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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서는 자유(욘1:11~15/요8:31~36)

 

들어가는 말

2차 세계대전 중 잠수함 한 척이 바닷 속에 침몰했습니다. 미군함이 이들을 찾을 때 이 잠수함 속에 있던 군인들은 단단한 쇠붙이로 벽을 두드리며 모스 부호를 만들어 밖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내용은 “더 이상 이곳에 희망이 있을까?”였습니다. 아무도 구해줄 수 없을 것 같던 바로 그 순간에 병사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이 있을까?” 라고 마지막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죠.

이번 달에는 안타까운 사건이 유독 많습니다. 세월호 현장 지원을 나섰던 소방헬기 한 대가 추락하여, 5명의 탑승자 모두가 사망하기도 했고 말레아시아 항공기 한 대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격추당해 295명 전원이 실종되었으며, 지금도 이스라엘의 폭탄 세례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타격함으로 벌써 800명이 넘는 민간인이 숨지고 죽어가고 있다는 외신뉴스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는 적지 않은 다툼과 불행의 저편에 서 있는 그들 나름의 진리와 불편하게 서 있고는 합니다. 특히 각자의 신념이 모두의 행복을 앞질러 가는 세상에 살면서 옳고 그름을 하나님 앞에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1. 진리정치

지난 19대 총선 당시 어느 정당에서는 불법으로 비례대표 경선이 벌어져 문제가 커진 적이 있습니다. 당시 국민들은 진보 정당이 설마 그러하겠느냐 라며 그 실망감이 더욱 컸었는데요. 이들은 특히 자신들이 믿는 신념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국내의 다른 정당들과 아무런 차이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선거 참패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매체들은 이들 정치를 진리 정치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진리정치란 자기들이 믿는 것만 진리이며, 이외에 다른 것과는 철저히 투쟁하며 자신들의 이념을 성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옳고 그름은 목숨보다 중요한 일이며, 자신들의 생존의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했던 또.. 실은 이분들이 이야기하는 적지 않은 이야기들 속에서 저는 자주 다음과 같은 표현을 듣습니다. “우월한 생각”.. 예를 들어, 환경, 반핵, 인권 등의 가치들을 이야기할 때 이분들에게서는 분명 우월의식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월의식이 다른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자칫 “자기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무시하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도록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국민들은 진보의 필요성은 알기에 이들에게 표를 주지만, 결코 지금까지의 진보운동이나 행보들이 다 맘에 들어서는 아니라는 것쯤은 이들 정당들도 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편 누구나 완전한 승리만을 꿈꾸는 세상에 살면서도 적어도 / “십자가에서 완전한 패배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말에는 공감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외에는 어느 누구도 가장 확실한 진리의 담지자가 될 수는 없다. ”

즉 예수님 외에는 누구도 진리라고 말 할 수 없다입니다.

왜냐면 세상은 누구나 완전한 승리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면 대부분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님과 같이 패배의 쪽에 서려는 사람들은 적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기기 위해 간교해지고, 이기기 위해 자신을 진리 쪽으로 포장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 저를 포함해 우리들 역시 진리로 자신을 포장을 할 수 있을 뿐이지..누구도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2. 바보의 계산학

어느 교회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수련회에 참석시키려고 아이디어를 냈다고 합니다. 그건 아이들에게 문제를 내고 풀어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정답은 맨 뒷장에 적혀 있었죠.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이 땅에 내려오셨는가?”입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답을 뭐라고 썼냐면.. ‘세계 정복을 위해서다.’. ‘모두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다.’ 등 별의 별 이야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 모두 정답을 보고는 깊은 감동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 “네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사람이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달려가게 만드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옳고 그름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바보 같은 정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옳고 그름은 어쩌면.. 여러분을 끊임없이 분열시키는 아편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가 되게 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사랑과 믿음이 없으면, 다른 것으로 채워갑니다. 그것에는 사랑과 믿음 대신에 “정치”가 들어가고. 사랑과 믿음 대신에 “불안”이 들어가고. 사랑과 믿음 대신에 “오만”이 자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정치와 불안과 오만들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고, 똑같은 사람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죠.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점차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점차 내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에 놀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서 멀어지면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우리에게서 사랑을 없애려 우리의 영혼을 도둑질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또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관계와 신뢰입니다. 그래도 의심이 든다면 ‘무언가 옳고 그름이라는 자기 틀이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을 행복하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행복하십니까?/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만 옳고 그름을 말 할 수 있는 분이라고 고백한 것이 아닐까요? >

 

부끄럽게도 제가 이 시간 여러분에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제 안에 사랑이 충만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에 대한 확신이 약해져가기 때문에 드리는 호소입니다. 갈수록 세상의 것들과 방법이 손쉽게 제 영혼을 차지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수도 없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제 영혼을 갉아먹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각 자의 입장이 모두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오늘을 살며 저는 다시 사랑을 목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랑을 떠나면 엉뚱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떠나면 분열하고, 가슴 아픈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매번 똑같은 이유로 걸려 넘어지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3. 요나의 던져짐과 하나님의 넘어섬

오늘 본문에서 요나는 자신의 판단으로 니느웨로 가기를 멈추고 자신을 바다에 던질 것을 다른 선원들에게 말했습니다. 망망대해에 던져지는 일은 분명 두려운 일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하고, 어쩌면 같은 동족들에게 지탄받을 일들이 두려워, 그는 배에서 자신을 던져지길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끊임없는 판단이 그를 둘러쌌고 자신을 괴롭혔습니다. 니느웨는 우리 동족을 괴롭힌 나라의 성읍이야! 나의 원수라고! 그리고 설령 그가 믿음으로 이들에게 말씀을 선포한다고 한들 나의 동족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더구나 멸망이 코앞인데 이들을 살리는 회개의 선포를 하라니. 모두들 나를 제정신으로 여기지 않을 거야...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가 끝까지 니느웨에서 일을 마치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기어코 요나서의 마지막은 박넝쿨에게서 ‘생명과 사랑’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모든 어려움이 자신 때문인 것처럼 여겨지면서, 누구도 나의 처지를 알아주지 못할거란 두려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만 배에서 내리면 모든 일이 잘 될거라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준 숙제를 풀기까지 이 문제의 자리에서 도망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숙제를 풀기 까지 절대로 놔주시지도 않습니다.

일례로 우리는 같은 실수와 불행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을 경험합니다. 항상 같은 이유 때문에 실패하고, 같은 데를 다치거나 마지막 과정에서 그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들이 그렇습니다. 희망도 없고 대안도 없이 망망대해를 떠다니듯 지내는 시간이 그렇습니다.

개인 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도 그렇습니다. 옳고 그름의 목적이 생명이 아니므로 오늘도 이 나라는 저 나라로 폭탄을 떨어트렸고, 여자라서 혀가 잘렸으며,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아이들의 생명은 다음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람과 세상은 매 번 이 반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닷 속에 던져진 요나처럼 사람과 세상은 도무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 하기보다, 자신의 진리만을 믿고 따를 뿐입니다. (군산 교회 이야기)

예수님은 그런 세상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화가 난 군중들의 얼굴을 보았을 것입니다. 어제까지 자신을 따르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고, 도리어 아버지 하나님께 저와 여러분을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생명에 있었습니다. 영생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 도저히 넘지 못하던 현실의 장벽을 믿음으로 넘어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전에 요나에게 하나님은 민족주의와 유대인만 구원을 얻는다란 장벽을 넘도록 요구하셔던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 모든 민족이 잘못된 믿음과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회복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랑 없는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가 사랑을 시험하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사랑할 수 없을 때 사랑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부르셨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우리를 찾으시고, 사랑으로 세상을 넘어 서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예수님은 자신을 시험해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거할 하늘 처소가 적은지.. 하늘로부터의 복을 받을지 안 받을지.. 구원이 네게 임할지 안 임할지!

 

예수님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넘으셨고,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께서도 목적하셨던 그 길입니다. 사랑입니다. 생명입니다. 감사입니다. 기쁨입니다. 행복입니다. 넉넉함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사랑이 먼저 하늘로부터의 체험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한 번도 사랑다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위로부터 눌러 부어 주시는 사랑에 한 번도 노출이 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우려입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집니다. 매일의 삶의 목적이 달라져야 한다는 도전이 제 마음을 두드립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레디컬한 급진적인 가르침이 여전히 ‘사랑’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 라고 확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말하시며 이 말씀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완전히 내 체질과 기질이 녹을 때까지 하늘을 사모해야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밀려옵니다.

현명한 사람은 파산한 기업에 투자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성도 더 이상 파산한 세상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도 사람의 세 종류에 대해 말합니다.

첫 번째는 욕망의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두 번째는 권력의 사람입니다. 돈이나 기본적인 욕망을 성취한 인간은 바로 권력에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자신에 대한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이데거 자신도 자신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이 파산했음을 대신에 하늘나라의 임하심을 확신하셨습니다. 요나가 아무리 몸부림치며 소명을 거부하려고 했어도 결국 하나님이 생명과 사랑의 회복의 자리에 앉혔듯이, 저와 여러분도 다시 이 십자가의 사랑 앞에 앉아야만 할 것입니다.

 

나가며..

마무리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넘지 못하는 이 세상의 죄악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넘어 이기신 것도 믿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진리로 우리를 구속합니다. 때로는 이편에서 또 저편에서. 마치 공산당과 반공청년단 사이에 줄서기를 강요하듯 세상은 저와 여러분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이 바보 같은 행동은 분명 사랑이었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내린 들판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한 발 한 발 정성을 다해 사랑으로 걸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힘들지만, 분명한 걸음으로 꾸욱 꾸욱 눌려 걸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주님을 따라 갑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앞선 발걸음을 어지럽게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왜냐면 여러분의 자녀와 믿음의 후배들이 그대로 따라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오랜 시간 동안 믿음 생활을 했다는 것이 하나님께 더 많은 죄를 지어 왔음을 의미하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능히 먼저 된 자도 나중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랑으로 마음을 덥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 가슴을 충분히 씻어내야 합니다. 질투와 시기와 간교함에서 우리를 건져내야만 할 것입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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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2: 25-33 배신의 일생을 산 여로보암

 

들어가는 말

한 모태신앙을 가진 집사님이 결혼을 하고 다시 신앙생활에 불이 붙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금요기도회에 나섰다가 신유의 체험을 하고는 하나님 작은 미용실이라도 좋으니 만일 미용실이 생기면 복음미용실이라고 짓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친지 한 분이 찾아와 선뜻 돈을 내놔 미용실을 차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이 집사님은 20년 동안 7번이나 미용실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갈 때마다 옆에는 어김없이 다른 미용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일도 문을 닫지 않고, 영업을 시작해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큰 교통사고가 나서 합의금으로 그동안 모은 돈을 내놓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예수님을 배반한 체 손님을 쫓아가던 삶을 정리하고, 다시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미 파산한 세상 가운데에서 주님은 우리가 다시 세워지는 건강한 삶을 요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너무 늦으면 주님이 미처 손을 대고자 하여도 닿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이야기 주인공인 여로보암에 관한 경우입니다.

