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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그리스도를 본받아1(전1:8)

들어가며

신대원 시절 필독서로 읽었던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란 책이 있습니다. 캠피스 출신의 토마스란 뜻이 이 책 저자의 이름인데 그는 1380년에 시골에서 태어났으며, 수도원에서 평생을 살았던 수도자였습니다. 이 책은 천로역정과 고백록과 함께 3대 기독교 고전에 속한 책인데,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유익한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 있어서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읽어 볼 책 중에 하나입니다.

이번부터 오후에는 성경과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것들을 연결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의 글은 토마스의 것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1. 소금물

소금물이란 제목을 들으셨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짜다. 상하지 않는다. 눈으로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맹물보다 밀도가 높다.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금물을 한 컵 이상 마시라면 어떨까요? 아마도 이 물을 아무렇지 않게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음식이나 사람에게나 적당한 양 이상이 들어가면 바로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이 소금물입니다. 분명 염분을 보충해주고, 음식을 상하게는 하지 않지만, 이것이 좋다고 이 물만 먹고 살 사람은 없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을 조금 더 강박적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에 가슴에 뜨거움을 체험했을 때 앞에 선 강사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항상 성령 충만하셔야 합니다.” 저는 이 말처럼 부담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담임목사님께 여쭤봤어요. 어떻게 항상 성령 충만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담임목사님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라고 대답하시더군요.

그런데 저는 저도 모르게 집요하게 그 ‘거룩과 성령충만’이란 단어에 몰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아는 한 최대한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한 시간들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오히려 제 삶에 붉은 신호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첫째는 관계의 훼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세상은 너무나도 차이가 나 보였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도 가려서 만나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일반인들과의 정상적인 대화가 어려워서 답답한 적도 있었고,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을 피해 그야말로 ‘깨끗하게 살았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기쁨이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저는 절대로 ‘거룩함 자체’로 살 수가 없었고, 두 번째는 사람들과의 건강한 교재를 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죠. 심지어 좋아하는 이성이 있었는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고백을 하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그 작은 후배가 이런 저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본 날이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납니다.

 

두 번째는 인격의 훼손입니다. 그런 시간들이 길어지자. 저도 모르게 어떤 내적인 자만심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거룩함은 거룩한 표정과 행동으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거룩함 자체에서 나오는 능력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가식적인 행동은 꼭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도 모르게 그게 편함으로 가식적인 행동들이 저를 감춰지게 했던 것이죠. 그러나 어떤 식의 가면도 건강한 인격을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로 가면은 이면의 나를 가려주기보다 오히려 더욱 부패하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찢어진 보리자루처럼 시도 때도 없이 나의 연약함을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과 내가 다를 바 없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정상적으로 갖기 까지는 이 인격 장애를 고치기 위해 애썼던 기억이 납니다. 신앙은 인격 장애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보다 하나님 앞에 나은 사람이 많은 것이 하나님 보시기엔 더욱 수지맞는 장사란 사실입니다.”

토마스는 그의 책에서 이런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말합니다.

「 우리는 모두 연약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보다 더 연약한 사람은 없다는 생각을 굳게 지켜내야 합니다.(창8:21-노아제사, 이는 인간이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그리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더 공공연히 죄를 짓거나 흉악한 죄를 짓더라도 당신이 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당신이 죄를 짓지 않는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저는 연약함이 부끄러움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연약함은 죄와 연관이 있습니다. 가벼운 죄책감이 드는 것은 바람 같을 수 있지만, 저는 죄가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언제고 한 번은 죄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과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합니다.

그래서 죄가 있거나 죄성이 있다고 해서 그 죄가 나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만 죄의 뿌리가 얼마나 제 깊숙한 곳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알면 알수록 저는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과연 누가 있어 이 죄에서 자유할 수 있을까란 한탄이나왔었죠.

그런데 창세기8:21절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악하므로, 삭제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시는 땅을 물로써 심판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하다고 삭제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에 더욱 안타까워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할을 무엇일까요? 바로 서비스(인사, 마땅히 해야할 일) 하나님을 만나는 것. 예배이며 동행인 줄로 믿습니다.

