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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서는 자유(욘1:11~15/요8:31~36)

 

들어가는 말

2차 세계대전 중 잠수함 한 척이 바닷 속에 침몰했습니다. 미군함이 이들을 찾을 때 이 잠수함 속에 있던 군인들은 단단한 쇠붙이로 벽을 두드리며 모스 부호를 만들어 밖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내용은 “더 이상 이곳에 희망이 있을까?”였습니다. 아무도 구해줄 수 없을 것 같던 바로 그 순간에 병사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이 있을까?” 라고 마지막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죠.

이번 달에는 안타까운 사건이 유독 많습니다. 세월호 현장 지원을 나섰던 소방헬기 한 대가 추락하여, 5명의 탑승자 모두가 사망하기도 했고 말레아시아 항공기 한 대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격추당해 295명 전원이 실종되었으며, 지금도 이스라엘의 폭탄 세례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타격함으로 벌써 800명이 넘는 민간인이 숨지고 죽어가고 있다는 외신뉴스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는 적지 않은 다툼과 불행의 저편에 서 있는 그들 나름의 진리와 불편하게 서 있고는 합니다. 특히 각자의 신념이 모두의 행복을 앞질러 가는 세상에 살면서 옳고 그름을 하나님 앞에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1. 진리정치

지난 19대 총선 당시 어느 정당에서는 불법으로 비례대표 경선이 벌어져 문제가 커진 적이 있습니다. 당시 국민들은 진보 정당이 설마 그러하겠느냐 라며 그 실망감이 더욱 컸었는데요. 이들은 특히 자신들이 믿는 신념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국내의 다른 정당들과 아무런 차이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선거 참패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매체들은 이들 정치를 진리 정치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진리정치란 자기들이 믿는 것만 진리이며, 이외에 다른 것과는 철저히 투쟁하며 자신들의 이념을 성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옳고 그름은 목숨보다 중요한 일이며, 자신들의 생존의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했던 또.. 실은 이분들이 이야기하는 적지 않은 이야기들 속에서 저는 자주 다음과 같은 표현을 듣습니다. “우월한 생각”.. 예를 들어, 환경, 반핵, 인권 등의 가치들을 이야기할 때 이분들에게서는 분명 우월의식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월의식이 다른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자칫 “자기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무시하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도록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국민들은 진보의 필요성은 알기에 이들에게 표를 주지만, 결코 지금까지의 진보운동이나 행보들이 다 맘에 들어서는 아니라는 것쯤은 이들 정당들도 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편 누구나 완전한 승리만을 꿈꾸는 세상에 살면서도 적어도 / “십자가에서 완전한 패배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말에는 공감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외에는 어느 누구도 가장 확실한 진리의 담지자가 될 수는 없다. ”

즉 예수님 외에는 누구도 진리라고 말 할 수 없다입니다.

왜냐면 세상은 누구나 완전한 승리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면 대부분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님과 같이 패배의 쪽에 서려는 사람들은 적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기기 위해 간교해지고, 이기기 위해 자신을 진리 쪽으로 포장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 저를 포함해 우리들 역시 진리로 자신을 포장을 할 수 있을 뿐이지..누구도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2. 바보의 계산학

어느 교회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수련회에 참석시키려고 아이디어를 냈다고 합니다. 그건 아이들에게 문제를 내고 풀어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정답은 맨 뒷장에 적혀 있었죠.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이 땅에 내려오셨는가?”입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답을 뭐라고 썼냐면.. ‘세계 정복을 위해서다.’. ‘모두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다.’ 등 별의 별 이야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 모두 정답을 보고는 깊은 감동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 “네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사람이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달려가게 만드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옳고 그름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바보 같은 정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옳고 그름은 어쩌면.. 여러분을 끊임없이 분열시키는 아편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가 되게 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사랑과 믿음이 없으면, 다른 것으로 채워갑니다. 그것에는 사랑과 믿음 대신에 “정치”가 들어가고. 사랑과 믿음 대신에 “불안”이 들어가고. 사랑과 믿음 대신에 “오만”이 자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정치와 불안과 오만들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고, 똑같은 사람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죠.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점차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점차 내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에 놀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서 멀어지면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우리에게서 사랑을 없애려 우리의 영혼을 도둑질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또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관계와 신뢰입니다. 그래도 의심이 든다면 ‘무언가 옳고 그름이라는 자기 틀이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을 행복하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행복하십니까?/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만 옳고 그름을 말 할 수 있는 분이라고 고백한 것이 아닐까요? >