 

1. 여로보암은

부: 느밧, 모: 스루아, 에브라임 지파. 자: 아비야, 나답.(11: 26, 14: 1, 20)

여로보암의 아버지는 솔로몬 왕의 신복이었습니다. 믿을 만한 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높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선지자 아히야가 여로보암을 찾아와 나라의 12/10을 나눠주고 마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의 삶은 끝내 우상숭배와 배반으로 끝마쳐 짐을 미리 알 필요가 있겠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열심히 하나님의 손을 거부하는 잘못된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그런 것이죠. 우리는 그래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일인지 분명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한 번의 선택이 영영 다시금 자신의 영혼을 세우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이 함정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있었지만, 그가 조급함으로 그르친 과정들은 결국 그가 하나님을 멀리 하고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그 배반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합니다.

 

2. 중요사건

첫 번째 배신 1: 솔로몬 배신(11: 26, 40) - 망명

아버지가 솔로몬의 신복(부하)이었고 솔로몬이 그를 높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아히야의 말을 듣고 그것을 못 참아서 왕을 배신하고 반역을 일으키고 애굽으로 망명.

여기서 그가 애굽 땅으로 도망친 행동이 재밌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이 빠져 나온 땅입니다. 물론 솔로몬의 때에도 애굽은 실력 있는 나라였음에 분명하죠. 그러나 성경에서 애굽은 다음의 상징적인 의미들이 있습니다.

첫째. 실패의 상징입니다. 모세에게 애굽은 자신의 살인죄를 기억하는 나라입니다.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예전의 영화가 있던 곳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실패하여, 낙망을 선물해준 곳이기도 합니다.

둘째. 심판의 상징입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이라는 사건이 집행된 곳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복음서에서 마리아와 요셉도 이 애굽 땅에서 지낸 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 출애굽 사건이 바로 애굽에서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애굽은 죄에 대한 심판의 장소이자, 이곳을 떠나는 자에게는 구원의 장소로 이해될 수 있는 곳이죠.

그런데 여로보암에게 애굽은 그야말로 자신의 몸을 숨기기 위한 장소일 뿐입니다. 애굽은 여로보암을 받아줬지만, 그는 이곳에서 마치 다윗왕이 사울을 대할 때 처럼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대할 때 처럼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리게 됩니다. 바로 배반의 때이죠.

 

배신 2: 다윗 왕조 배신(12: 1-2, 20) - 나라 세움

그러던 중 여로보암은 솔로몬이 죽자 자신의 추종자들의 요청으로 이스라엘의 세겜 땅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부역이 지나치니 줄여달라’ 청했다가 이 요구가 거절당하자, 나라에 등을 돌리고 다른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아히야 선지자의 예언이 어쩌면 여로보암의 행보를 조급하도록 했는지도 모릅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왕이 되는 일이 여로보암으로 하여금 쉽지 않던 운명을 감당하도록 한 면도 있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여로보암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기어이 ‘일을 치르고자 했던 여로보암의 반역’입니다. 사람은 힘을 가졌을 때 진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여로보암의 이스라엘의 불행을 이용해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체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의 결정적인 여로보암의 배반이었던 것이죠.

 

배신 3: 하나님 배신(11: 38-12: 27-33, 14: 7-9) - 파멸

그러나 하나님의 순리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내와 믿음으로 일이 세워지지 않는 이상 인간은 늘 불안하고, 그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몸부림 치기 마련인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스스로 자멸해 갑니다. 그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왕권이 흔들리는 것을 매우 겁내합니다.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해내고야 말죠.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왕권에 대한 집착. 12: 27: 대비: 삼상 13: 8-11)입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두 금송아지 만들고 신이라 칭하고(12: 28, 대비 출 32: 4) 제단 만듭니다.

벧엘(남)과 단(북) 두 곳에 산당을 짓게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의 성전 신앙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고 극복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산당(풍요의 신 숭배)에서 제사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일반으로 하여금 제사장으로 삼아 억지로 절기를 지키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무너진 신뢰입니다. 그야말로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서지 못한 솔로몬의 죄로부터의 원인이지만, 이때 당시 솔로몬이 그랬던 것처럼 왕권 강화로 이방 신까지 이용되었던 것과 달리 이젠 여로보암은 선을 넘어 야웨 하나님 자체를 거짓으로 모시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상황도 이를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은 이젠 죄와 비극의 장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예루살렘의 성전은 그 대단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큰 의미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에게 죄로 더렵혀진 장소가 되었음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은 ‘죄의 빌미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인지라.. 죄의 빌미들이 늘 또 다른 배반의 씨앗을 품게 만드는 것이겠죠.

그럼에도 책임을 물을 때 여로보암은 자유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의 기질 역시 이와 같은 배반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변의 상황들이 배반을 엮어가도록 할 때 이를 알면서도 오히려 이를 이용한 면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여로보암의 속 내는 옳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자손들의 씨가 마르게 된 것이죠.

 

아들 아비야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을 섬긴 것을 제외한다면, 여로보암은 죽은 뒤 그의 후손들이 멸절됩니다. 그의 아들 나답은 통치 2년 만에 ‘바아사의 반역’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심지어 이로써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로보암 가문의 씨가 성경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를 따랐던 10지파 역시 지구상에서 완전히 종적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두려워야 할 것입니다.

 

나가며.

여로보암은 분명 아히야 선지자로부터 미래의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 역사의 한 왕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울과 다윗, 솔로몬의 때를 이어 어쩌면 이 모든 죄악의 연속성이 계속해서 여로보암에게도 흐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구약성서는 지독한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읽는 우리들은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뜻을 두고 살면 결국이 다 같더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나라가 우리 삶 가운데 한 층 더 다가오고, 우리의 정신이 더욱 더 정결해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그 독특한 조급함 즉 추진력 때문에 또 자신의 힘을 지키기 위한 발빠른 대응력 덕분에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살아 남았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잔이 다 했을 때 위로부터 부어지는 불행의 잔은 결국 자신의 가문과 10개 지파 자체를 멸망하도록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의 이끄심과 명령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초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살펴볼 때 과연 있는 것을 뒤 엎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차라리 이미 세워진 것을 지켜내는 것이 차라리 나을 때도 있다는 것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어떤 왕도 하나님의 뜻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백성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뜻대로 살 수 있는 더 많은 시간과 기회를 주고 계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이 세운 모든 것의 흥망성쇠가 인간의 죄에 있음을 살펴본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깊을수록 반면 여호와의 법도와 나라는 영원할 것이란 확신이 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는 영원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높고 두렵게 여길 줄 아는 자가 결국엔 모든 성읍과 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단순하지만 놀라운 이 사실은 결국 하나님 앞에 작은 자 결국 12지파 중 2지파에 불과한 남유다가 역사의 마지막까지 살아남게 된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작은 자 사울과 다윗을 부르셨던 하나님의 깊은 뜻이... 결국 남유다의 베냐민과 유다지파만을 지켜주셨던 하나님의 나중 행동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자는 살아남습니다. 겸손하면 다시 쓰십니다. 지금의 흥왕이 대수가 아니라 오늘 이야기를 통해 긴 호흡으로 역사와 섭리를 이해하시는 시간 되셨기를 바랍니다. 결국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면 반드시 하나님이 선하게 이루십니다.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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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심의 두 방향(왕상11:30~40)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선조들은 장애를 질병 중의 하나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장애인과 그 부양자에게는 각종 부역과 잡역을 면제했다. 조선 초,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허조 (척추장애인)이었고, 중종 때 우의정을 지낸 권균 (간질장애인),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 (지체장애인), 영조 때 대제학, 형조판서에 오른 이덕수 (청각장애인), 역사를 빛낸 수많은 장애인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장애인은 단지 몸이 불편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세종대왕시절 박연이 왕에게 이렇게 아룁니다.

"옛날의 제왕은 모두 시각장애인에게 현송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음)의 임무를 맡겼으니 이는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신체적 장애를 등용 거절의 사유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이들에게 배려와 기회를 허락한 선조들의 지혜야 말로 이 시대가 따라가지 못하는 덕목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장애인을 등용했다고 해서 장애를 가졌어도 어찌되었던 무조건 등용되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 심지와 명철이 분명하고, 자기 재능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중심’이 바른 사람에게야 이와 같은 기회가 쥐어 줬겠죠.

그러므로 장애는 문제가 되지 않아도, 중심이 바르지 못한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도 쓰임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죠.

 

1.부에 도취하고 이방우상에게 마음이 팔린 솔로몬(10:14-29절)

오늘 이야기는 솔로몬의 이야기 마지막 시간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덕분에 크나 큰 복을 받습니다. 먼저는 듣는 마음을 얻은 그것이 하나이고, 두 번째는 넓은 마음을 얻게 된 것이 두 번째 일 것입니다. 지혜와 지략 등은 모두 이 두 가지 삶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그런데 솔로몬의 삶에 빨간등이 켜지는 징조가 나타나게 됩니다. 먼저는 10장 14~이하의 말씀입니다. 이 내용은 그가 엄청난 세금과 부를 누리게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에 눌리게 되는데, 필요 이상으로 솔로몬이 하나님의 영광에 기대어 부를 쌓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은 ‘부요함’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부요함은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일체의 족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부요함은 자족에서 출발하는 신앙입니다. 자족은 항상 족한 줄 아는 자세를 의미하죠. 더 가질 수 있을 때에도 다음을 위해 남겨두는 것을 말하고, 더 나갈 수 있음에도 주변을 살피기 위해 멈춤을 말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점차 자신의 욕심에 사로잡혀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도 솔로몬과 같은 우를 범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만, 물론 어디까지가 적정한 부인지 정하기도 어려운 터라.. 아마도 자신이 쌓아가는 부만큼의 대가지불이 그들에게 요구될 것이란 정도로만 이야기를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 늘 그래왔으니깐요.