 

2. 자신을 헤아려 보는 지혜

어떤 산골에 감자 농사를 짓는 한 농부가 거친 손을 하고는 하나님께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렸습니다. 평소에 글도 모르고, 고생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얼굴을 한 노인은 그러나 뭔가를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한 화가가 그의 손을 스케치하고, 색을 입혀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자 그의 친구가 말합니다. 자네 그림에는 온통 거친 흔적만 있는 손만 그려져 있을 뿐이군. 도대체 누가 이런 손을 가진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인가?

그러자 그 화가는 말했습니다.

“자네의 기도하지 않는 부드러운 손보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림의 손을 더욱 사랑할 것일세.”

 

기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도록 만듭니다. 기도할 때 보통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모읍니다. 생각과 마음을 모을 때 ‘내가 기도해야 할 제목’이 분명히 생각이 나고, 분명한 생각은 분명한 목적과 방법까지 우리의 생각줄을 이끌어 가죠.

그리고 기도의 가장 큰 능력은 역시 ‘가장 큰 공부’를 가능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토마스는 가장 큰 공부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을 잘 알고 헤아려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어쩌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이유가 무엇일까 확인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을 만한 이유가 매우 적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눈물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때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토마스는 겸손한 농부의 기도가 우주 전체를 알려고 애쓰는 교만한 철학자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스스로를 낮게 여기며 사람의 칭찬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세상 만물을 다 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행실에 따라 나를 심판하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

 

공부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의 하는 일이 이런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공부의 목적은 남들에게 유식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순수하게 지키는데 있습니다.

중국에서 공부는 쿵푸입니다. 즉 삶의 모든 기술과 연마가 다 공부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공부는 오직 대입과 취업, 고시 시험이 전부입니다. 방학이면 아이들에게 고액과외를 시키는 부모는 있어도 해외연수나 여행을 보내는 일에 돈을 쓰는 부모는 적습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은 오히려 풍파 가운데 더욱 단단해지기도 합니다. 영혼의 공부는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아버지를 보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과유불급입니다. 모든 것이 과도하게 공급됩니다. 수단이 목적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로 시작해서, 예배로 불려 지는 쇼의 연예인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교사로 시작해서, 아이들에게 학원강사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소금물처럼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들입니다. 예배 중에도 분명 쇼맨십이 필요할 때가 있고, 문제 풀이 중에는 분명 학원 강사처럼 명확하게 핵심을 짚어 낼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모두 조금씩 조금씩 ‘소금물’을 필요 이상으로 들이키며, 그 쓴 물을 참아내는 것만 배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습니다.(전1:8) 전도서의 솔로몬이 기록한 지혜의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마셔도 목이 타는 욕망과 삼켜도 만족이 없는 교만이 아닌 하나님 앞에 믿음과 지식에 절제를 더하여 살아가시는 생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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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잎만 아니라 열매를(마21장18절~22절)

 

들어가는 말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저와 여러분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되곤 합니다.

그래서 신학을 할 때 가장 먼저는 성경에 나오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 즉 세계관을 깨우치는 것이 첫 걸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죠.

그리고 세계관이란 적어도 예수님과 같은 눈을 갖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눈은 여러 사람을 통해 반복되어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우리의 삶과 하나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직 고난당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겪는 어려움들을 예수님께서는 해결하실 수 있는데, 이유는 그분도 우리와 같이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고통을 치료하는 길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버린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찾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찾은 것이죠. 그러나 결국 모두에게 허락된 구원의 길이 겨우 ‘일부’에게만 믿어지는 사실을 여러분 목격하게 됩니다. 그만큼 믿음은 억지로도, 예수님의 눈 역시 억지로도 가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죠.

 

1. 세상의 문제를 어떻게 대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속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적어도 저와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우리를 도우시고,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갑작스런 불행들은 우리를 당혹하게 하며, 하나님께 다음의 질문을 갖게 만듭니다.

“왜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호해주시지 않는가?”

 

그리고 심지어 신앙생활을 더 하다보면 다음의 사실을 깨닫고는 더욱 놀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그런 보호를 제공하시지 않는다.”

왜? 하나님은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심지어 아들까지도 잃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은 곧 결심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없을 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며 믿음을 등한시 하는 경우이고 다른 한 부류는 인생은 언제나 명확하게 이해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야 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경우입니다.

 

물론 언젠가 우리도 죽을 것이고, 삶은 끝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지금’과 ‘여기’의 관점으로만 해석할 수 없음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적지 않은 문제들을 풀기보다 그저 외면하거나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말 속에서 우리가 풀어낼 수 있는 일과 풀지 못하는 일을 구분해야 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함도 배우게 됩니다.

