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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16 20140817그저 사는 생활이냐 영생이냐(요12:24~26)오후예배

그저 사는 생활이냐 영생이냐(요12:24~26)

 

 

에디슨(T. A. Edison)은"필요는발명의어머니(Necessity is the mother of invention)."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뭔가 생활 가운데에서 필요한 것이 생기면 이것을 위해 연구하고, 결과물을 얻어낸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두우면 등을 발명해 어둠을 비추고, 내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녹음기를 발명하거나, 먼 거리를 달리기 위해 자동차를 개발하는 것이 바로 이런 필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이 필요들에 의해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터넷, 인간관계, 멋진 자동차, 금융 등 그 모든 것이 바로 이 ‘필요’ 때문에 생겼기 때문이죠.

그러나 현대사회가 인간이 욕구에 따라 살아가도록 잘 돕는 사회일지는 몰라도, 진정한 인간의 요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화>

서울에 고시원에 사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고시를 준비하는 청년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월 25만원짜리 쪽방에 세들어 사는 취업 준비생입니다. 이 학생은 어렷을 때 꿈이 화가였지만, 부모님이 사업에 실패하고, 지금은 홀로 서울에서 생활을 해가는 청년이 된 것이죠. 이 학생은 시급 5500원짜리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4시간을 근무하고 나면, 22000원을 얻을 수 있게 되는데, 한 달에 방세와 공과금을 이 아르바이트를 통해 충당하는 것이죠. 그리고 나머지 식대와 생활비를 위해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직장을 갖지는 못한다고 해요. 취업을 준비한다고는 하지만 꿈을 지키고, 꿈을 키울 수 있는 시간도 물질도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죠. 그야말로 지금의 필요를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활이 지속될 뿐입니다.

 

이번에는 어떤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주부가 아이를 낳고, 1년이 지나자 그 동안 남편과 모은 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해요. 맞벌이인 이 부부에게 고민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계산을 해보니까... 지금 버는 남편의 월급에서 딱 80만원만 더 벌으면 생활이 될 것 같아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고 해요. 그런데 교통비며 부대비용으로 50만원 이상이 들어가고, 아이 의탁과 돌보미 등으로 30만원 정도가 들어가니까.. 2살 된 아이를 돌보지 못한 대가로 벌고 남은 돈 80만원은.. 아이에 대한 미안함에 비하면..너무나 적은 돈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생활을 위해서만 살아가도록 시스템화된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소비적으로 착취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이 세상은 인간에게 적절한 일거리를 주고,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도록 해야 시장경제가 운영이 되니까.. 인간의 꿈이나 진정한 욕구보다 그야말로 시스템을 위해서 사람이 이용되는 구조가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 인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노동도 병들어버렸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을 포기해버렸다는 사실에서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이죠.

그야말로 필요에 따라 소비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자신의 순수한 동기를 위해서, 꿈을 지키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소비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이죠.

 

그러나 토마스는 말합니다. "나는 부당하게 나를 사랑하다가 나를 잃어버렸습니다.(요12:25) 그리고 오직 주님만을 찾을 때에 나 자신과 당신을 모두 찾았고, 그 사랑에 힘입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p174)"

영어로 Need는 욕구, 필요를 의미합니다. 그야말로 나의 필요, 내가 사랑하는 것을 위해 이 세상이 죄를 짓고, 우리 모두를 병들게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토마스 역시 이 모든 것이 실은 ‘나를 부당하게 나를 사랑하다가 천하보다 귀한 나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 말씀드리자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이 그대로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욕구나 필요 즉 ‘Need'를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은 필요’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영어로 Want는 내면으로부터의 진정한 필요. 또는 미래에 대한 요구를 말할 때 사용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환경에 따라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을 사모하도록 설계된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외부의 환경과 필요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니드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원트 즉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살도록 설계되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현대인들이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해 소비하는 것은 돈도 인간성도 아닌 어쩌면 더욱 중요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잃어버렸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원이란 무엇일까요?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과 부활로써 이루신 속죄를 믿음으로써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 3:36, 요 5:24, 롬 5:10, 엡 2:1-8).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진정한 생명이 되시는 것이죠(요 6:33, 요 14:6))