여튼 본문 11장은 솔로몬의 결정적인 잘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가 쌓이고 명예가 쌓여서 그럴까.. 사람들은 지킬 수 있을 때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 때문에 명예나 능력을 잃기도 하는 것이죠. 솔로몬 역시 지킬 것이 많아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이방나라들과의 혼인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때 후궁이 칠백 명이고 첩이 삼백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큰 나라와 더불어 작은 도시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력자들과 더불어 혼인외교를 하고, 주변 국가의 부와 지식을 섭렵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국가가 성장하면서 다른 국가와의 교류를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11:4절은 그가 이방여인들로 인해 마음이 변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들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측근의 말만 듣다가 나중에는 소수에 의해 눈과 귀가 머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가 있죠. 마찬가지로 하나님 신앙이 갖는 그 분명한 공의의 기준과 그 넓은 자비가 갖는 균형의 기준이 점차.. 이쪽과 저쪽 사이의 균형을 기준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인간 정치는 양쪽 세력 간의 균형을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의 정치는 본질적인 균형에 있음을 아셔야만 할 것입니다. 불의와 공의가 친구가 될 수 없듯이 불신앙과 신앙은 더불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힘들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기준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들은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이방신을 멀리 하라는 음성을 들었지만, 이미 잘못된 길에 들어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멀리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함으로 결국 자신의 왕국을 자신의 부하에게 넘겨 주어야 하는 징계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솔로몬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항상 깨어서 믿음생활을 행하지 않으면 우리도 언제든지 솔로몬의 자리에 떨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고 항상 경성하여 믿음 안에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를 지켜주시는 신실하심도 있지만, 청종치 않는 백성을 향한 징계 역시 분명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인간에게서 찾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찾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좌우로 흔들리나 하나님은 어느 면에서나 우뚝 서시며, 사람은 인정에 흔들리나 하나님은 더 큰 사랑으로 모두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감히 닮을 수 없는 사람이기에 이 기준이 늘 부담이 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언제나 돌아보면 서 계시는 주님은 분명 망망대해에 등대와도 같은 분이십니다.

 

2. 자비로우신 하나님

다음에 또 하나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러한 솔로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생전에 이 일을 행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더욱이 그 나라를 모두 넘기지 않으시고 유다지파를 통하여 다윗과의 언약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항상 자신 앞에 등불을 들게 하신 것입니다.(11:36)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한량없으심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사랑을 받고 있는 믿음의 자녀임을 감사하면서 항상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의 약속에 충실하게 행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솔로몬의 대적과 여로보암

솔로몬의 부흥기가 끝이 나기 시작합니다. 주변에 적대국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때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11:14절에 등장하는 하닷입니다. 하닷은 에돔사람입니다. 예전에 사무엘서 설교 중에도 나왔습니다만 에돔은 다윗 시절 요압장군이 육개월이나 그 땅에 머물며, 에돔의 모든 남자를 진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하닷은 작은 아이에 불과했는데, 몇몇 어른과 간신히 도망하여 애굽에 머무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부패한 세상을 심판하고자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애굽 땅에서 불러내었듯이, 하닷 역시 부패한 솔로몬의 왕국에 저항하고자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닷은 애굽왕의 총애를 얻어 황제의 사돈이 되었고, 이후 르손과 여로보암과 더불어 유다왕국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신실하게 이들을 보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부패하여 또 다른 이를 압제할 때 하나님은 이제 그 압제당한 이들을 통해 원 나무를 심판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불의에 대해 심판을 공의에 대해서는 선대의 심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실로(보냄받았다)의 사람 아히야 선지자는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합니다. 31절 말씀.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각종 우상 신들을 모시고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내 법도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함이니라.”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에게 언약하신대로 여로보암에게도 37절에 동일한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 여기서도 하나님의 두 가지 신실함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여로보암을 통해 솔로몬 왕을 심판하실 것이란 사실과 또 하나는 그래도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하되 영원하지는 않으며, 한 지파는 남겨둘 것이란 자비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때와 같이 동일하게 솔로몬(사울)-여로보암(다윗)의 구도로 여로보암이 애굽땅으로 도망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이스라엘 주민 정체성)

 

나가며

마무리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악한 자에게는 악의 보응을 선한 자에게는 선한 응답을 주십니다. 오늘 악으로 심는 자는 이미 그 어리석음으로 심판받았음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신약의 데살로니가후서2장의 이야기에서도 이와 같은 면을 알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악한 자들이 이 땅에 나타나는 이유는 이들이 불의를 좋아하고 심판을 받게 하시려고 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이들도 자기들의 역할이 있으며, 이들은 진리를 도무지 알 수도 따를 수도 없는 사람임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선택한 종이었습니다만, 결국 사울과 같이 심판을 받게 되고 말았습니다. 진리를 따르다가 실족하여 우상숭배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왕국을 이끌며 어쩔 수 없는 판단과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만... 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음으로 솔로몬은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신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심이란 균형의 문제가 아니라 기준을 향해가는 방향을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입니다. 믿음으로 판가름하며, 또 믿음 안에서 용납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이 두 가지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주의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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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물을 나누어요(고전12:1~11)

 

들어가는 말>

옛날에 로마라는 나라가 있었어요. 로마 황제는 어느 날 골머리가 아팠어요. 다스려야할 식민지들은 많은데, 마땅히 이 식민지 백성들을 굴복시킬 생각이 나지 않아서죠.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좋은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황제는 각 식민지에 다음과 같이 전하도록 했어요. “몸은 각각 다른 역할이 있는데 식민지인 너희들은 손과 발이니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여 머리되는 우리 로마제국을 먹이고, 영화롭게 하거라!”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에 반대하게 되었어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과 몸의 모든 지체가 다 소중하니 서로가 서로를 아껴야만 할 것입니다. 당신들의 법을 따를 수 없소!

메시지>

오늘 이야기는 신비롭고 놀라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은사)에 관한 이야기에요. 성경에 보니까.. 어떤 은사든 다 한 성령님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 역시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따라서 어떤 사람은 지혜의 말씀을, 지식의 말씀을, 병을 고치거나 믿음을, 예언하거나 영을 분별하는 능력 등을 갖기는 하겠지만, 이 모든 것은 ‘차이’일 뿐 계급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11절 이야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어요.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준 것일 뿐이다!

우리 친구들에게도 하나님은 여러 가지 능력을 주셨어요. 어떤 친구는 힘이 세고, 어떤 친구는 머리가 좋고, 어떤 친구는 성격이 좋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하나 하나를 사랑하시고, 여러분에게 귀한 선물을 하나씩은 다 주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해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하나님께 기도해보시길 바래요. “하나님 저는 무엇을 잘 할 수 있나요?” 하나님 저도 훌륭한 목사님이나 선생님 찬양인도자와 반주자가 되게 해주세요! 세계를 다니는 선교사나 훌륭한 장로님이 되어서 교회를 섬기는 것도 좋은 일이겠죠?

^^ 자, 이제 전도사님 따라서 오늘 읽은 말씀 하나를 외워볼까요? 11절!

말씀은>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12:11)×3번!!!

자 그럼 퀴즈 문제~>이 모든 능력은 누가 나눠 주신 것일까요?(한 성령, 한 하나님)

기 도~>성령의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쓰임받도록 광고>자체강습회, 성경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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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있는 교육(마10:24~33)

들어가는 말

우리 교단 교회 중에 수도교회에서 시무하셨던 최태섭장로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하신 분입니다. 이분의 일화로는 6ㆍ25 전쟁 당시, 9ㆍ28 수복이 이루어져 전쟁이 끝났는가 싶던 때였습니다. 페허가 되다시피한 서울 땅에서 청년 최태섭은 친구로부터 단무지를 군대에 납품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청년들을 위해 한번 해볼만 하다는 생각으로 그는 덜컥 그 일을 해보마고 수락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에 거래하던 은행에서 얼마간의 돈을 빌려 조그만 단무지공장을 차렸습니다. 열심히 단무지를 만들어 팔다 보니 약간의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 갑자기 전세가 급변하여 압록강까지 올라간 우리 국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불안해진 사람들이 다시 짐을 싸고 하나 둘 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최태섭은 짐을 꾸리기 전에 은행으로 부랴부랴 달려갔습니다. 은행은 이미 업무를 중단하고 모두 피난을 떠나고 한 사람만이 남아 뒷일을 수습하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매우 초조한 기색으로 떠날 준비를 하느라 최태섭이 다가오는 지도 몰랐다. 최태섭은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빌린 돈을 갚으러 왔소이다." 그제서야 은행직원이 별사람 다보겠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이 난리통에 돈을 갚으로 왔다구요? 지금 보다시피 은행업무가 마비됐으니 다음에 오시오." 은행직원은 말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나가려고 했습니다. 최태섭은 얼른 그의 팔을 붙들었다. "나도 피난을 가려는 중이요. 이 전쟁에 내 목숨도 어찌될 지 모르는데… 그러니 일단 돈부터 받아두십시오." 은행직원은 하는 수 없이 돈을 받고 영수증을 써주었습니다. 영수증을 호주머니에 넣고 은행 문을 나서자 멀리서 쿠르릉 포화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고 합니다.

후에 최태섭은 제주도에서 군부대에 생선을 납품하는 원양어업에 뛰어들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돈도 담보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업자금 융자를 신청하기 위해 은행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은행장이 1·4후퇴 때 빌린 돈을 갚고 피란을 간 이 기업인을 알아보고 결국 무담보로 2억원을 융자해주었습니다.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만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최태섭, 그가 바로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의 기적을 이룬 주인공입니다.