 

2. 있는 그대로 바라보신 예수

저는 생각보다 많은 가정들이 또 교회들이 바로 이 ‘풀리지 않는 문제’를 그대로 안고 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리고 이 어쩔 수 없음을 통해 사실 더 많은 것들을 배워가곤 합니다.

먼저는 있는 그대로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훈련입니다. 사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평생 이 노력을 쉬지 말아야 함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저에게도 밝히지 못하는 아픈 일이 있고, 또 여러분에게도 그런 일들이 한 두 개쯤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판단이 싫어서 쉬쉬하며, 자기 가족의 치부를 감추는 일도 있을 수 있고, 또 저 사람만 아니면 우리가 행복할텐데 하며 마음 힘들어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는 요즘 저의 아버지의 달라진 모습을 경험합니다. 예전에 아버지와 저는 상극이었습니다. 보통 분이 아니시므로 이 분을 대하는 것 역시 보통으로 대해서는 안되었죠.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세월의 무게로 다만 약해진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저를 의지하고, 제게 삶의 소소한 것들을 일러바치는 것들을 경험합니다. 분명히 아버지는 제게 감추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이젠 제게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참았고, 상대보다 조금 낮은 언덕이 되어 드렸더니, 이젠 제게 기대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실은 저와 여러분만 아는 비밀입니다. 아버지가 들으시면 서운해하실 수 있거든요. ^^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광활한 광야생활이자, 거대한 믹서기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질과 성품이 다른 각기 다른 인생들이 주님 안에서 다듬어지고, 제 맛을 낼 때까지 연단되는 연단의 장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때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경기의 룰은 다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적어도 신앙 안에서 가족이라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바라보셨습니다. 물론 다음의 태도로 말입니다.

 

그건 사랑이었습니다. 약한 자와 어려운 일에 빠진 사람을 도우시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내신 예수님의 삶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환자들의 몸 뿐 아니라 마음의 질병도 치료하셨고, 분명 죄를 지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필요를 분명히 아시고, 내면으로부터의 치유를 통해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풀리지 않는 문제들도 예수님을 만나면 해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시고 힘껏 끌어안으시는 사랑을 통해 해결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곧 정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이 정의입니다. 때리는 사람 앞에서 맞는 사람을 안고 울며 대적하는 것은 사랑이지만 동시에 정의입니다.

마찬가지로 때렸던 사람이 맞는 사람을 거짓으로 안고 우는 것을 불의한 일로 드러내는 것 역시 정의이자 맞은 사람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란 이처럼 상대를 이해하는 귀한 삶의 태도이기도 하지만, 어둠을 어둠으로, 빛을 빛으로 바라보는 행동이자 사랑 없는 곳에 사랑을 공급하기 위한 노력임을 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때문에 공동체는 항상 신뢰와 사랑이 모든 관계의 기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시선

마태복음 21장 18-20의 오늘 본문에서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시는 죄 없으신 예수님의 뜨거운 시선”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18절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숙청하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눈은 이날 오후에 있을 숙청을 위해 무너질 예루살렘에 대한 연민과 거룩한 분노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날 이른 아침. 베다니 마을에서 성으로 들어오실 때 배가 고프신 예수님께 나무 한그루가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나무가 서 있습니다. 감람나무가 이스라엘의 종교적 상징이라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자체를 의미합니다. 무화과 나무가 열매와 잎을 동시에 내는 식물임을 알 때 이상하게도 이 나무는 잎은 무성했지만 열매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형적입니다. 때가 되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입니다. 마치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길에 여전히 구경꾼으로 아무런 영적인 열매도 맺지 못 한체 서 있는 이스라엘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은 전 날로부터의 배고픔이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더 큰 배고픔 때문에 더욱 허기졌을 것입니다. 바로 영적인 주림일 것입니다. 자신의 사역이 마쳐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예루살렘 성은 장사를 하며, 성전에서는 여전히 제사가 있었고, 아이들은 회당에 가고, 여자들은 집안일이며 물 긷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닥친 종말에도 불구하고, 성안의 주민들은 이를 알 수도 또 알아도 다가서지 못할 일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열매 맺지 못하는 ‘자신들이 바꿀 수 없는 세상에 갇혀’ 살아가는 인생들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이때 진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이 길가에 선 무화나나무에 멈춰 선 것입니다. 잎만 무성할 뿐 어떤 신앙적 열매도 이뤄내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예수님은 저주를 하십니다.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영적인 저주를 하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적인 고갈의 상태. 영적인 기갈이 백성에게 임할 것이나, 이 백성이 그 허덕임을 해결하지 못한 체 정녕 죽으리란 안타까움의 저주였습니다. 죄를 향한 저주였습니다. “죄에 갇혀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이스라엘”을 향한 예수님의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눈물

