을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정받는 삶’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인정 너머의 삶’을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다윗은 악한 꾀로 승승장구하던 원수를 보며 하나님 안에서 확신을 얻습니다.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걸음을 정했다는 것은 세상과 다른 사람이 원하는 또 다른 나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직하게 자신과 마주하여 얻어낸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의 걸음인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긍정하며, 두려움과 불안감 대신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거칠어도 황소걸음으로 뚜벅 뚜벅 제 길을 걷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의 유행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여호와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쉬고/

많은 사람들은 그러나 ‘인정받고 높아지려는 결핍’을 채우려다 ‘자기불행’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뻔히 불행해질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인정받아 높아지려는 마음은 정욕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높이려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씁니다.

자기 결핍에서 나오는 이와 같은 행동은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자기 결핍을 다른 사람 때문이라 핑계 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 내가 행복해질텐데.. 저 사람 때문에 일이 되지 않아.. 그러나 실상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알아갈 이유가 됩니다.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나의 영적 게으름이 온전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세상을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가진 자로 더 가지게 하는 곳입니다. 이 세상의 이자놀이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인정받고 높아지려는 결핍’을 극복한 사람이 하늘 소망으로 자신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니 더 큰 소망으로 자신을 채웁니다. 채워보니 자유해집니다. 채워보니 넉넉해집니다. 적게 가지고도 넘치게 가진 사람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본문 16절 말씀입니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쉬고/

 

나가며..

광야에 한 남자가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질문입니다. 모세는 이 질문을 통해서 자신의 소명과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유대인, 이집트의 왕자, 살인자, 목동과 같이 그때 그때 닥치는대로 살아가던 모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운명과 목적을 깨닫게 된 각성자였던 것입니다. 초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던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가 빛에 놀라 말에서 떨어져 물었던 질문은 “주는 누구십니까?” 였습니다. 바울은 이 질문을 통해 자신의 소명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혈통 있는 베냐민 지파요. 억만금을 줘야 살 수 있는 로마의 시민이요. 가말리엘 문하의 엘리트요. 율법에 능통한 바리새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갈2:20에서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바울은 자신을 설명하는 신분과 능력, 외모와 출중함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게 된 자신을 참다운 자신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거짓 자아를 깨트리고, 영원하고 온전한 자아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본래 자신의 모습대로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세상이 필요한대로 여러분을 이용만 할 뿐.. 여러분 안에 가치를 밝혀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는 동안 삶의 도움을 하나님께 바라며, 동시에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거나 친구간의 우정을 넘는 자신의 목숨을 드려 우리를 구원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장 나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난 후 은혜를 주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은혜를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한계를 이해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한 번 성령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로 결단한 저와 여러분은 더 이상 “인정받아 높아지려는 결핍”으로 삶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한 귀족은 1년도 살지 못하면서 1년 동안 신을 새 구두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없는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고” 미카엘 천사는 하나님께 아뢰었다고 합니다.

정말로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 시간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31절 말씀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을 품고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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