 

1. 기독교 정신의 교육의 중요성

그런데 이런 그를 만들어낸 데에는 바로 기독교 정신 안에서의 교육 덕분이었습니다. 우선 그가 졸업한 오산학교는 1907년 장로교인이었던 남강 이승훈장로님이 세우신 학교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학교는 조선이 나라를 잃었던 시절 무력항일운동과 자강항일운동의 바람이 불었을 때, 자강운동 즉 조신인민의 역량을 키우자라는 취지로 세운 학교였습니다.

이승훈장로님은 학교설립의 뜻을 그리스도의 뜻을 따름으로 정하고, 정주 지역의 인물들을 양성하게 됩니다. 특히 장로교 3대 지도자였던 통합측 한경직목사, 합동측의 박형룡 목사, 기장측의 김재준 목사님이 바로 이 학교 출신이며, 시인 김소월 선생을 비롯하여 최태섭 장로님 등이 이 학교 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독립선언서 33인중 한 분인 이승훈장로님의 좌우명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일을 하게 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그의 근육과 뼈를 고달프게 하며(勞其筋骨), 그의 몸을 굶주리게 하고(餓其體膚), 그 자신을 궁핍하게 하며(空乏其身), 그의 일이 그가 하고자 했던 것과 어긋나게 한다..(行拂亂其所爲), 그것은 그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인내를 기르게 해서(所以動心忍性), 그가 할 수 없었던 일까지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다(曾益其所不能). ”

 

장로님의 고진감래의 좌우명은 기독교의 인내와 연단의 신앙과 같은 것이며, 오늘 우리 교육이 잊고 있는 다음의 몇 가지를 주목하게 합니다.

 

2. 교육의 방향들

① 아이들에게 가치는 반드시 인내와 연단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게 해야 합니다. 초등학생만 되어도 벌써 스마트 폰을 가지고 놀게 됩니다. 바쁜 맞벌이 가정일수록 이런 정보매개물에 쉽게 노출이 됩니다. 어느 날인가 명절에 친지들을 만났습니다. 그날 밤 늦도록 어린이 만화 프로그램이 24시간 하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아니 이 시간에도 자지 않는 아이들이 있나.. 밤에는 더 잔인한 걸 하네.. 그러자 사촌동생들이 말합니다. 부모님이 늦게 집에 돌아오니까.. 밤새도록 티브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많은 성장을 이뤘지만, 그것이 곧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울 수 있다는 뜻이 아님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의 세월호 사건이나 대중매체들은 우리 아이들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소모되도록 노출되었을 뿐 아이들 스스로 세상을 이끌어 갈 주체로 성장시키는데는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미취학 시절부터 영어나 수학을 배워야 하는 아이들. 이 끝없는 줄서기에 우리의 아이들은 소모되고 있지만, 정작 아이들을 삶을 건강하게 지탱하고, 극복할 수 있는 인내와 끈기는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른 것입니다. 여전히 대안인 것입니다. 신앙은 자세입니다. 아이들에게 지금 당장의 달콤함이 아닌 또 눈동자가 풀린 체 세월을 보내는 일에 낭비되지 않도록 늘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 살도록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아이들에게 신앙을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먼저 기도하고 인내하는 모습을 보이셔야 합니다. 오늘 나의 모습이 그대로 아이들에게 답습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내 삶의 주인 의식은 오직 그리스도의 종 된 자세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늘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삶은 자연히 인내와 연단을 받아들이고, 큰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큰 꿈을 꿀 수 있도록, 선생님들이 먼저 열심히 자질을 기르고, 아이들에게 덕을 세우시길 바랍니다.

 

② 아이들에게 높은 뜻을 가르쳐서 스스로 잔가지를 쳐 나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를 망치고 싶으면 잔소리를 자주 하라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아이들로 분노하게 만들면 이미 그 아이의 인생을 반은 망쳤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신앙지도가 되었던 가정 지도가 되었던 어느 정도의 훈육과 지도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교육은 아이들에게 높은 뜻을 분명히 가르쳐서 아이들 스스로 자신을 다듬어 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문에 위대한 신앙의 선진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준다던지, 아이들이 믿음 안에서 비전을 갖도록 해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다듬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축구선수라면 이영표집사님과 같은 예를 들면 될 것이고, 정치인이라면 만델라나 목회자라면 손양원목사님이나 김재준목사님과 같은 분을 소개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가르쳐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강아지똥이라는 아동집을 만든 권정생 선생은 평소 예수님의 삶을 사모하여, 자연스레 그분의 삶을 이끌어가도록 두었다고 합니다. 강아지똥이라는 동화에서 이런 복음의 원리가 잘 녹아 있는데, 우리 아이들 역시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것 못지 않게 예수님을 따르도록 지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③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이 변화될 수 있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다가올 앞으로의 환경은 우리가 겪은 신앙 환경과 달라질 것입니다. 혼란스럽고 다양한 환경들이 아이들로 하여금 신앙을 희석시키고, 변질되게 만드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는 첫 사랑의 자리를 경험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이 헷갈릴 때 이 날을 기억하며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신앙은 사랑과 믿음이 없으면 변질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꼼수나 악마적인 생각들로 대신 채우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늘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살도록 여러 번 교훈하셔야 합니다. 사랑과 믿음을 잃는 순간 괴물이 된다는 사실을 각인시키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세상은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훔쳐갈 것입니다. 그래도 끝내 이겨내도록 반드시 이 사랑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3. 여름성경학교와 한빛회 수련회의 주제 ‘희년’과 ‘헌신’

이번 여름 교육행사는 모두 희년과 연관이 있습니다. 희년은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 화해를 담고 있는 제도입니다. 인간이 땅 위에 줄을 그어 내거 네거 나눌 때 희년은 이 모든 땅과 소산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 세워진 제도였습니다. 따라서 희년의 뜻은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이 모두 하나님의 다스림 앞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뜻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헌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헌신 역시 희년의 정신으로 각오해야 합니다. 내 시간, 물질이 아니라 이 순간만이라도 내 모든 것이 아버지 것이오니.. 아버지께서 마음껏 사용하시고 주장하옵소서..라고 믿음으로 자신을 내려놔야만 하는 것입니다.

교회학교를 담당하는 선생님들에게는 일년 중 특히 이 여름행사가 갖는 의미가 그런 것입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오니.. 주여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우리 스스로가 이런 믿음의 훈련을 하지 않는 한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능력도 나타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시고, 그야말로 희년을 누리는 교회학교가 되도록 힘쓰셔야 합니다.

 

나가는 말

오늘 본문은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몸은 죽어도 그 다음은 어찌 하지 못할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우리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 하나님 백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용사를 키워내는 것! 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공중 나는 새 두 마리도 땅 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것!

요약하면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과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자 소원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꿈은 올바른 방향을 가질 때 힘이 붙습니다. 꿈은 하나님이 인정할 때 날개를 달고, 꿈은 지금 주어진 삶을 안정적으로 가꿔나갈 때 더 멀리 날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육은 아이들에게 꿈을 부어주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교육은 아이들에게 꿈대로 살도록 지지해주는 보혜사의 사역인 것입니다. 오늘 이 꿈을 나누고 자라게 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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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리라 그러니 너는 가라(출3:6~10/마10:16~20)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가난한 한 가장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그 가장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제발 제가 부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정을 잘 살펴보신 후 그를 도와주기로 결정하시고, 그에게 정직하고 사업 수완이 좋은 사업가를 붙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업가의 말을 듣지 않고, 욕심을 내는 바람에 결국 돈을 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복권에 당첨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돈을 잘 관리하지 못해 다시 가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기꾼이 그 가장에게 붙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기꾼은 그 가장을 꼬드겨서 처음에는 많은 이윤을 가져다 주면서 그의 환심을 샀다고 합니다. 그때서야 가장은 신이 나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제가 이제 부자가 되나 봅니다. 이번에는 복권도 안사고 정말 성실하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왠일입니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사기꾼은 그 가장의 명의로 더 많은 돈을 사기를 쳐서 도망가버리고 만 것입니다.

 

저는 이 가장의 기도 어디에서도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베푸신 선대를 잘 관리하지도 못함을 발견합니다. 그는 자신의 변하지 않을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들이 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자신의 고집으로 일을 그르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는 있으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 삶. 하나님을 결코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이 바로 그 가장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께 묻고 듣는 입과 귀가 열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결코 어떤 상황도 나아질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1.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만남

오늘 같이 읽은 본문에도 사람이 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삶을 살아가던 중 기적 같은 일을 만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타는 덤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 사건은 평범한 모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밀어내었으며, 무엇보다 일상의 삶을 거부하는 강력한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사건을 읽는 신자들이 그저 신비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모하면서도 정작 그 만남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이 변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만나면 뭔가 신통한 능력을 얻게 될 줄로 착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신비’에 있지 않고, ‘우리의 삶’에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초원의 한 촌부를 찾아오셨을까요?”

그리고, 왜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을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계실까요?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 받은 은혜에 대해서는 많이들 나눴지만, 정말 중요한 질문에 앞에 자신을 세워 본적은 없는지도 모릅니다.

 

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셨을까요? /쉬고

적어도 본문은 그 이유에 대해서 두 가지의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①먼저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동안의 삶이 아닌 특별하게 바뀌게 될 삶으로 초대했다는 사실입니다.

②그리고 두 번째는 모세 역시 삶의 돌파구를 만들어 줄 그런 순간을 기다리고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매일의 변화 없는 삶 가운데에서 실은 감춰져 있는 더 많은 가능성에 대해 목말라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런 특별한 순간에 일어나는 첫 번째 사건은 역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대단히 구체적으로 스스로를 나타내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매우 구체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6절입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이 선언에 “나는 사라의 하나님 리브가의 하나님 라헬의 하나님이라”덧 붙일 수도 있었니다. 그러나 옛 조상들의 이야기들에 나오는 바로 그 하나님. 즉 절망에 빠졌던 옛 백성에게 다가와 그들에게 자녀를 주고, 새 삶을 허락하셨던 그 하나님. 방랑하던 유랑민들과 동행하고, 아무것도 아닌 인생들과 기꺼이 짐을 나눠지길 원하셨던 그 하나님. 요약하면, 삶의 모든 가능성이 닫혀서 열리지 않는 인생들에게, 기꺼이 새로운 기회와 변화를 주신 하나님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춰진 가능성을 열어주시는 창조주이신 것입니다. 그동안 다른 사람과 환경만을 탓했던 사람들이 드디어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기 시작하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덤불 이야기는 인생이 거듭나는 즉 삶의 관점이 바뀌는 중요한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쉬고/

 

2. 삶의 관점이 바뀌면

돌아보면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좌절과 불신앙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해방하고 신음하는 피조물들에게 자유를 주시고자 했지만,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 안에서조차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겠다던 거대한 약속을 믿지 못했고, 믿음 안에서의 결단이 사라진지 오래가 되었습니다.

