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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13 20140813아비얌과 아사(왕상15)_아사에게서 배우는 지혜

아비얌과 아사(왕상15)

 

들어가는 말

 

1. 하나님이 하나로 묶은 것

오늘 이야기에는 아비얌과 아사가 나옵니다. 우선 아비얌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15장 1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열여덟째 해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 성경은 북이스라엘의 왕의 통치 년도에 맞춰 남유다의 왕 아비얌의 등극 시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임금을 이렇게 묘사한 것은 이 두 나라가 서로 전쟁을 하여도, 결국 한 나라, 한 백성임을 말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인생은 하나님이 하나로 묶은 것을 인간이 어떻게 둘로 만드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비얌은 그의 아버지 르호보암이 행한 모든 악행을 그대로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권력을 사랑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져버린 경우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책임했습니다. 또 백성들 앞에 무책임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유다 공동체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세우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산 정상으로 가는 오솔길이 여러 갈래 일뿐 결국 정상은 하나가 아닌가. 진리를 두고, 여러 종교가 결국 분란을 멈추고 하나 아닌 가라는 무책임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도 무책임한 말입니다. 심지어 기독교에는 진리가 없다는 말은 무책임을 넘어 죄악에 가까운 말입니다.

아비얌의 아버지 르호보암은 하나님께 가는 길을 병들게 했습니다. 아세라 상과 우상숭배가 그 증거입니다.

그의 정치는 하나님 아닌 사람의 인기에 있었습니다. 인기를 얻고자 우상숭배를 하고, 그리고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예배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실제로 그들이 산당에 모여 행한 일은 우상숭배일 뿐입니다. 자신들이 그 전부터 믿어왔던 전통과 믿음으로 여호와의 얼굴을 가렸을 뿐입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신앙을 눈감아 주는 여로보암과 아비얌의 통치에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 유다 땅에서도 우상숭배가 이뤄졌습니다.(왕상14:23)

 

우리가 기독교 신앙 가운데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왜 당신들은 당신의 종교만 옳다고 말합니까? 당신은 왜 관용적이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에 대해 뭔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한 사람들의 신앙을 말합니다. 이 세상이 죄로 인해 온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에게 무책임하게 여기도 저기도 모든 것을 다 인정하라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인 것이죠. 그래서 다른 종교와 달리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가 틀어진 것을’ 죄라고 말하고, 그 죄 때문에 그 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그 죄가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대로 예수님만이 진리이고 구원의 길이라고 믿고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오히려 책임 있는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비얌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책임 있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한 가지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실은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나는 사람입니다. ” 그는 여러 사람의 인기를 얻고자 정치적 태도를 취했을 뿐. 생명과 신앙의 태도를 보이지는 못했습니다.

성경은 그의 태도와 다윗의 태도를 비교합니다. 15:3절에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다.”

다윗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죄를 깨닫는 마음이고, 자복하는 마음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일까..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이 자꾸만 생각이 납니다. 아무리 믿음을 지키려 해도 지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방 잊기 때문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사모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모해야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비얌은 그 신앙적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믿음을 잃음으로 3년이란 짧은 기간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아사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15:9) 아사는 아비얌을 이어 유다왕으로 세워집니다. 아사는 아비얌과 한 형제로 오해할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15:10절의 말씀입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라.. 그리고 그가 태후에서 쫓겨난 것으로 보아, 아사의 어머니가 확실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사는 마아가의 손자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우상숭배를 일삼던 할머니 마아가가 아비얌이 죽자 스스로 태후 즉 왕의 어머니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이스라엘을 전횡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사는 종교개혁과 더불어 할머니 마아가를 태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사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만든 사람이 되고, 아비얌과 마아가는 모자사이가 아니라 마치.. 어머니와 통간한 아들 관계처럼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습성을 볼 때 또 역사서는 마아가가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이와 같은 행위를 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사는 야비얌과 달리 41년이란 세월을 통치합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11절,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선 아비얌이 행했었던 남색하는 자들을 쫓아내고, 모든 우상을 제거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할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우상과 아세라 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태후의 위를 폐했다고 1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이 이룬 아세라 목을 찍어 기드론에서 불태웠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우선 아세라는 여성최고신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아세라와 우상은 따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아세라는 우상을 둘러쌓기 위해 만든 자연히 자란 나무가 아닌 ‘억지로 심어 놓은 나무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바알 제단을 허물고, 그 곁에 있는 나무들을 베어 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 역시 왜곡과 변질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신 것은 다 선하지만 인간은 이것을 왜곡한다.”라는 말이 떠 올랐습니다.