 

부끄럽게도 제가 이 시간 여러분에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제 안에 사랑이 충만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에 대한 확신이 약해져가기 때문에 드리는 호소입니다. 갈수록 세상의 것들과 방법이 손쉽게 제 영혼을 차지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수도 없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제 영혼을 갉아먹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각 자의 입장이 모두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오늘을 살며 저는 다시 사랑을 목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랑을 떠나면 엉뚱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떠나면 분열하고, 가슴 아픈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매번 똑같은 이유로 걸려 넘어지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3. 요나의 던져짐과 하나님의 넘어섬

오늘 본문에서 요나는 자신의 판단으로 니느웨로 가기를 멈추고 자신을 바다에 던질 것을 다른 선원들에게 말했습니다. 망망대해에 던져지는 일은 분명 두려운 일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하고, 어쩌면 같은 동족들에게 지탄받을 일들이 두려워, 그는 배에서 자신을 던져지길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끊임없는 판단이 그를 둘러쌌고 자신을 괴롭혔습니다. 니느웨는 우리 동족을 괴롭힌 나라의 성읍이야! 나의 원수라고! 그리고 설령 그가 믿음으로 이들에게 말씀을 선포한다고 한들 나의 동족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더구나 멸망이 코앞인데 이들을 살리는 회개의 선포를 하라니. 모두들 나를 제정신으로 여기지 않을 거야...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가 끝까지 니느웨에서 일을 마치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기어코 요나서의 마지막은 박넝쿨에게서 ‘생명과 사랑’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모든 어려움이 자신 때문인 것처럼 여겨지면서, 누구도 나의 처지를 알아주지 못할거란 두려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만 배에서 내리면 모든 일이 잘 될거라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준 숙제를 풀기까지 이 문제의 자리에서 도망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숙제를 풀기 까지 절대로 놔주시지도 않습니다.

일례로 우리는 같은 실수와 불행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을 경험합니다. 항상 같은 이유 때문에 실패하고, 같은 데를 다치거나 마지막 과정에서 그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들이 그렇습니다. 희망도 없고 대안도 없이 망망대해를 떠다니듯 지내는 시간이 그렇습니다.

개인 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도 그렇습니다. 옳고 그름의 목적이 생명이 아니므로 오늘도 이 나라는 저 나라로 폭탄을 떨어트렸고, 여자라서 혀가 잘렸으며,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아이들의 생명은 다음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람과 세상은 매 번 이 반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닷 속에 던져진 요나처럼 사람과 세상은 도무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 하기보다, 자신의 진리만을 믿고 따를 뿐입니다. (군산 교회 이야기)

예수님은 그런 세상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화가 난 군중들의 얼굴을 보았을 것입니다. 어제까지 자신을 따르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고, 도리어 아버지 하나님께 저와 여러분을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생명에 있었습니다. 영생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 도저히 넘지 못하던 현실의 장벽을 믿음으로 넘어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전에 요나에게 하나님은 민족주의와 유대인만 구원을 얻는다란 장벽을 넘도록 요구하셔던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 모든 민족이 잘못된 믿음과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회복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랑 없는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가 사랑을 시험하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사랑할 수 없을 때 사랑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부르셨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우리를 찾으시고, 사랑으로 세상을 넘어 서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예수님은 자신을 시험해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거할 하늘 처소가 적은지.. 하늘로부터의 복을 받을지 안 받을지.. 구원이 네게 임할지 안 임할지!

 

예수님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넘으셨고,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께서도 목적하셨던 그 길입니다. 사랑입니다. 생명입니다. 감사입니다. 기쁨입니다. 행복입니다. 넉넉함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사랑이 먼저 하늘로부터의 체험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한 번도 사랑다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위로부터 눌러 부어 주시는 사랑에 한 번도 노출이 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우려입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집니다. 매일의 삶의 목적이 달라져야 한다는 도전이 제 마음을 두드립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레디컬한 급진적인 가르침이 여전히 ‘사랑’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 라고 확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말하시며 이 말씀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완전히 내 체질과 기질이 녹을 때까지 하늘을 사모해야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밀려옵니다.

현명한 사람은 파산한 기업에 투자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성도 더 이상 파산한 세상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도 사람의 세 종류에 대해 말합니다.