꿈꾸는 사람은 없고, 오직 현상 유지만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 교회를 병들게 하지만, 누구도 쉽게 하나님 앞에 나서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도의 분량이 부족합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순수함이 매말랐습니다.

다시 기도해야만 합니다. 다시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변화를 사모하고, 하나님 앞에 인내하는 신앙으로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젊은이들과 장년들이 이 믿음의 분량을 채울 수 있도록 교회의 모범을 세워가야만 할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 없이는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늘 똑같은 현실만 반복될 뿐. 믿음 없는 신앙은 늘 믿음 없는 결과만 낳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믿음으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모세가 만났던 불타는 덤불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불을 다시 켜야 합니다. 날마다의 말씀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의 ‘문제 있음’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이와 같은 노력은 모두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숨겨져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자신의 것으로 삼게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들을 해방에 참여시키라고 부르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삶의 불안과 가난과 저주, 믿음 없음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문제의 해결이 바로 지금부터 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7~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 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내리라!”, 그리고 9절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만나고 있는 바로 지금, 애굽 땅에서 고통 받고 있는 백성들의 현실 가운데 그를 초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대면’에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금의 삶의 문제점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대부분 바쁜 일상 가운데 외면당합니다. 예를 들어, 맞벌이 부부에게 자녀들의 훈육 문제는 어떨까요? 조금 더 신경써주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으로 하나님께 빕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러나 이 아이들이 어떤 아이로 자랄지는 불 보듯 뻔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 기도의 불이 꺼지는 것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갖는 영적인 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장 보이지 않는 열매들 때문에 늘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실테지 라며 외면합니다. 그러다 기도불이 완전히 꺼지고 나서는 더 놀라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아무 일도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이지 결코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은 아닙니다.

 

3. 진짜 삶으로의 초대

저는 여러분이 이 시간 결단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진짜 삶과 그 가능성을 돌아보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외면했던 실은 참다운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촌부에 불과했던 모세가 하나님을 통해 비로소 발견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자기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고통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구하라는 새 인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모세가 이스라엘의 해방자가 되었듯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많은 꿈과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무심코 소비하는 1~2만원을 고통 가운데 있는 이웃에게 사용한다면 어떨까요? 아프리카 아동들의 한 달 치 교육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병원에서 수술을 무사히 마친 환자가 수술 전에 ‘하나님께 모든 과정 가운데 선한 결과를 보여달라고 기도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그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가 낮은 마음으로 듣고 섬기는 자세를 회복하면 어떻게 될까요? 교인들은 자연히 이들을 칭찬할 것입니다. ”

“모든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는 점차 예배가 자신의 삶을 지켜준다는 사실을 깨달아 갈 것입니다. ”

“참 다운 삶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 밖에서 여러분의 삶의 이유를 발견하도록 유혹하지만, 여러분이 마귀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 곧 죄악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목회자가 죽어가는 교회나 성도들을 보고도 ‘오늘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가게 해주심을 감사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또 성도가 자신의 기업과 영혼이 무너져감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의 기업과 영혼은 누구에게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참다운 삶으로 초대하길 원하십니다. 눈을 떠서 주변을 바르게 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말씀입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은 내가 하리라! 그러니 너는 가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광스러운 해방의 하나님 사건이 이제 갑자기 사람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임마누엘 곧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란 바로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삶으로 변화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시길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라

마지막으로 오늘 읽은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이제 제자들의 사역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경험한 제자들은 주의 일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험했다면 주의 일에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물론 이 일은 때로 저와 여러분에게 ‘위험한 도전이나 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낼 때,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속에서 성령께서 역사할 것이다. 란 마태복음10:20절의 말씀 역시 사실입니다.


나가며

마무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부정하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일상의 가치를 드러나게 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세나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제자들과 같이 그저 현상유지나 버티는 삶들에 속아서는 곤란합니다. 성령님은 제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성령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사모하십시오. 그리하면 나머지는 그분께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니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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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 실린 박상돈님의 글을 옮긴 것입니다.

1. 서론

교육의 현장은 있으나 교육의 본질은 사라지게 되었다고 탄식하는 우리네 교육 현실속에서 교육의 본질을 다시한번 음미하고 그 참된 방향성을 찾아보고자 하는 일환으로 근대 우리 민족주의 교육사상가를 연구해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남강 이승훈은 우리 민족이 고통받던 일본 제국주의 시대속에 나라와 민족과 교육을 위한 사랑의 화신이며 구원의 청년으로서 쉼없이 향상하고 끊임없이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여 敬, 愛, 聖을 실천한 구현자로서 평가받는 인물로서 그의 삶과 교육사상을 통해 우리 교육의 본질과 방향성을 깊이 고찰해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된다.

2. 남강 이승훈의 생애

이승훈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인환, 자는 승훈이며 호는 남강이다. 빈한한 서민 집안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16세에 유기상의 점원이 되었으며 10여년 동안 유기행상·공장 경영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공장경영방법을 개선하여, 노동환경을 일신하였고, 근로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 평등하게 그들을 대접하여 근로자들의 생산능률은 향상되고 품질도 좋아져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하지만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무대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한국 최초의 국제투자를 시도하였는데,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파산하게 되었다 이후 시골에 칩거하면서 늦게나마 면학의 길을 찾던 중 1907년 7월 평양에서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난 뒤 교육을 통해 민족을 구하여야겠다는 굳은 결심 아래 금연·금주와 단발을 결행하고,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평양 에 돌아와 서당을 개편하여 신식교육을 가르치기 위한 강명의숙을 설립하고, 이어서 이해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오산학교를 개교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1910년 기독교 신자가 되어 학교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운영하게 된다. 사실 당시 그 창망하던 시기에 조정의 힘이나 선교회의 힘이 아니고 장사하던 사람의 힘으로 민족의 간부를 양성하는 신교육기관을 세운 것은 놀라운 이적이었다. 결국 이승훈을 통해 오산학교는 민족교육의 산실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는 1911년 5월 안악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9월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압송, 4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루게 된다. 하지만 그의 교육에 대한 열의는 계속되어 1915년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는 한편,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가출옥, 곧 이상재, 유진태 등과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여 전국의 사학교육을 지도하는 등 계속 그의 뜻을 펴나갔다. 그리고 1924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물산장려 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열린 강연회를 통하여 시국강연을 하였으며 26년 오산학교 초대 이사장을 지내면서, 이상촌 건설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사장에 재직 중 67세를 일기로 그의 생을 마치게 되었는바 오산학교에서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치루게 되었다. 그리고 고인이 된 그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3. 남강 이승훈의 교육사상

1) 민족교육 진흥사상

남강 이승훈의 대표적인 교육사상은 교육을 통한 민족진흥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한말 국권회복운동은 무장투쟁노선과 실력양성운동 노선을 각 채택한 의병운동과 자강운동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특히 자강 운동이란 한국 민족이 주체가 되어 교육과 실업을 진흥함으로써 경제적, 문화적인 실력을 양성하고 나아가 부국강병을 달성하자는 운동이였다.
결국 이러한 자강운동은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남강은 이러한 계몽운동에게서 큰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평생을 민족 진흥운동에 헌신하였는바 교육을 통해 이러한 진흥이 발현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교육진흥사상은 1907년 오산학교 개교식에서 언급한 그의 연설문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금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데 우리가 그저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긴중한 일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이 어떠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고 있으니 그들을 깨우치는 것이 급무이다"

사실 그의 이러한 교육진흥사상은 도산 안창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며, 1907년 그의 생을 뒤바꾸어 놓은 평양에서의 안창호의 강연 역시 교육진흥론에 관한 것이였다. 당시 안창호는 물고기를 바로 잡으려면 먼저 그물을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후진들을 새교육으로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이것이 나라를 구하는 첫째 방법이라고 역설하게 된다.
이러한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크게 감명받은 남강은 강연이 끝난 후 안창호와 함께 나라의 장래와 교육의 일을 놓고 심도깊은 논의를 하면서 이승훈은 그의 평생 교육진흥사상을 통한 민족 계몽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훗날 당시 안창호와의 주고받은 대화를 "잊을수 없는 감격의 순간이었다”라고 회고하였다 하니 그 순간부터 꿈틀거림은 일단 뜻을 세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우리가 살아갈 길은 교육을 통하여 힘을 길러 나가는 데에 있다"는 말을 언제나 외우고 다녔으며 대중 앞에서 이야기할 때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곤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이후 그의 다짐대로 교육자로서의 일관성있는 삶을 끝까지 실천하게 되는데 그의 마지막 유언이 "낙심하지 말고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학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해 쓰게 하라" 였다고 하니 자신의 삶을 끝까지 다할때까지 민족을 위한 그의 교육진흥사상은 매우 투철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그는 민족의 진흥을 위해 신학문을 도입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처음세운 강명의숙에서부터 신식교육을 가르치게 하되 처음부터 과목은 산수. 체조. 수신. 역사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거의 모든 학교들이 전통적인 구교육이였는바 그는 교육내용을 일신하여 다른 민족사학들과 함께 서양식 교육내용, 즉 자연과학 과목(물리, 화학, 생물, 수학, 산술 등)과 사회과학 과목(법학,경제학, 지리, 역사, 정치학)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이는 부국강병을 위하여 시급히 요청되었던 당시의 시대사조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그의 교육진흥사상으로 말미암아 오산학교는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으며 졸업생들의 면면 역시 주로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종교인 등으로 일제와 결탁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되었으며 독립운동의 핵심 지도자들로서 세워졌던 것이다. 한마디로 남강의 일생은 민족진흥과 애국운동에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친 일관성있는 삶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은 그에게 있어서 민족회복을 위한 이상이였고 통로였던 것이다.