왜냐하면 “노아는 창세기 12:8,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합니다. 또 아브라함은 창21:33절에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에셀을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에셀은 아세라의 다른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 이젠 우상을 숭배하는 것으로 왜곡되거나 변질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왜곡으로부터 아사는 통치의 질서와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는 형 아비얌과 달리 무책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윗과 같이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친 할머니를 폐위하고 이스라엘의 정신을 지켜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할 수 있습니다. 혹시 그가 종교적 광기 때문에 냉정하게도 할머니를 내친 것일까요? 아니요. 그것이 나라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는 것임을 아사는 하나님을 통해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책임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사는 형 아비얌의 통치에서 또 어머니의 우상숭배가 어떻게 백성들을 병들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지게 하는지 봐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실 “우두머리”가 되 보기 전에는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 저건 저렇게 해야한다라고 말은 해도.. 막상 우두머리가 되면 이해관계들 때문에 쉽게 일을 처리하지는 못하는데..., 아사는 믿는 대로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상당히 놀라운 일입니다. 아사는 하나님 앞에 악행을 정리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의 통합을 원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통합은 이처럼 반드시 죄의 문제의 해결안에서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예화>-어떻게 아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가정환경이 좋지 못한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가족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아직 어리기에 그대로 참았고, 나중에는 스스로 생기는 분노를 잠재우는데 탁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집을 나선 들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답습된 습관은 시간이 지나 잊혀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에 늘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어른이 되버렸다고 합니다. 분명 옳지 못한 일인데도 자신도 모르게 이 일을 용인해버리거나, 심지어 입장이 뒤 바꾸는 일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다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성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경험한 세상은 분명 뛰쳐 나가고 싶은 현실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다시 불의와 타협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사도 이 사람과 다름없는 현실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죽자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종교개혁을 이루고, 할머니의 욕심과 종교 혼잡주의를 꺽었으며, 왕권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사에게 놀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개혁은 기존 현실와의 관계 사이에서 상당한 감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본토 친척 집을 떠나 할머니를 폐위하고 우상숭배와 구습을 끊어내는 노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끊임없이 누나로 속여 팔아먹은 왜곡된 모습들과 닮아 있는 할머니와 아비얌 왕의 불신앙과 처신들 속에서 지혜를 배워, 다시는 이런 것들과는 타협하지 않되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가길 원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곡된 왕정 가문에서 태어나 그가 결국 하나님 신앙으로 이겨낸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할 결단이 분명한 것이죠.

 

그래서 아사에게서 지혜를 배우면 어떨까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각 자의 환경에서 왜곡을 경험합니다. 왜곡은 비틀어짐을 말합니다. 선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마치 매 맞는 어머니 편에서 아버지에게 저항하지 못한 아이가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이 아이를 어떻게 할까요? 일단 빼내야 합니다.

계모에게 학대당하고도 계모와 잘못된 애착을 형성한 아이들의 예, 그리고 분명히 알려줘야 합니다. 무엇이 나쁘고, 니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와 같은 어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란 것을 알려주고, 그래도 세상에서 잘 살아야만 한다고 내공을 길러줘야 할 것입니다.)

 

아사 역시 왜곡된 사람들과 마주쳐야 하는 숙제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아사는 왜곡된 현실과 마주했습니다. 그래서 14절에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론 왜곡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현실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산당은 분명 왜곡되고 온전하지 못한 현실, 가정, 회사, 관계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사는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그 자비와 공의에 편에서 여호와 앞에 온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가 하나님을 통해 가능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타협이 아닙니다. 영적인 주도권을 하나님께 두고 있는 한 오히려 아사는 아직 치유되어야 할 왜곡된 현실을 남겨두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부모이고, 할머니이고, 이스라엘이며, 당시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완전해질 가능성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사는

첫째로 하나님과의 믿음 안에서 온전한 신앙 인격을 실현했으며, 따라서 왜곡과 진리를 구분할 수 있는 마음과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둘째로는 왜곡된 현실을 개혁하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아 행동했으며,

셋째로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가지를 하나님 안에서 인정하며 통합해 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를 포함해 우리는 어쩌면 여전히 왜곡된 현실에서 종노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종의 마인드로는 온전한 삶의 지도자로 살 수 없습니다. 고작해야 장난질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과 현실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과 처신을 병들게 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아사의 이야기를 통해 끊을 것은 끊고, 마주할 것은 마주하는 지혜를 가지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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