첫 번째는 욕망의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두 번째는 권력의 사람입니다. 돈이나 기본적인 욕망을 성취한 인간은 바로 권력에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자신에 대한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이데거 자신도 자신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이 파산했음을 대신에 하늘나라의 임하심을 확신하셨습니다. 요나가 아무리 몸부림치며 소명을 거부하려고 했어도 결국 하나님이 생명과 사랑의 회복의 자리에 앉혔듯이, 저와 여러분도 다시 이 십자가의 사랑 앞에 앉아야만 할 것입니다.

 

나가며..

마무리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넘지 못하는 이 세상의 죄악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넘어 이기신 것도 믿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진리로 우리를 구속합니다. 때로는 이편에서 또 저편에서. 마치 공산당과 반공청년단 사이에 줄서기를 강요하듯 세상은 저와 여러분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이 바보 같은 행동은 분명 사랑이었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내린 들판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한 발 한 발 정성을 다해 사랑으로 걸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힘들지만, 분명한 걸음으로 꾸욱 꾸욱 눌려 걸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주님을 따라 갑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앞선 발걸음을 어지럽게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왜냐면 여러분의 자녀와 믿음의 후배들이 그대로 따라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오랜 시간 동안 믿음 생활을 했다는 것이 하나님께 더 많은 죄를 지어 왔음을 의미하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능히 먼저 된 자도 나중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랑으로 마음을 덥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 가슴을 충분히 씻어내야 합니다. 질투와 시기와 간교함에서 우리를 건져내야만 할 것입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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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2: 25-33 배신의 일생을 산 여로보암

 

들어가는 말

한 모태신앙을 가진 집사님이 결혼을 하고 다시 신앙생활에 불이 붙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금요기도회에 나섰다가 신유의 체험을 하고는 하나님 작은 미용실이라도 좋으니 만일 미용실이 생기면 복음미용실이라고 짓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친지 한 분이 찾아와 선뜻 돈을 내놔 미용실을 차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이 집사님은 20년 동안 7번이나 미용실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갈 때마다 옆에는 어김없이 다른 미용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일도 문을 닫지 않고, 영업을 시작해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큰 교통사고가 나서 합의금으로 그동안 모은 돈을 내놓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예수님을 배반한 체 손님을 쫓아가던 삶을 정리하고, 다시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미 파산한 세상 가운데에서 주님은 우리가 다시 세워지는 건강한 삶을 요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너무 늦으면 주님이 미처 손을 대고자 하여도 닿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이야기 주인공인 여로보암에 관한 경우입니다.

 

1. 여로보암은

부: 느밧, 모: 스루아, 에브라임 지파. 자: 아비야, 나답.(11: 26, 14: 1, 20)

여로보암의 아버지는 솔로몬 왕의 신복이었습니다. 믿을 만한 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높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선지자 아히야가 여로보암을 찾아와 나라의 12/10을 나눠주고 마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의 삶은 끝내 우상숭배와 배반으로 끝마쳐 짐을 미리 알 필요가 있겠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열심히 하나님의 손을 거부하는 잘못된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그런 것이죠. 우리는 그래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일인지 분명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한 번의 선택이 영영 다시금 자신의 영혼을 세우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이 함정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있었지만, 그가 조급함으로 그르친 과정들은 결국 그가 하나님을 멀리 하고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그 배반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합니다.

 

2. 중요사건

첫 번째 배신 1: 솔로몬 배신(11: 26, 40) - 망명

아버지가 솔로몬의 신복(부하)이었고 솔로몬이 그를 높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아히야의 말을 듣고 그것을 못 참아서 왕을 배신하고 반역을 일으키고 애굽으로 망명.

여기서 그가 애굽 땅으로 도망친 행동이 재밌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이 빠져 나온 땅입니다. 물론 솔로몬의 때에도 애굽은 실력 있는 나라였음에 분명하죠. 그러나 성경에서 애굽은 다음의 상징적인 의미들이 있습니다.

첫째. 실패의 상징입니다. 모세에게 애굽은 자신의 살인죄를 기억하는 나라입니다.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예전의 영화가 있던 곳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실패하여, 낙망을 선물해준 곳이기도 합니다.

둘째. 심판의 상징입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이라는 사건이 집행된 곳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복음서에서 마리아와 요셉도 이 애굽 땅에서 지낸 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 출애굽 사건이 바로 애굽에서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애굽은 죄에 대한 심판의 장소이자, 이곳을 떠나는 자에게는 구원의 장소로 이해될 수 있는 곳이죠.