2) 기독교 교육 사상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를 빼앗긴 것에 대해 몹시 괴로워하던 남강은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한석진목사의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얻게 되었다. 그후 그는 학교로 돌아와 교직원과 학생들을 모아놓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학교에서 신앙집회갖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는 민족 전체가 다시 힘을 얻고 하나될 수 있는 계기가 바로 헌신, 봉사,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정신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해 12월 학교의 교육주지를 기독교 사상에 근거하여 바꾸면서 라부열(Slacy L. Robert)목사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성경과목도 가르치게 되었으며 특히 나중에 교장이된 유명모 선생과 조만식 선생은 오산학교의 신앙교육터전을 튼튼하게 세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비록 1922년 일제의 신교육령에 의거하여 1923년 11월에 기독교 교육주지는 삭제되고 일반학교가 되었으나 학교안의 신앙집회와 기도하는 분위기는 계속되었으며 신앙적인 모임과 예배를 통해 더욱 친밀한 동료의식속에 생활하며 아침저녁으로 찬송가 소리가 학교를 메아리쳤다고 전해진다.

한편 남강은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경,애,성(敬愛誠)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았는바 하나님을 공경하고 스승을 공경하며(敬),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하며(愛), 진실하고 성실하게 거짓이 없이 사는 삶, 또 이를 따르는 학생들을 기르는 것(誠)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게 되는데 이것은 오산학교의 교훈인 '사랑, 정성, 존경"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특히 그가 강조한 의(義)의 교육은 기독교 사상에서 잘 나타나는데, 교육과 관련된 신앙의 형태로 이를 강조하고 의가 아닌 거짓이나 게으름이나 이기심이나 권모술수나 아집을 버리고 항상 큰뜻속에서 행하고 배우고 생활하도록 가르쳐 준 것이다. 남강은 자주 성경을 인용하여 훈화를 하였는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교훈은 훗날 졸업생들로 하여
금 개인생활에 있어서 정직하게 함은 물론 일제와의 투쟁에 있어서 강건한 민족애를 발휘하도록 다그친 것으로 볼수 있다. 이런 교육을 통하여 졸업생들은 개인의 출세나 영달보다 남을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하도록 하는 헌신과 봉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으며 또한 의라는 것은 남에게 짓밟히고 끌려다녀서는 안되며 모두가 덕스럽게 사는 것이 공의임을 배웠던 것이다. 결국 남강은 그의 교육의 방향성을 기독교 사상으로 귀결시켰기에 기독교 교육을 실천적으로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것이다.

3) 실천교육 사상

남강은 어려서부터 남의 심부름꾼이 된즉, 주인이 시키기를 기다릴 것 없이 자신의 일을 실천적으로 성실하게 감당했던 사람이였다. 그리고 지금도 남강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한다.
“20년 동안 그는 또 죽고 또 살고 또 살고 또 죽었다. 이십년간구생구사(二十年間具生具死)”그가 늘 강조했던 것은 할 일이 있는 사람에게 게으름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에서는 “이따가”란 말이 나온 일이 없다. 기지개를 켜는 것을 본 일이 없고 하품을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가 예순이 지났어도 언제 몸을 찌그리는 일도, 다리를 뻗고 버둥버둥하는 일도, 대낮에 낮잠을 자지도 않았으며 삶이란 개인이거나 나라거나 밑져서는 안되는 그런 것이었고 할 것은 반드시 하자는 실천적인 인물이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성실함은 그가 가꾼 교육현장에도나타나게 되어 실천교육가로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는 학생들에게 교육지식이나 이론을 가르친 적이 없지만 오산의 많은 졸업생들은 남강을 통해서 배운 체험과 가르침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교육자 남강을 그리워한다.
그는 특히 사람이 되고 나라를 사랑하는 길은 큰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극히 예사로운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 뜰을 쓰는 것, 각각 자기방을 치우는 것, 교실을 깨끗이 쓸고 정돈하는 것 등 이 모든 작아보이는 실천적인 일이 실은 나라를 사랑하는데 통하는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말로써만이 아니라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날마다 몸소 실천하였는데 특히 교실청소, 자기방 청소, 화장실 청소는 언제나 솔선하였고, 특히 남들이 싫어하는 화장실 청소는 옥(獄)중에서도 도맡아 했다. 학교의 설립자이면서도 학교 화장실의 얼어붙은 변을 손수 도끼로 깨고 청소했다는 일화는 바로 이런 실천교육의 표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가 늘 주장했고 실천했던 '사사교육 처처교장(事事敎育 處處敎場)'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실천궁행의 교육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매사에 진실할 것을 마음먹고 교육의 현장속에서도 실천하였는바 마음과 몸을 다하여 일하여서 대중의 신망을 받는 지경에 이르는 진실한 진인이 될 것을 강조하면서 실천하는 교육자였던 것이다.

4) 산업교육 사상

남강의 실천교육사상은 산업교육 사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그가 어렸을적 유기상의 점원에서 유기행상·공장 경영 등으로 대실업가로 성장했었던 과거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때 이후 남강은 민족의 자생을 위해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힘은 산업의 힘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철도를 깔고 항만을 만들고, 공장을 짓고, 물건을 만들어 낸다면 힘이 생기고 그 힘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또한 당시 때마침 덴마크 교육사조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었는데 덴마크에서 그룬드비히에 의한 국민고등학교 교육이 나라를 일으켰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직접 덴마크를 다녀온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교육의 성과가 보고되었던 것이다. 또한 도산 안창호도 우리에게는 정신과 함께 기술이 필요하며 남녀노소가 1인 1기를
습득하여 부지런히 일하고 물건을 만드는 일이 소중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에 도전을 받는 남강은 소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실천주의가 존중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덴마크의 교육사조를 따라 농민학교와 공동체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강은 오산학교와 신천농민 학교간의 자매결연을 추진하면서 학교재단이 경영하는 직조공장과 제사공장과 연계하여 오산일대를 새로운 교육도시로 만들기로 계획한후 농촌과 도시가 연결된 전원도시로서 오산에 학교와 교회와 도서관을 중앙에 두고 공장이 교외에 위치하며 그 사이를 푸른 마을로 메꾸는 일을 진행하기로 다짐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교회, 학교, 산업을 공동전선으로 파악하고 서로 유기적인 교호작용에 힘을 집중하여 교회를 통해서는 민중의 신앙을 깨치고, 학교를 통해서는 교육을 일으키며, 산업을 통해 나라를 근대화하는데 삶의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산업교육사상에 근거한 구체적인 종합계획은 결국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비전은 지금도 우리곁에 숨쉬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평생 교육 사상

남강은 어릴때에 조금 배운 한학외에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가르쳐 달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고, 실제로 남강보다 사회경험이 적거나 나이가 적은 사람일지라도 항상 그들에게 배우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많다. 또한 52세의 나이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수학한 것을 보면 그의 향학열과 교육에 대한 자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신구약, 교회사, 교리문답, 설교학, 교회법, 한국사, 서양사 등을 배웠으며 거기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오산학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영적 지도자가 될 것을 믿어 한사람 한사람을 성심껏 대하고 지도자로서의 품격을 갖추며 살 것을 당부하면서 함께 공부에 정진하게 되었다. 특별히 그의 '의' 사상은 신학교때 부지런한 학습을 통해 터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구약을 통해 하나님의 의에 굳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의를 향하여 "나음 나음 나아가라" "점진적으로 나아가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해나갈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결국 계속해서 배움에 대한 노력을 늦추지 않고 부단히 배우며 살았던 그를 향해 사람들은 만년청년이라고 일컬었으며 쉬임없이 향상하고 끊임없이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며 배우고 구현했던 인물로 지금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평생 학습인으로서 겸허하게 학습하는 생활로 일관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 론

교권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이 시대에, 남강의 교육 사상과 그의 실천적인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며 지금도 우리를 향해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하겠다. 남강이 지녔던 교육 진흥사상, 기독교 교육사상, 실천교육 사상, 산업교육 사상, 평생 교육 사상은 지금도 교육의 본질적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사상적 준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실천인으로서 그 평생의 삶을 아름답게, 그리고 진실되게 헌신했던 남강 이승훈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들을 깊이 반추해 볼 수 있을 뿐만아니라 그것을 통해 교육자로서 우리들이 어떻게 준비하며,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할지에 대한 교육적 삶의 방향성을 얻게 된다. 만약 우리가 성실했던 교육자 남강의 삶을 전인으로 배우고 따를 수만 있다면 우리의 교육의 장속에서 아름다운 열매들은 분명 맺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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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에 관한 예화1  (0) 2014.08.12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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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8장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들어가는 말

오늘 이야기는 솔로몬 통치의 절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40년간의 건축이 마무리되고, 이제 성전 봉헌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7장에서는 그 성전의 모양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고, 특히 두로사람 히람의 도움과 원주민의 노역으로 완성된 성전과 솔로몬성 건축은 총 12만명의 인원이 동원된 거대 공사였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성막에서 시작해 성전에 이르기까지 언약궤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이제 솔로몬에게 깊은 영감을 주며, 솔로몬의 연설과 기도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8장의 내용인 것이죠.

가톨릭교회는 성당 안에 예수님의 피와 몸을 상징하는 성체를 모신 제단을 중심으로 성당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마리아에게 중보의 기도를 부탁하고, 미사당 입구 옆에 있는 성수에 손을 넣어, 죄를 정결히 하는 예식을 갖춘 후 중앙 앞 쪽에 있는 제단을 향해 예를 표합니다. 또 이들의 성전 즉 교회관은 우리와 차이를 갖게 되는데, 가톨릭교회는 무형의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무리인 교회뿐 아니라 눈에 드러난 교회당을 교회로 인정함으로써 성전관리와 건축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느 날 한 개신교 목사님이 가톨릭 신부님의 초대로 성당에 놀라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날 목사님이 신부님께 말합니다. “성전은 우리 몸을 의미하는데, 그리스도인과 교회당을 동일시하는 것 같아 불편해보입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말합니다. “저희들의 모든 예식과 건축들은 철저히 교육적이고, 철저히 성사적입니다. 신자들은 성당 안에 들어오는 순간 예수님 시대에 드렸던 정결례를 경험하게 되고, 중앙에 모신 성체를 통해 이곳이 그리스도의 몸 된 곳임을 기억하게 되죠. 또 마리아와 십자가를 통해 그가 육신을 통해 오신 여자의 아들이며, 또 고통을 당해 돌아가신 분임을 알 수 있죠. 제가 보기에는 개신교인들이 이 모든 상징들을 너무 제거해서 도대체 무엇을 믿는지 신자들이 당황스러워 하진 않을지 걱정되더군요.”