역사는 주후70년 예루살렘 성이 철저히 무너지고, 모든 백성들이 잔인하게 죽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1-44절에서 예수님은 그렇게 될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때 예수님의 눈물은 연민이었습니다. 동시에 앞으로 직면하게 될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부딪친 한계였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본 다는 것은 이처럼 죽어가는 것들을 위해 우는 것이며, 살고자 하는 이들을 살리는 것이며, 어둠에 관해서는 저주하는 것이고 철저하게 나의 한계를 깨달아 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5. 다시 돌아가자

그리고 한계를 깨닫는 것이 곧 좌절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계를 깨닫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우리의 관심을 돌리게 합니다. 한계를 깨닫는 것은 우리 가운데 있는 거짓된 생각들로부터의 자유를 선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체와 주변에서 “세상은 냉정하게 사는 사람의 것이며, 결코 꿈꾸는 자의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또, 꿈꾸는 자는 실패하고, 사는 대로 사는 자들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꿈꾸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사는 대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사는 일에 밑줄을 쳤던 분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물음표를 던지신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완전한 타락과 이 세상의 완전한 실패에 대해 선언하셨습니다. 도무지 인간의 힘으로는 이 세상의 굴레를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음을 완벽하게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한 패배를 보여주셨고, 완전한 실패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실패가 곧 하나님의 실패는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었던 아들을 세상 가운데서 살려내시고, 그가 옳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쉬고/

 

자가를 알기 전까지 알콜중독에 삶에 대한 무의미로 괴로워하던 한 남자가 드디어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날 예수님은 그 남자의 가슴에 크게 외치셨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이미 끝났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남자는 좌절대신 오히려 마음에 평강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동안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어떻게든 세상에 맞추려던 그의 쪄든 영혼이 어떤 시원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 이미 세상은 끝났어. 하나님께서 이미 심판하셨지.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전까진 도저히 세상을 이길 힘도 방법도 알지 못했던 남자가 다시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하늘 소망을 갖고 달려가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여러분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속이기를 여러분이 넘어질 때까지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함께 지금 여러분의 현실을 못 박으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모든 행실이 죽은 행실이었으며, 이 땅 위에 모든 것이 무용했음을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다시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밝히시며, 예전에 보이지 않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뇌는 수백억개의 환경 정보 중에서 고작 초당 2000개만을 저장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수백 억 개의 신경세포 중에서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의 중심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 대신 매일 고작 초당 2000개의 정보만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계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2000개 너머의 세상을 믿어 알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지 않았을 때 예수님의 죽음은 그저 내가 알고 있는 세상에 대한 정보 중 일부가 손상되었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죽음은 수백억 개의 가능성의 죽음이었고,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의 죽음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믿음이 없다는 것은 내가 여전히 한정된 정보에 갇혀 사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완고함입니다. 편협합니다. 세상을 사랑함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가능성을 열어내고, 저와 여러분의 삶을 더욱 충만하게 인도하여 낼 것입니다. 믿음은 자유를 선물할 것이며, 믿음은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회복시켜줄 것입니다.

 

나가는 말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3년 사역 동안, 3년에 한 번씩 잎과 열매를 동시에 내는 길가에 선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저 잎만 무성할 뿐.. 예수님께로 나오지도 못했고, 예수님께 믿음의 열매도 내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무지와 이성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알아 왔던 갇힌 사고와 가능성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의 나의 삶과 세상의 모든 것이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여러분에게 은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왜냐면 우리의 삶과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선포는 믿는 자에게는 새로운 각성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얼마 안 되는 내 생각을 내려놓고, 무궁한 가능성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잎만 아니라 열매를 내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새로운 열매를 맺기로 각오하는 믿음의 결단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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