그런데 여로보암에게 애굽은 그야말로 자신의 몸을 숨기기 위한 장소일 뿐입니다. 애굽은 여로보암을 받아줬지만, 그는 이곳에서 마치 다윗왕이 사울을 대할 때 처럼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대할 때 처럼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리게 됩니다. 바로 배반의 때이죠.

 

배신 2: 다윗 왕조 배신(12: 1-2, 20) - 나라 세움

그러던 중 여로보암은 솔로몬이 죽자 자신의 추종자들의 요청으로 이스라엘의 세겜 땅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부역이 지나치니 줄여달라’ 청했다가 이 요구가 거절당하자, 나라에 등을 돌리고 다른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아히야 선지자의 예언이 어쩌면 여로보암의 행보를 조급하도록 했는지도 모릅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왕이 되는 일이 여로보암으로 하여금 쉽지 않던 운명을 감당하도록 한 면도 있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여로보암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기어이 ‘일을 치르고자 했던 여로보암의 반역’입니다. 사람은 힘을 가졌을 때 진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여로보암의 이스라엘의 불행을 이용해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체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의 결정적인 여로보암의 배반이었던 것이죠.

 

배신 3: 하나님 배신(11: 38-12: 27-33, 14: 7-9) - 파멸

그러나 하나님의 순리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내와 믿음으로 일이 세워지지 않는 이상 인간은 늘 불안하고, 그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몸부림 치기 마련인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스스로 자멸해 갑니다. 그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왕권이 흔들리는 것을 매우 겁내합니다.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해내고야 말죠.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왕권에 대한 집착. 12: 27: 대비: 삼상 13: 8-11)입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두 금송아지 만들고 신이라 칭하고(12: 28, 대비 출 32: 4) 제단 만듭니다.

벧엘(남)과 단(북) 두 곳에 산당을 짓게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의 성전 신앙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고 극복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산당(풍요의 신 숭배)에서 제사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일반으로 하여금 제사장으로 삼아 억지로 절기를 지키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무너진 신뢰입니다. 그야말로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서지 못한 솔로몬의 죄로부터의 원인이지만, 이때 당시 솔로몬이 그랬던 것처럼 왕권 강화로 이방 신까지 이용되었던 것과 달리 이젠 여로보암은 선을 넘어 야웨 하나님 자체를 거짓으로 모시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상황도 이를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은 이젠 죄와 비극의 장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예루살렘의 성전은 그 대단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큰 의미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에게 죄로 더렵혀진 장소가 되었음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은 ‘죄의 빌미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인지라.. 죄의 빌미들이 늘 또 다른 배반의 씨앗을 품게 만드는 것이겠죠.

그럼에도 책임을 물을 때 여로보암은 자유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의 기질 역시 이와 같은 배반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변의 상황들이 배반을 엮어가도록 할 때 이를 알면서도 오히려 이를 이용한 면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여로보암의 속 내는 옳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자손들의 씨가 마르게 된 것이죠.

 

아들 아비야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을 섬긴 것을 제외한다면, 여로보암은 죽은 뒤 그의 후손들이 멸절됩니다. 그의 아들 나답은 통치 2년 만에 ‘바아사의 반역’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심지어 이로써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로보암 가문의 씨가 성경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를 따랐던 10지파 역시 지구상에서 완전히 종적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두려워야 할 것입니다.

 

나가며.