 

1. 바른 성전 신앙

그런데 우리 개신교회는 성전의 의미를 이러한 건물에 두지 않고, 본질적으로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그 곳이 바로 성전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면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성전, 성막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임재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 말씀으로 임재하십니다. 모세와 여호와 하나님은 대화를 하셨습니다. 또 십계명을 주셨죠. 그리고 성막과 성전에는 반드시 그 중앙에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말씀을 듣는 백성이라야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는 뜻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개혁교회에서도 세 가지 말씀을 모십니다. 하나는 성경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성찬례를 통해 모시는 예수님의 몸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신령한 예식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선포되어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사자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말씀을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영으로 임재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말씀 가운데 영으로 임재하십니다만.. 보다 구체적인 영으로의 임재를 말합니다. 성경에는 구름 가운데 임재한 하나님에 대해 여러 번 표현됩니다. 왕상8:10에도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눅21장 묵시록에 구름타고 오시는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만 이것 역시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의미한다고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단들의 인구름이니 떼구름이니 하는 말에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쨋든 우리가 12절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예측할 수 있습니다만.. 12절에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말씀하셨사오나..” 를 보시면,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위대한 광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을 위해 어둠에 은혜롭게 둘러 싸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는 믿음이 있던 당시에는 이처럼 신비로운, 알 수 없는, 무소부재의 하나님 존재를 ‘어둠 속에 광채’로 표현했던 것이죠.

그래서 제사장들은 그 영광의 임재를 경험할 때 감히 감당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재로 인간에게 드러나셨고, 기꺼이 인간이 지은 성전에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정성으로 하나님을 바라면 우리 가운데에도 하나님이 임하시는 줄 믿습니다. 더럽고 죄 많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은 기꺼이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마음껏 자신을 우리를 통해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크게 역사하는 이치는 마치 세상에 가장 큰 절망을 만난 사람에게 발견되어 지는 소망의 하나님과도 같은 것일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시면서 우리를 통해 점점 먼 곳까지 그 은혜를 드러내길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그 일들이 순조로울 것이란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차분히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늘려야 할 것입니다. 가만히 주님을 바라보도록, 우리 안에 또 주변에서 그리고 성서와 교회에서 찾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 기도하고, 또 하나님의 영을 정당하게 초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믿음을 보시고 반드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 신비한 체험을 통해 신자는 다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신비 안에 충분히 머무십시오. 그리고 머물렀다면 행동하셔야 합니다.

세 번째, 사건으로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사건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하늘은 열렸습니다. 불신앙과 죄악으로 살던 인생도 예수님을 영접하니까 하늘이 열렸습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의 구원의 사건 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쓰러져 가고 죽어가는 교회들이 다시 영적으로 각성할 때 그 회복의 사건 중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던 것입니다. 영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증거이자, 하나님께 사용되고 있다는 증표인 것입니다. 또한 영은 내가 부리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초대되는 것이고 사귐이 있는 비밀이 있기에 우리 안에서 날마다 그 모양과 성질을 달리하며, 성장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까운 곳에서부터 역사하는 영은 점차 먼 곳으로 역사되어야 합니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이웃과 이웃 나라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나로부터 시작해서 사회를 건강하게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죽음위에 임재하시고, 하나님은 사랑의 행위 위에 임재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간절히 환자의 고침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환자의 아픔을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늘 우리의 사건들을 통해 또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드디어 성전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성전이 참 성전이 되려면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셔야 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이 완공된 후 언약궤를 지성소로 메어 왔습니다. 그리고 성전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게 임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하나님이 온전히 좌정하셔서 왕으로 사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 가장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고 모셔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2. 성전을 통해 받는 복

 

오늘 읽은 본문은 솔로몬은 웅장한 성전을 지었지만 그 성전이 하나님을 모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왕상8:27~30 읽어볼까요) 그래서 그는 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하늘에서 들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복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또 전쟁에서 패했을 때나 이방에 잡혀 갔을 때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늘에서 들으시고 응답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후로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기도대로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이 되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하루 세 번 기도할 때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한 것은 이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봉헌식을 거행하면서 너무 좋아서 7일에다 7일을 더해서 14일간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한 성전에는 모든 백성들의 번제와 소제와 감사제물이 넘쳤습니다. 봉헌식을 마치고 가는 백성들에게 솔로몬은 축복하였고 백성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하였습니다.

 

마무리

하나님의 임재는 나로부터, 내 가정으로부터, 내 교회로부터, 내 나라로부터 점점 멀리 나타나야 합니다. 주변의 이방인들에게도 솔로몬의 성전은 기도의 처가 되었습니다. 멀리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상상하며 하나님께 기도만 하여도 응답이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왜 교회에 나와야 할까요? 만일 이 건물이 필요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가정이나 광장 같은 곳에서만 모여 예배를 드리고 흩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바로 믿지 않는 이방인과 연약한 사람들을 위한 장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구암교회가 용지 지역민의 기도의 둘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소망의 둘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목사 없는 교회라서 못 나오겠다고 하는 분이 계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니 나오시라고.

하나님은 영이시니 시험을 당하지 않고, 멸시를 당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모든 깊은 곳까지 감찰하시는 분임을 늘 잊지 마시고, 가까운 곳에서 점점 먼 곳으로 우리의 믿음과 축복과 성전의 신앙이 날마다 퍼져 나가길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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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는 양들과 더불어 산다.(요10:11~15)

먼저 감사합니다.

들어가는 말

히브리어로 학카톤은 막내, 최하급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학카톤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갔을 때 다윗을 부르던 아버지와 형들의 말이고, 소외된 이웃을 바라보며 지어낸 세상의 말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초원이라 불리는 소외의 자리에서 목동을 했고, 모세 역시 나이 마흔에 떠난 광야에서 목동을 했습니다. 누구도 찾지 않는 소외된 자리에서 오직 양들만을 돌보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은 그 소외의 자리에서 이들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새끼 양 한 마리를 되찾기 위해 사자와 곰을 상대로 물맷돌을 던질 때 그를 찾아가셨고, 모세가 40년이나 성실히 목자의 삶을 살았을 때 비로소 그에게 찾아가신 것이죠.

이와 같은 사실은 들사람에 불과했던 히브리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무엇인가 있는 사람으로 여기시고, 사용하신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고,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곳에 있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1. 소외의 자리에서 부름 받은 종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다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선하다는 것은 좋다, 온전하다 라는 뜻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선한 목자란 삯꾼과 달리 양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으며, 자신의 목숨도 돌보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장로님이 오랜 시무로 스트레스가 쌓여, 휴무를 하실 때였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교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일 년이란 시간을 보내실 때 불현듯 마음에 이런 감동이 몰려왔다고 합니다. 성도들과 함께였을 때는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기만 하더라도 살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성도들과의 거리를 두고 떠나자, 마음에 한없는 허무함이 밀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힘들어했던 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향한 계획이자, 훈련이었음을 다시 감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장로라는 직분은 늘 성도들과 함께 하는 자리입니다. 성도들의 대표로서 매우 명예롭고 의미 있는 직분인 동시에 일반 성도들이 알 수 없는 지독한 소외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일을 두고 남모르게 하나님께만 물어야 할 일이 적지 않으며, 앞에서는 칭찬하지만, 바로 뒤돌아서 자신들을 욕하는 성도들을 경험하기라도 한다면 그 날 밤은 억울함에 잠도 못 자는 자리인 것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쉴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소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일 것입니다. 은혜는 수고할 때 부어집니다. 은혜는 인내할 때 부어지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작은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목자는 양과 더불어 살며 힘을 얻어 살아갑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대로 목자는 매일 양들을 돌보고 먹여야 하는 평범한 일상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교인을 심방하고, 돌보는 일이 그러한 것이죠. 누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때로는 이 단순하지만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해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돌볼 때 기쁨을 얻는 사람입니다. 목자는 개성 없어 보이는 양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사람입니다. 목자는 점차 양들의 몸에 드러난 상처와 흠으로 양들을 구분하게 됩니다. 외관을 보면 모두 하얀 양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겪은 상처와 아픔은 이들을 돌보는 목자의 관점을 다른 것으로 바꿔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목자는 양들과 더불어 살며, 그들의 상처와 아픔으로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할 때 양들도 목자를 기억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할 때 성도님들도 여러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목자는 양들을 지켜야 하는 특별한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목장 안에 숨어 들어온 이리떼를 물리쳐야 하며 양들을 도둑질하거나 물어가는 일이 없도록 울타리를 보수해야 합니다. 동시에 사자나 곰이 양들을 채 갔을 때 목숨을 걸고 양들을 되찾아 와야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일반적으로 목자는 지팡이를 가지고 다닙니다. 지팡이는 들짐승을 겁줄 때 사용되거나 양들의 키를 살필 때 제는 자로도 사용됩니다. 한 마리 한 마리 그 수를 세어 지팡이에 세기기도 하며, 무엇보다 지팡이는 구렁에 빠진 양들의 목을 걸어 양들을 구원해내는데 사용되는 요긴한 물건인 것입니다. 목자는 이리떼를 물리쳐야 하지만, 동시에 양들을 건져내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특별한 때에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어떤 능력도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할 때 한 마리의 양을 얻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양이 울타리 안에 있다고 한 들, 울타리 안에 노략질 하는 무리가 있다면 그 목장은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자는 틈틈이 힘을 키우고, 목장의 상황을 분별하는 능력을 갖도록 힘써야 합니다. 일의 결정에 있어서는 교회를 위한 선택을 먼저 해야 하고, 반대로 작은 한 사람 한 영혼을 위해 교회를 설득해야 하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자는 복잡한 현대사회 안에서 퇴색 되버린 옛 유산이 아니라 오히려 복잡한 현대 사회에 더욱 필요한 사명이 되었습니다. 목자는 소 떼에 마음을 두며,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는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이 자세를 회복할 때 속한 교회가 날마다 부흥하고 건강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목자의 자세와 본질입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는 선한 목자입니다. 저는 이 말 속에서 예수님으로부터의 어떤 스트레스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는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 놓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었지만, 그것이 곧 스트레스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저만 보더라도 적지 않은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등지고 멀리 외곽으로 외출을 나갈 때도 있었습니다만, 어느 순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목자는 양과 더불어 산다!