영생은 지금 내가 누리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지금 내가 기뻐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안타깝게도 그 삶은 영생을 누리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없는 것이죠. 이 영원한 생명력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인도해낸 하나님의 능력이고, 기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진 사람의 여유이고, 세상이 뭐라고 하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제 멋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한 농촌 마을에 두 가정이 이사를 왔습니다. 한 가정은 기획귀농을 했어요. 오자마자 땅을 사고 전원형 집을 딱 짓고, 자기 땅에 함부로 난 논두렁으로 가는 물길을 흙으로 딱 채워 막는 센스를 보여줬죠. 오자마다 밭을 사고, 그동안 도시에서 번 돈을 전부 쏟아부었죠.. 그리고 농촌에서도 최상의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애썼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도시생활을 농촌으로 옮겨온 것뿐이지.. 곧.. 파산하시고 서울로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가정은 거의 빈손으로 귀농을 했어요. 오자마자 흙집을 수리하고, 마당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그리고 작은 십자가종을 풍경대신 처마에 달아놓았어요.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묻자.. 농촌에 살려고 왔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저것 불편한 것이 많았지만, 품일을 나가며, 나중에는 마을에 학원이 없는 것을 알고, 자청해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은 일 때에는 일하고, 다른 때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몇 년이 지나 물었습니다. 지금 기쁘세요? 네, 기쁩니다.

 

이분은 도시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느 날 지금의 직업과 도시생활이 결코 신앙생활을 온전히 해낼 수 있도록 돕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물론 어느 곳이나 사람이 사는 곳은 다 같겠지만, 그분은 째는 예수님처럼 생명을 대하는 감수성을 갖고자 째는 도시가 잃어버린 노동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째는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라야 영생하도록 보전하신다는 말씀에 따라.. 경쟁과 소비와 무가치가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그야말로 좀 더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 농촌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저는 저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생을 좇는 삶을 쉽게 포기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유는 영생에 대해 잘 모르거나 지금 삶을 포기해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영생을 좇는 것이 당장 내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포기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을 누리셨고, 도전하셨습니다. 꿈꾸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인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처럼 도전하고 꿈꿔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꿈을 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땅 위에 썩어질 것을 심는 것을 말하지 않고, 하늘 위 영원한 것을 사모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삶을 말합니다. 이것은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생활과 다릅니다. 이 영생은 뜻을 좇아 살아가는 삶입니다.

저는 소망합니다. 단 한순간을 살아도 산 것 같이 산다면 나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저는 스스로를 천박함에 쳐 넣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제 삶이 구차해질 때 그렇습니다. 기쁨이 없을 때 그렇습니다. 실은 제가 생명을 만들어 내지 못할 때 그렇습니다.

 

천박함은 구차한 삶에서 나옵니다. 생명에서 멀어진 공동체나 사람일수록 ‘천박해집니다.’ 그러나 생명적 삶은 구차하지 않고, 떳떳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떳떳하셔야 합니다. 세상은 여러분의 정당한 노동조차 돈 앞에서 구차하도록 만들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이 흘리는 땀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산제사임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우상으로 여겨지는 맘몬 즉 돈과 권력에 굽신거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굽신거리지 않았고, 다만 생명이 무엇인지 드러내심으로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그야말로 욕구에 따라 자신을 낭비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을 따라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길 원했던 것입니다.

 

본문 25,26절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 사랑함으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나님을 따르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귀히 여기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은 우리의 모든 궁극적인 목표와 원함이 하나님께 있을 때 가능합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지금 이대로도 괜찮을까?” 나는 정말로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고, 영생의 사람을 위한 도전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생명은 건강이나 행복을 포함한 본래 하나님이 내게 설계한 뜻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꿈을 갖고 달려가는 것이란 꼭 판사나 대통령이나 부자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고, 실은 여러분에게 꼭 맞는 옷을 입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 이 땅이 줄 수 없는 평안과 행복, 참 기쁨(joyful) 그 영생을 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어른 세대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이분들의 신앙, 그리고 이 어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안에서의 꿈을 다시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또 어른들께서는 지난 시간 이 땅이 줄 수 없는 영생의 기쁨을 잃어 버리셨다면, 어서 이 기쁨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영생을 다시 소망하는 거룩한 꿈을 꾸시는 그런 귀한 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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