여로보암은 분명 아히야 선지자로부터 미래의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 역사의 한 왕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울과 다윗, 솔로몬의 때를 이어 어쩌면 이 모든 죄악의 연속성이 계속해서 여로보암에게도 흐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구약성서는 지독한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읽는 우리들은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뜻을 두고 살면 결국이 다 같더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나라가 우리 삶 가운데 한 층 더 다가오고, 우리의 정신이 더욱 더 정결해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그 독특한 조급함 즉 추진력 때문에 또 자신의 힘을 지키기 위한 발빠른 대응력 덕분에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살아 남았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잔이 다 했을 때 위로부터 부어지는 불행의 잔은 결국 자신의 가문과 10개 지파 자체를 멸망하도록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의 이끄심과 명령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초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살펴볼 때 과연 있는 것을 뒤 엎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차라리 이미 세워진 것을 지켜내는 것이 차라리 나을 때도 있다는 것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어떤 왕도 하나님의 뜻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백성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뜻대로 살 수 있는 더 많은 시간과 기회를 주고 계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이 세운 모든 것의 흥망성쇠가 인간의 죄에 있음을 살펴본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깊을수록 반면 여호와의 법도와 나라는 영원할 것이란 확신이 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는 영원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높고 두렵게 여길 줄 아는 자가 결국엔 모든 성읍과 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단순하지만 놀라운 이 사실은 결국 하나님 앞에 작은 자 결국 12지파 중 2지파에 불과한 남유다가 역사의 마지막까지 살아남게 된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작은 자 사울과 다윗을 부르셨던 하나님의 깊은 뜻이... 결국 남유다의 베냐민과 유다지파만을 지켜주셨던 하나님의 나중 행동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자는 살아남습니다. 겸손하면 다시 쓰십니다. 지금의 흥왕이 대수가 아니라 오늘 이야기를 통해 긴 호흡으로 역사와 섭리를 이해하시는 시간 되셨기를 바랍니다. 결국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면 반드시 하나님이 선하게 이루십니다.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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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심의 두 방향(왕상11:30~40)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선조들은 장애를 질병 중의 하나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장애인과 그 부양자에게는 각종 부역과 잡역을 면제했다. 조선 초,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허조 (척추장애인)이었고, 중종 때 우의정을 지낸 권균 (간질장애인),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 (지체장애인), 영조 때 대제학, 형조판서에 오른 이덕수 (청각장애인), 역사를 빛낸 수많은 장애인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장애인은 단지 몸이 불편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세종대왕시절 박연이 왕에게 이렇게 아룁니다.

"옛날의 제왕은 모두 시각장애인에게 현송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음)의 임무를 맡겼으니 이는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신체적 장애를 등용 거절의 사유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이들에게 배려와 기회를 허락한 선조들의 지혜야 말로 이 시대가 따라가지 못하는 덕목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장애인을 등용했다고 해서 장애를 가졌어도 어찌되었던 무조건 등용되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 심지와 명철이 분명하고, 자기 재능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중심’이 바른 사람에게야 이와 같은 기회가 쥐어 줬겠죠.

그러므로 장애는 문제가 되지 않아도, 중심이 바르지 못한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도 쓰임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죠.

 

1.부에 도취하고 이방우상에게 마음이 팔린 솔로몬(10:14-29절)

오늘 이야기는 솔로몬의 이야기 마지막 시간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덕분에 크나 큰 복을 받습니다. 먼저는 듣는 마음을 얻은 그것이 하나이고, 두 번째는 넓은 마음을 얻게 된 것이 두 번째 일 것입니다. 지혜와 지략 등은 모두 이 두 가지 삶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그런데 솔로몬의 삶에 빨간등이 켜지는 징조가 나타나게 됩니다. 먼저는 10장 14~이하의 말씀입니다. 이 내용은 그가 엄청난 세금과 부를 누리게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에 눌리게 되는데, 필요 이상으로 솔로몬이 하나님의 영광에 기대어 부를 쌓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은 ‘부요함’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부요함은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일체의 족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부요함은 자족에서 출발하는 신앙입니다. 자족은 항상 족한 줄 아는 자세를 의미하죠. 더 가질 수 있을 때에도 다음을 위해 남겨두는 것을 말하고, 더 나갈 수 있음에도 주변을 살피기 위해 멈춤을 말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점차 자신의 욕심에 사로잡혀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도 솔로몬과 같은 우를 범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만, 물론 어디까지가 적정한 부인지 정하기도 어려운 터라.. 아마도 자신이 쌓아가는 부만큼의 대가지불이 그들에게 요구될 것이란 정도로만 이야기를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 늘 그래왔으니깐요.