 

장로는 매우 귀하고 존엄한 직분입니다. 교회의 지도자이며, 목사님과 함께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일인지라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스트레스의 원인이 나를 몰라주는 성도님들 때문인 경우가 있음을 돌아봅니다. 교회의 사정을 속 시원히 이야기하지 못한 체 일을 진행하는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이를 오해해서 장로님들을 힐난하는 성도님들을 대하실 때 낙심도 됩니다. 그러나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 말씀과 같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 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시는 일이 주님 안에서 이뤄진 일이라면 반드시 적지 않은 성도님들이 여러분의 뜻에 동의하고, 언제든지 함께 할 것이란 사실을 믿으셔야만 합니다.

내가 먼저 성도님들을 믿을 때 믿음이 내게도 돌아오는 줄로 믿습니다.

내가 먼저 믿어주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 어느 누구도 나를 따르거나 믿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원하는 기준은 때로는 매우 높고, 부자유스러워 보이지만, 돌아보면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속사정을 이야기한다면 이해되지 못할 문제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기꺼이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사랑하면 버리게 됩니다. 사랑하면 서로의 음성을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먼저 사랑하고, 먼저 다가가는 목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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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5:4~8/눅6:32~36 -

 

들어가는 말

(사람은 자기가 잘못이었다고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오늘의 자기는 어제의 자기보다 더 현명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 알렉산더 포우프.)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원하든 원치 않던 사람은 시행착오의 동물이 분명한 것이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자신의 시행착오를 수정하기보다 그대로 밀고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미련하다라고도 하고, 어리석다라고도’하는 것이죠. 그리고 대부분의 이러한 미련함과 어리석음은 크게 ‘두려움’과‘분노’와 연관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분노는 삶에 대한 도전과 극복보다는 그 자리에 안주하게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분노와 두려움이란 첫 번째 감정은 믿음 안에서 극복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요셉은 바로 이 첫 번째 감정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반 평생을 절망과 두려움을 마주보고 살았고, 드디어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온 가족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통해 신앙이 한 층 성숙되어지는 귀한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두 번째 감정을 배우기까지-이야기 속으로

먼저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죠.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총애를 받은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에게 화가 나있었고, 분노한 형들은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리게 되죠. 그리고 아버지에게 요셉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그렇게 가족들에게 잊혀 지게 된 것이죠. 요셉은 이집트에 가서 몇 년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됩니다만 이후에 권력을 잡게 되고, 이집트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총리가 됩니다.

수년 후 요셉은 가난하고 굶주린 가족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기회를 얻습니다. 가족들은 요셉이 누군지 알지 못했지만 그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마침내 요셉이 자신을 형들에게 드러냈을 때, 그들은 요셉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알아 보았을 때 형들은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요. 요셉은 해결해야 할 많은 분노와 원한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이제 마음만 먹으면 그들을 추방하거나 죽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사랑과 증오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사적인 사람이었다고만 한다면, 성경은 그의 원한을 푸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을 겁니다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개인의 감정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요셉의 형들은 그를 학대했고, 요셉은 뒤 늦게라도 이 원한 관계를 풀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요셉은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요셉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숨겨진, 이해할 수 없는, 해결되지 않는 목적을 기꺼이 수용하게 된 것이죠.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이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사람. 그래서 인내하고 그래서 도전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도 자신에게 일어난 첫 번째 분노의 감정을 부인했고 하나님의 목적을 존중하고, 그에 반응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내가 요셉이요’ 라고 가족들에게 말한 후에 두 가지를 행했습니다.

 

①하나는 형들에게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시작한 두려움, 증오, 폭력이라는 악순환을 이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큰 자신을 향한 삶을 향한 목적이 있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향하신 큰 계획이 있음을 믿게 된 후에야 이 모든 악순환을 끊게 된 것이죠.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생각보다 더 큰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믿음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기도 하며, 때로는 초인적인 심성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감당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바른 판단을 하도록 도우며, 자신을 부인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하는 형통의 길목임이 분명합니다.

누가 이 길목에 서서 형통을 노래할 것인가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몫인 것입니다. 아무리 큰 불행과 대적들이 덤빌지라도 길목을 지키는 병사는 쉽게 이것들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의 길목에서 불행을 이겨낼 수 있는 파수꾼이 될 것입니다.

 

②두 번째는 요셉은 형들에게 왜 그가 그토록 자비롭고 예상 밖의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세 번씩이나 이 이유를 말해줍니다.

①먼저는 5절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입니다.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②두 번째는 7절에 하나님은 당신들을 위해 남은 자를 보존하기 위해 당신들보다 앞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③세 번째는 9절에 나를 여기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의 첫 번째 감정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두 번째 감정으로 변화됩니다. 분노와 좌절의 쓴 상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할 때 비로소 녹아 집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순간을 위해 내게 지난 과거를 허락하셨고, 보내셨다는 깨우침은 삶의 어떤 동기보다 더 강력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아이들의 상담사가 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가난한 한 청년이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청년들에게 용기를 주는 기업가가 된 경우가 그렇습니다. 목회에 실패했으나 이를 극복한 목회자가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버려지는 과거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과거를 불행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는 사람보다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오늘을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도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하는 사람인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를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도무지 변화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공동체에, 인생들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지금까지 모든 불행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던 사람들이 자신 안에서 원인을 찾기 시작합니다.

쓸모없는 인생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니까 쓸모 있는 인생이 됩니다. 거리의 여인들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가난하고 병든 인생들이 자신의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병 고침을 간구하는 인생이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이의 병을 낫게 합니다.

인생 역전의 기적이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 안에 일어난 첫 번째의 분노와 좌절의 포기를 꺽어 버린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두 번째의 섭리로 여러분을 세우실 것입니다.

/반 쉬고/

여러분은 지금 자신이 쥔 것이 한 웅큼의 사탕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어려움을 사탕으로 달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한 잔의 술로 달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닥친 불행과 어려움을 나의 문제로 해결해보려고 한 들 어떤 능력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세상의 큼을 저와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내 손으로 뭔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바꿀 수 있고, 내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고칠 수 있는 병이라면 가능합니다. 좋은 의사를 만나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문제이자. 내 안의 영적인 질병이라면 다른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을 팔았습니다. 그들 안의 시기와 원망이 동생마저 팔아넘긴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인정할 수 없는 죄악과 연약함이 숨어 있습니다. 그 연약함은 끊임없이 우리를 죄를 짓게 만들고, 우리를 떠들게 만들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참여한 사람은 달라집니다. 더 이상 떠들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나의 불행 때문에 눈물지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움켜쥐고 삽니다. 증오도 움켜쥐고 살며, 미움과 두려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하고자 가족들보다 먼저 이집트 땅에 나를 보낸 것이고, 남은 자를 보존하기 위해 나를 보낸 것이며, 나를 보낸 것은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과 같이 저와 여러분을 믿음의 자리로 밀어내셨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첫 번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동생을 밀어냈지만, 요셉은 형들의 첫 번째 감정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셨음을 인정했습니다.

인정하니까..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인정하니까.. 내 안에 좌절과 상처가 회복되었습니다. 깊은 절망은 어쩌면 순수한 바램에서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간절히 바랬던 일이 무너질 때 그렇습니다. 당연히 될 줄 알았던 일이 무너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첫 번째의 절망이란 감정은 두 번째의 잔으로 옮겨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섭리라는 잔인 것입니다.

/쉬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섭리에 참여함이란 다음의 증거가 나타납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으로의 회복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깊이 절망한 후 하나님 앞에 다시 앉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를 들어, 세상이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을 안 청년의 기도는 어떨까요? 믿음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전도자의 기도가 어떨까요? 사랑하는 가족의 질병조차 낫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보호자의 기도는 어떨까요?

아마도.. 이럴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당신께 무릎을 꿇는 것이 매우 낯선 행동이긴 하지만, 제발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십시오.”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은 간절한 소원과 겸손의 자세를 만나야 합니다. 간절한 소원과 겸손은 머리가 경험하는 현실과 부딪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지, 정, 의” 세 가지가 함께 하나님께 굴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좌절한 심령은 다음의 기도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당신께서 이룰 수 있는 일이 더 많음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무능하셔서 이 세상에 손을 대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하나님이 힘써 노력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 저의 눈 멈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이제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저를 당신이 필요한 곳으로 보내주옵소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가끔 여러분이 겪는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으로 온전하게 하며,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신앙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신앙은 관대한 것입니다. 분노와 실패의 첫 번째 감정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실패했다는 것이 때로는 하나님 입장에서의 성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지금의 불행과 어려움은 다시 만나게 될 하나님 안에서 큰 상급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뭔가를 장악하고, 움켜쥐려는 마음을 내려놔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총리가 된 요셉에게 가장 먼저 상실을 경험하도록 했습니다. 가족으로부터의 배신, 자유의 박탈, 모함 때문에 그의 명예는 먹칠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이 모든 박탈과 불행이 “남은 자를 구하고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지금 불행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뜻에 귀 기울어야만 할 것입니다.

 

나가는 말/마무리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과 하나님의 섭리와 요셉의 두 번째 감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시기와 원망이라는 첫 번째 감정으로 요셉을 버렸지만, 요셉은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하나님이 주신 두 번째의 감정으로 이를 극복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관대하시고, 우리의 생각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시며,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좌절과 불행은 다음의 기도로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당신께서 이룰 수 있는 일이 더 많음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도구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야 사용됩니다. 좋은 도구는 주인을 헤치지 않으며, 주인의 말에 순종합니다. 좌절과 시련은 내가 하나님의 도구란 사실에서 도망치게 하거나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게 합니다.

우리는 분노와 두려움과 같은 첫 번째 감정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저와 여러분을 속일지라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섭리 안에서 두 번째 감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감정은 믿음이고, 겸허인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불행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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