여튼 본문 11장은 솔로몬의 결정적인 잘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가 쌓이고 명예가 쌓여서 그럴까.. 사람들은 지킬 수 있을 때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 때문에 명예나 능력을 잃기도 하는 것이죠. 솔로몬 역시 지킬 것이 많아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이방나라들과의 혼인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때 후궁이 칠백 명이고 첩이 삼백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큰 나라와 더불어 작은 도시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력자들과 더불어 혼인외교를 하고, 주변 국가의 부와 지식을 섭렵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국가가 성장하면서 다른 국가와의 교류를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11:4절은 그가 이방여인들로 인해 마음이 변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들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측근의 말만 듣다가 나중에는 소수에 의해 눈과 귀가 머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가 있죠. 마찬가지로 하나님 신앙이 갖는 그 분명한 공의의 기준과 그 넓은 자비가 갖는 균형의 기준이 점차.. 이쪽과 저쪽 사이의 균형을 기준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인간 정치는 양쪽 세력 간의 균형을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의 정치는 본질적인 균형에 있음을 아셔야만 할 것입니다. 불의와 공의가 친구가 될 수 없듯이 불신앙과 신앙은 더불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힘들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기준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들은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이방신을 멀리 하라는 음성을 들었지만, 이미 잘못된 길에 들어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멀리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함으로 결국 자신의 왕국을 자신의 부하에게 넘겨 주어야 하는 징계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솔로몬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항상 깨어서 믿음생활을 행하지 않으면 우리도 언제든지 솔로몬의 자리에 떨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고 항상 경성하여 믿음 안에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를 지켜주시는 신실하심도 있지만, 청종치 않는 백성을 향한 징계 역시 분명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인간에게서 찾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찾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좌우로 흔들리나 하나님은 어느 면에서나 우뚝 서시며, 사람은 인정에 흔들리나 하나님은 더 큰 사랑으로 모두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감히 닮을 수 없는 사람이기에 이 기준이 늘 부담이 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언제나 돌아보면 서 계시는 주님은 분명 망망대해에 등대와도 같은 분이십니다.

 

2. 자비로우신 하나님

다음에 또 하나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러한 솔로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생전에 이 일을 행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더욱이 그 나라를 모두 넘기지 않으시고 유다지파를 통하여 다윗과의 언약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항상 자신 앞에 등불을 들게 하신 것입니다.(11:36)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한량없으심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사랑을 받고 있는 믿음의 자녀임을 감사하면서 항상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의 약속에 충실하게 행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솔로몬의 대적과 여로보암

솔로몬의 부흥기가 끝이 나기 시작합니다. 주변에 적대국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때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11:14절에 등장하는 하닷입니다. 하닷은 에돔사람입니다. 예전에 사무엘서 설교 중에도 나왔습니다만 에돔은 다윗 시절 요압장군이 육개월이나 그 땅에 머물며, 에돔의 모든 남자를 진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하닷은 작은 아이에 불과했는데, 몇몇 어른과 간신히 도망하여 애굽에 머무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부패한 세상을 심판하고자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애굽 땅에서 불러내었듯이, 하닷 역시 부패한 솔로몬의 왕국에 저항하고자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닷은 애굽왕의 총애를 얻어 황제의 사돈이 되었고, 이후 르손과 여로보암과 더불어 유다왕국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신실하게 이들을 보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부패하여 또 다른 이를 압제할 때 하나님은 이제 그 압제당한 이들을 통해 원 나무를 심판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불의에 대해 심판을 공의에 대해서는 선대의 심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실로(보냄받았다)의 사람 아히야 선지자는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합니다. 31절 말씀.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각종 우상 신들을 모시고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내 법도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함이니라.”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에게 언약하신대로 여로보암에게도 37절에 동일한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 여기서도 하나님의 두 가지 신실함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여로보암을 통해 솔로몬 왕을 심판하실 것이란 사실과 또 하나는 그래도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하되 영원하지는 않으며, 한 지파는 남겨둘 것이란 자비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때와 같이 동일하게 솔로몬(사울)-여로보암(다윗)의 구도로 여로보암이 애굽땅으로 도망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이스라엘 주민 정체성)

 

나가며

마무리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악한 자에게는 악의 보응을 선한 자에게는 선한 응답을 주십니다. 오늘 악으로 심는 자는 이미 그 어리석음으로 심판받았음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신약의 데살로니가후서2장의 이야기에서도 이와 같은 면을 알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악한 자들이 이 땅에 나타나는 이유는 이들이 불의를 좋아하고 심판을 받게 하시려고 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이들도 자기들의 역할이 있으며, 이들은 진리를 도무지 알 수도 따를 수도 없는 사람임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선택한 종이었습니다만, 결국 사울과 같이 심판을 받게 되고 말았습니다. 진리를 따르다가 실족하여 우상숭배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왕국을 이끌며 어쩔 수 없는 판단과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만... 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음으로 솔로몬은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신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심이란 균형의 문제가 아니라 기준을 향해가는 방향을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입니다. 믿음으로 판가름하며, 또 믿음 안에서 용납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이 두 가지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주의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끝..

 

Posted by 돌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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